흥미진진 교회사

2018년 05월

부흥의 불꽃

흥미진진 교회사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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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흥, 끝이 아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부흥의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고 영국 웨일즈로 이어졌고, 인도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이 모든 글로벌 부흥의 역사는 선교의 불모지 아시아를 위해 준비된 예고편이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조선은 글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신감에 충만했다. 20만 명의 육군과 26만 톤의 함대를 갖춘 군사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조선을 지나 중국을 침략하고자 했다. 일본의 움직임을 불안해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견제하기 원했고, 그 중심에는 고종의 왕후인 명성 황후가 있었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 황후는 처참하게 시해당하고 그 시신은 불살라졌다. 있을 수 없는 수모였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시아의 맹주들이 격돌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었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됐고, 1907년 고종이 퇴위함으로 주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1910년 한일 합병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된다.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버린 조선 땅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병인양요
12살의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휘두른 흥선 대원군은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쳤다. 서양 종교인 천주교를 탄압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입했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는 서양 세력과 대항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적인 전투였다. 그리고 같은 해, 대동강에는 미국 상선이 나타났다. 제너럴셔먼호라 불리는 이 배에는 푸른 눈의 젊은 선교사가 타고 있었다.


순교의 첫 열매, 토마스 선교사
조선을 향한 마음으로 기회를 찾던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866년 7월,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통역 겸 안내자로 이 배에 오른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제너럴셔먼호는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일반 상선이었지만 서양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이 볼 때 순수한 무역선이 아니었다. 쇄국 정책으로 민감한 시기에 무기를 갖춘 서양 배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으니 조선의 적대적인 감정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충돌은 불가피했다.


대동강 전투
평양 감사 박규수는 전투를 준비했다. 마침 장맛비가 빠져나가면서 모래 위에 좌초된 셔먼호는 총을 쏘며 대항했지만 화승포로 공격하는 조선 군사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군사들은 작은 배에 불을 붙여 셔먼호로 떠내려 보냈고, 셔먼호는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불타는 셔먼호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은 모두 살해됐다. 성경을 품에 품고 헤엄쳐 나온 토마스 선교사는 자신을 죽이려는 병졸 박춘권에게 성경을 건네주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렇게 토마스는 대동강 강변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순교의 열매
토마스의 죽음은 조선 선교의 씨앗이 됐다. 불타는 셔먼호를 바라보던 12세 소년 최치량은 토마스가 준 세 권의 성경을 보관했고, 그것을 영문 주사 박영식에게 줬다. 박영식은 성경을 뜯어 자신의 집 벽지로 발랐다.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 벽에 붙어 있는 성경을 읽고 신앙을 갖게 된다. 훗날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사용하는데, 그곳에 마펫 선교사가 머물게 되고, 최치량은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이어 박영식도 예수를 믿게 됐고, 그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후에 ‘장대현교회’로 불리게 된다. 바로 이 장대현교회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D-1(1907년 1월 14일): 대부흥의 서막
당시 술과 기생의 도시였던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주도한 집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사경회의 장소가 바로 장대현교회다. 1천 명이 모인 사경회가 끝나가던 1월 14일 밤, 집회가 끝났지만 기도의 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600여 명이 남아서 기도를 이어 갔고, 그 밤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D-Day(1907년 1월 15일): 대부흥의 역사
다음 날, 회개와 간증이 지속되면서 저녁 8시에 시작한 모임이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저마다 은밀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집회를 이끌었던 길선주 목사의 외침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처럼 능력이 있었다. 한국인부터 선교사까지, 장대현교회에 모여 있던 모두에게서 진심 어린 회개가 터져 나왔고, 회개는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도둑맞은 물건과 돈이 되돌아왔다. 죄에 물든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이 역사는 한 달도 되지 않아 평양을 넘어 서울과 청주, 광주, 대구 등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평양의 새 이름, 동방의 예루살렘
부흥운동의 결과는 놀라웠다. 평양과 서울은 물론 전 지역의 교회마다 밀려오는 신자들로 차고 넘쳤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나 웨일즈의 부흥과 비슷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회개했고, 그 결과 용서와 기쁨을 경험했다. 미국의 부흥운동이 사회 변화로 이어진 것처럼 평양 대부흥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환락과 죄악의 도시였던 평양은 거룩한 도시로 변화됐다. 성령의 역사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교회가 희망이다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던 구한말 조선, 교회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민족에게 등대와도 같았다.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1907년 조선 땅 평양에서 활활 타올랐고, 그 열기는 아시아 선교를 위한 동력이 됐다. 평양 대부흥운동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됐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교회는 이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Q

참고 자료: 박용규, 『세계부흥운동사』
www.1907reviv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