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이야기

2024년 07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 헐버트

선교사이야기 김예성 목사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전인 1907년, 우리나라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어요. 당시 나라를 다스리던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사절단을 보내, 우리나라를 강제로 침략한 일본의 만행을 알리려 했어요. 그런데 이 사절단에 푸른 눈의 외국인이 함께하고 있었어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 온 헐버트 선교사님이었어요. 헐버트 선교사님은 어떤 분이기에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 독립을 도왔을까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교육 전문가

미국의 버몬트주에서 태어난 호머 B. 헐버트의 아버지는 목사이자 교육자였어요. 어머니는 지금도 유명한 다트머스대학교 설립자의 증손녀였지요. 헐버트는 교육자인 부모님을 보며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한 헐버트는 한국 최초로 나라에서 세운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에 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그러나 육영공원에 다니던 양반 계급 학생들은 공부에 큰 의지가 없었어요. 이에 실망한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던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헐버트에게 다시 한국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헐버트 선교사님은 돌아온 한국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어요. 배재학당에서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자주적 역사관을 심어 주었어요.

 

또한 헐버트 선교사님은 역사서인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할 정도로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헐버트 선교사님은 특히 한글에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었어요.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님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을 도입해, 보다 읽기 편하도록 한글을 다듬는 일도 하셨답니다.

 

한국의 독립을 도운 푸른 눈의 외국인

헐버트 선교사님은 한국을 정말 사랑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제작을 돕고, 신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도왔으며, 일본인의 횡포에 맞서 한국인을 보호해 주었어요.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어요. 고종 황제는 사절단을 파견하고 싶었지만 일본의 방해가 심했어요. 그때 헐버트 선교사님이 나섰어요. 일본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일본의 눈을 속여, 사절단이 무사히 헤이그로 갈 수 있도록 도왔어요. 헐버트 선교사님과 사절단은 헤이그에서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입장할 수 없었어요. 결국 헐버트 선교사님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헐버트 선교사님은 미국에서도 신문에 글을 싣거나 강연을 하는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데 힘썼어요.

 

헐버트 선교사님의 유언

헐버트 선교사님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한국 땅을 밟았어요. 그러나 고령인 데다가 긴 여행 기간에 지친 나머지,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지 1주일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런데 헐버트 선교사님은 자신이 나고 자란 미국에 묻히지 않았어요. 어째서일까요?

 

양화진외국인묘원의 왼쪽 언덕에는 헐버트 선교사님이 잠들어 있어요. 헐버트 선교사님이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에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에 있는 국립묘지인데, 생전에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영웅들이 잠들어 있어요. 아무리 큰 영예가 주어지더라도 자신은 한국에 묻히겠다는 헐버트 선교사님의 유언은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어요.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이에요. 한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 친구도 이날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는 <큐티프렌즈> 친구들이 되길 소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