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이야기 김예성 목사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던 한 청년이 낯설고 낯선 조선 땅으로 들어가게 될 줄은 아마 청년 자신도 몰랐을 거예요. 이 청년의 결단은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문을 활짝 열어 준 위대한 시작이었어요. 자신이 계획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먼 이국 땅에 온 벙커 선교사님! 한국의 교육과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벙커 선교사님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궁금하지요? 지금부터 벙커 선교사님을 만나러 가 보아요~
육영공원에서 배재학당으로
D. A. 벙커는 1853년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미국의 오벌린대학교를 졸업한 후,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유니온신학교에 진학했어요. 벙커가 안정된 환경에서 좋은 대학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벙커를 부르셨어요.
한국이 아직 조선으로 불리던 시절, 왕실은 이제 조선도 서양처럼 발전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양식 근대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육영공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를 구하고 있었어요. 이때 벙커가 헐버트 선교사님 등과 함께 육영공원 영어 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육영공원은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문제가 있었어요. 양반만 학생으로 받았는데, 정작 이들은 영어 공부 외에는 학습에 큰 열의가 없었어요. 여기에 재정적 어려움까지 더해 결국 9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지요. 그러자 벙커는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세운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배재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미국 감리교 선교부 소속의 정식 선교사가 되었어요. 벙커 선교사님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배재학당을 운영하며 수많은 민족 지도자를 길러 냈어요.
한국 교육에 헌신한 부부의 열심
벙커 선교사님의 아내이자 의사인 앨러즈 선교사님은 고종 황제의 왕비 명성황후의 주치의이기도 했어요. 앨러즈 선교사님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뒤 자신이 만난 명성황후에 대한 글을 실어 그녀를 추모했으며,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정신여학교의 1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어요. 부부가 모두 한국인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지요.
벙커 선교사님 부부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시기에 활동하며 한국을 탄압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직접 목격했어요. 그래서 이들은 주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인의 활동을 후원했어요.
한편 벙커 선교사님의 동료와 제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당시의 감옥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환경이 열악했으며, 죄수들에게 고문이 가해지는 무서운 곳이었어요. 벙커 선교사님 부부는 동료 선교사님들과 함께, 이들을 고문하지 말고 음식과 옷, 책 등을 자유롭게 들여가게 해 달라고 정부에 청원했어요. 이는 선진국에서 당연히 취하는 제도이므로, 한국도 마땅히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구했어요.
이렇게 감옥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낸 벙커 선교사님은 수시로 감옥에 찾아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이때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도 예수님을 영접해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교육 운동에 몸을 바쳤어요. 벙커 선교사님 부부는 감옥에서 전도하는 일에 누구보다 헌신적이었어요.
이렇듯 벙커 선교사님은 한국에 근대 교육의 문을 활짝 열어, 교육을 통해 민족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를 길러 냈어요. 그리고 감옥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지요. 벙커 선교사님은 유골을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양화진에 묻혔고, 아내 앨러즈 선교사님의 유골과 함께 조성된 무덤의 비석에는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문장이 새겨졌어요.
하나님께서는 한국을 위해 준비된 벙커 선교사님을 보내 주셨어요. 그리고 흑암이 가득한 나라에 복음의 새 빛을 비추셨지요. 벙커 선교사님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꿈꾸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미래는 내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에요. 벙커 선교사님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뿐이에요.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믿으며 걸어가는 <큐티프렌즈>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