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이야기 김예성 목사
근대화가 되기 전 한국은 양반과 평민의 구분이 엄격했어요. 그중 여성에 대한 구분은 더욱 엄격해, 여성은 공부도 할 수 없었고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어요. 말 그대로 꿈꿀 자유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렇게 차별이 심했던 황무지와 같은 한국 땅에 차별 없는 사랑의 복음이 전해졌어요. 한국인, 특히 수많은 여성에게 꿈을 심어 주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기반을 다진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까요?
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으로 파송받은 스크랜턴 가족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메리 스크랜턴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에서 활동했어요. 스크랜턴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였어요. 의사로 일하던 스크랜턴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한 목사님을 통해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윌리엄은 아내와 깊이 의논한 끝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때마침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에서 스크랜턴에게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처음 스크랜턴은 선교사로 나가기에는 자신이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거절했지만, 생각 끝에 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스크랜턴은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한 첫 여성 선교사였어요.
한국 여성을 위한 위대한 헌신
스크랜턴 선교사님과 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님 부부는 1885년 한국에 도착했어요. 아직은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했으며, 특히 여성들은 학문을 배우기는 고사하고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고, 몸이 아파도 의사가 남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치료받을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특히 여성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느껴진 교육과 의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1886년, 작은 학교를 열었지만 외국인을 경계하던 사람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그러나 겨우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고종 임금으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받기에 이르렀어요. 친구들도 많이 알고 있을 이화여자대학교의 출발이랍니다. 이화학당은 오랜 세월 황무지에 갇혀 살며 꿈꿀 자유조차 없었던 수많은 한국 여성에게 기회의 문이 되어 준, 한국 여성 교육의 시작이자 한 줄기 빛이었어요.
또한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여성의 의료 복지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님과 함께 일반 병원인 ‘시병원’과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녀관’을 설립했어요. 보구녀관은 병원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던 한국 여성을 치료했고, 여성 의료인을 키우는 것에 힘썼어요. 박에스더 등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를 키워 내기도 한 보구녀관은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 대학과 간호 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이라는 열매로 남아 있어요.
한국인을 향한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믿음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교육 목표는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였어요. 스크랜턴 선교사님에게는 복음 안에서 한국인이 성장할 때,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믿음은 현실이 되었어요. 이화학당과 보구녀관은 의사와 교사, 간호사, 선교사 등 수많은 전문직 여성의 산실이 되어 어둠에 갇혀 있던 여성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한국 땅 곳곳에 복음과 희망을 전하는 기폭제가 되었어요.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평생 한국의 여성 교육과 의료에 힘을 쏟았어요. 이화학당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배움의 기회를 나누었어요. 고령인 나이와 문화 차이도 복음을 향한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어요. 그렇게 평생을 헌신하다가 1909년에 한국에서 세상을 떠난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자신의 유언대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히셨어요.
<큐티프렌즈> 친구들! 스크랜턴 선교사님처럼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이 되는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 정말 멋지지 않나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작은 사랑의 씨앗을 심는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