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동안 귀가 아프도록 많이 들어 온 말이 있다면 변화라는 용어가 아닌가 한다.하도 들어서 이제는 식상할 정도이다.그러나 변해야 한다는 소리는 정말 중요하고,절실한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어 있다.정치권에는 변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학교가 달라지고 기업들이 변신을 하기에 정신이 없다.정보고속도로가 실용화될 날이 머지않아서 그런지 이제는 우리 몸에 익숙하던 전화도 초라해 보이고 텔레비전마저 고무신처럼 여겨지는 희한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바뀔지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94년 세계언론인협회가 국제대회를 열면서 내걸었던 슬로건은 퍽 충격적인 것이었다.‘가장 먼저 망하려면 변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어찌 이 말이 언론맴체에만 해당되는 것이겠는가? 우리 목회현장에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 기독교의 진리는 영원불변한 것이니 세상이 변해서 사람들이 거꾸로 걸어 다녀도 목회는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언론인협회가 내 걸었던 슬로건이 우리 목회자에게도 남의 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왜 그러한지 묻는다면 이유를 모두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이다.그리고 왜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자체가 시대에 너무 처진 것 같아 서글퍼진다.그러나 한 두가지는 언급을 해야 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회의 대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목회자로서 반드시 전공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 청중이다.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여상하신 분이라 사도 바울이 알던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다.하나님의 지식은 그 불변성에 생명이 있고 권위가 있다.반면에 목회 대상인 청중은 가변성이 그 특징이다.타락한 인성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큰변화가 없다.있다면 질적인 차이 정도일 것이다.그러나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그 관습이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쉬지 않고 변화하여 왔다.심지어 진리에 대한 이애까지 수정을 강요당하여 왔다.그러나 농경사회는 그 변화의 속도가 수백년을 소모할 만큼 느렸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위기감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산업사회도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진행되었다.이제 우리는 정보사회로 진입을 하고 있다.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눈만 뜨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같은 환경적인 변화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일까? 정확한 연구 자료도 없으면서 함부로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한가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엄청난 쇼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한다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근거가 있다.바로 나 자신이다.10년전에 비해 오늘의 나 자신은 굉장히 변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한가지 예를 들자.예전에는 이혼에 대해 얼마나 엄격하였는가? 성격이 안맞아서 갈라서겠다고 하면 말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던 내가 요즘에는 그런 사람을 이해하려고 구차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이것이 잘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전에 비해 너무 달라져 있는 평신도를 목회자가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다.목회대상이 달라지는데 목회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청중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목회가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청중에게 아부하면서 끌려 다니기 위해서가 아니다.그들을 진정 위해주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다.목회자의 성육신은 오늘의 효과 있는 목회를 위해 불가피한 요구이다.그들과 대화가 안되는 목회는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그들이 가까이 다가서기를 꺼려 하는 목회현장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그들에게 신회를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면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그러므로 오늘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목회를 하려면 목회자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목회자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목회는 무엇부터 손질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무슨 교과서를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가장 빠른 길은 평신도와 함께 말씀을 앞에 놓고 마주 앉는 자리에서 얻어진다.그리고 오랜시간 그들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인내하면서 지켜 보는 것이다.그 시간 성령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그 음성을 귀담아 듣는 것이다.그리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지체로서의 교제를 지속하는 것이다.한번 해보라.지도자도 변하고 평신도도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지도자는 오늘의 평신도가 꼭 필요로 하는 목사로 바뀔 것이고 평신도는 불변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사람들로 바뀔 것이다.바람직한 목회현장의 변화는 이와 같이 제자훈련에서 찾아야한다.제자훈련을 하지 않는 목회자는 급변하는 현실에서 자기도 모르게 달라지고 있는 평신도의 깊은 영적 요구를 읽기가 어렵다.
자연히 문제 의신이 희박해 질 수 밖에 없다.이런 지도자는 변화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게 된다.좋은 의미의 변화든지 나쁜 의미의 변화든지 간에 평신도가 스스로 그 변화를 소화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제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직성을 요구하고 공동체의 사랑에 갈급하고 지적인 것보다 감정적인 반응에 더 민감한 현대인들을 위해서는 제자훈련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Larry Richards가 1992년도에 미국 목회자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강화하기 위해 앞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이질문에 대해 리차즈는 믿기지 않는 조사결과를 내어 놓았다.응답자의 100%가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는 것이다.
“평신도를 사역의 동역자로 발굴하여 훈련하는 것이다.”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1세기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목회의 전략이 바뀌어야 하고 동시에 목회자와 평신도의 주체성이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바로 제자훈련을 목숨걸고 해야겠다는 결단만 할 수 있어도 오늘의 목회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자기 변화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우리에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