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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평깨 31 호

한사람을 위하여

2004년 05월 최재하 목사(사랑의 교회 우물가선교회 담당)

나는 내 가슴 현관에다
“통행금지”라고 썼다.
그러나 사랑은 지나가며 웃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나는 어디든 들어간다네.

시프먼이 쓴 “통행금지”라는 아주 유쾌한 시다. 바위산을 무너뜨리는데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면 된다. 홍해 바다를 가르는데 모세의 손과 지팡이를 사용하셨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데는 이스라엘의 함성을 사용하셨다. 우주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셔야만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복잡하고 섬세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격다짐으로 승복시킬 수가 없다. 두려움이나 위협을 통해서 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수는 있지만 마음을 열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1.사랑은 찾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무한한 사랑을 가슴에 담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신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막에 작렬하는 정오의 빛보다 더 눈부시고 뜨거운 가슴으로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외로운 여자를 찾아가셨다.
요한복음 4:3~4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해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로 통해하는 것이 당시의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다니던 여행길은 아니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도 않고 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마리아길을 택했던 것일까? 왜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 길을 통행하여야만 했던 것일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오에 우물가에 나와서 홀로 물을 길어야 할 만큼 마을의 아낙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이었던 것 같다. 다섯 남편과 살았었으니 상처가 많았을 것이고 한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처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 여인을 주목하셨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니라” (눅19:10)
예수님은 “잃은 양” 비유를 통해 당신의 사역을 한층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4~7)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마산에 사는 S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2년만이었다. 아기는 돌이 지났고 남편과는 행복하게 살고 있노라고 말했다. 남편은 버스 기사인데 착할 뿐만 아니라 실직 퇴직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말했다. 월급은 120만원을 타는데 생활하고 저축도 한다고 말했다. 얼마 안있으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S는 유흥가 출신이었다. 우리를 만나게 된 그녀는 우물가선교회의 홈 공동체인 아름다운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가출을 했다. 그녀를 찾아야 되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흥가 출신 여성들에게 자주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잃은 양 비유를 읽다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럴즈음 S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지금은 폐쇄된 신길동 텍사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서 신길동에서 형제 하나와 함께 갔다. 환락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가씨들이 동전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며 놀다가라고 소리를 쳤다. 펨푸들은 달려들어서 놀다가라며 나를 잡아끌었다. 잠바를 잡고 늘어졌다. 그 바람에 잠바의 주머니가 찢어져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S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형제와 함께 골목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S를 찾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며칠이 흘렀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성탄절 이브를 자축하기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바꾸셨다.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장미꽃과 선물을 준비해서 신길동 텍사스로 갔다. 우리는 캐롤송을 부르며 유곽의 문을 열고 선물을 전했다. 물론 우리의 목적은 S를 찾는데 있었다. 골목을 샅샅이 뒤졌으나 S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우리는 텍사스골목 입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며 S를 돌려달라고 부르짖었다. 다음날 교회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났는데 S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제 우리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S를 만나자고 요구했고 골목 입구에 있는 제과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것이었다.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남겨두고 총총히 환락가로 사라졌다. 그 때 나의 마음은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다가 봉천동에 이르러 십자가의 불빛이 유난히도 밝은 교회로 들어갔다. 뒷자리에 앉아 울면서 기도했다. 12시쯤 되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앉아 있는데 전화가 왔다. 우물가의 집 리더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S가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한 영혼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어거스틴의 고백을 들어보자.
“이상하다.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만약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나는 벌써 이 세상을 박살 내버렸을텐데... 그런데 이상하단 말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다니 사랑하시되 단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 분은 날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유일한 생존자라 하여도 그 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렸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실감나게 만드는 고백이다.

2.사랑은 구체적이다.
예수님은 중보자이시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요14:6). 자신을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쪽은 인간에 닿아 있어야만 하고 한쪽은 하나님 쪽에 닿아 있어야만 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끊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구체적이었고 구체적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 전도자들은 자주 사람쪽으로 끊어지는 실수를 범한다. 얼마 전 신문에 났던 내용이다. 봉천동에 있는 교회가 전도를 하는데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확성기를 들고 마을을 돌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민들의 원망을 사고 있어서 오히려 전도의 문이 닫힌다는 내용이었다. 사우나탕에서 스님을 쫓아다니며 전도하다가 뺨을 맞은 목사에 대한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모두 영혼을 구원해야겠다는 열정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지를 않아 오히려 역효과를 냈던 경우라 하겠다.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받지 않는다.
먼저 방해물들을 제거하라.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여인이 오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서 양식을 구하도록 보냈을까? 여인과 대화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인의 부끄러운 비밀을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서는 드러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성질급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물을 청할 겨를도 없이 물을 떠옴으로 해서 예수님의 기회를 빼앗아 버릴까봐 염려하여 그러셨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런 장애물들을 기꺼이 제거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랑은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심으로 인정하셨다. 전도자가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우리는 자주 강공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도나 설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복서로서 신화적인 존재라 하면 알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알리의 복싱 철학은 “나비처럼 날아가서 벌처럼 쏜다”이다. 이런 철학이 많은 복서들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세 번째,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인의 필요를 정확하게 간파하셨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필요를 간파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필요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곳의 숨겨진 필요가 무엇인지 발견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네 번째, 사랑은 상대방에게 최선의 것을 주는 것이다. 차선의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최선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섯째, 사랑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울산에서 아기를 낳아 잘 살고 있는 정은이는 한때 미아리로 가출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로 가출을 했는지 모르는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환락가로 들어갔을 것을 예상하는 우리는 명령하는 기도를 했고 또 울면서 기도했다. 얼마 후에 정은이가 돌아왔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3.사랑은 기대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여인이 온전히 주님을 만났을 때 수가성에 부흥이 왔다. 구원은 한 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한 제자들도 다수가 아니다. 우리는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기대를 져버려서는 안된다. 바로 그 한 사람을 위해 우리는 훈련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인 것이다. 당신은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 영혼들을 사랑하셨기에 즐겁게 순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