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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평깨 34 호

제자훈련으로 한국교회의 구조조정을

2004년 06월 이중표 목사(한신교회 담임목사)

사랑의교회 창립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사랑의교회가 창립 20돌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역사가 20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만큼 사랑의교회와 제자훈련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학을 통해서, 또 순교적 인격을 통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목회와 삶을 통해 미치는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당신의 삶과 목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커서 한국교회 100년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신학자 하면 박형룡 박사님, 김재준 박사님 같은 분들을 떠올리고, 순교적 인격이라면 잘 알고 있는대로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의 영향이 컸고, 목회자로서 교회와 함께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는 크게 두 사람 조용기 목사님과 옥한흠 목사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능력 목회’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훈련 목회’와 ‘소그룹’을 통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설교의 능력을 가지고 부흥회 스타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렇게 모인 청중들을 강력한 구역 조직으로 묶었습니다. 이 모델은 현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지향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수많은 청중을 구원하는데 공헌한 2,000년 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할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70만의 교인으로 부흥된 교회는 전무했고 앞으로도 후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분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옥한흠 목사님입니다. 옥 목사님은 소그룹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방식으로, 전 교인을 제자화하여 작은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 그의 목회 철학이었습니다. 제자훈련 목회가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제자를 만드는 데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교회성장을 가져왔기 때문에 새로운 교회성장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역사에 큰 사건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친 사람을 보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일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위해서는 한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그러면 미친 사람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자요. 인류 사랑에 미친 자였습니다. 미쳤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지 제정신 가지고는 못죽습니다. 인류구원을 위해서 미친 모습이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바로 그것이 2,000년 교회사를 지금도 움직이는 힘이지요. 또 사도바울도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앞에서 “네가 미쳤구나”라는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들은 분명히 모두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미친 사람 하나를 보내셨어요. 누군지 아십니까? 옥한흠이라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위해서 미친 사람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자라고는 하지만 신사참배 반대하는데 미쳤지요. 또 손양원 목사님이 위대하지만 애양원 사람들에게 미친 것이지 한국교회를 위해서 미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해 미치게 만든 사람입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쳤다는 말을 좀 들었지만 제가 제자훈련 열정 30년을 읽으면서 “야! 미쳐도 옥한흠처럼 미쳐야지 나는 설 미쳤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저는 사랑의교회가 개척되기 일년 전에 반포에서 개척을 시작했고 옥 목사님은 서초동에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강남 지역이 막 개발 단계에 있던 터라, 서로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전도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가 한 달이 멀다하고 부흥회를 개최하고 전도하고 심방 다니느라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교회는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제자훈련에 열중이었습니다. 당시는 부흥회식의 전도집회가 유행이었는데, 이와 같은 방식을 택하지 않고 당장 아무런 효과가 나지 않는 제자훈련의 방법을 택했던 것입니다. 옥 목사님은 단 몇사람을 데리고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못 가서 교회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서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했고, 제자훈련을 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라는 큰 물결을 일으키게 되었고, 많은 목회자들이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 사역을 배우려고 줄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는 옥한흠 목사님의 확고한 목회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CAL 세미나에 우리 부목사들을 다 보냈어요. “된다는데 뭐가 되는지 한번 가서 봐라.” 그리고 제자훈련을 시작했어요. 나는 하지 않고 부목사들만 했는데 저들이 그래요. “목사님, 목사님이 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이 안하면 이 교회가 제자훈련체제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배운게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세미나 테이프를 집중해서 들었죠. 들으면서 저도 도가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동하다가 넘어졌어요. 팔이 부러져 2개월 동안 누워 지냈습니다. 누워서 할 일이 책 읽는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제자훈련에 관련해서 쓴 빌 헐(Bill Hull)의 책 중에 “목회자가 제자삼아야 교회가 산다”를 읽으면서 “아! 바로 옥 목사가 이것으로 도통했구나. 이것은 옥한흠 목사의 개인적인 목회철학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역 철학에 근거한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전에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읽어도 와닿지 않았어요. 또 제자훈련을 한다고 세미나 테잎을 들어도 이것을 훈련으로만 생각했죠.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예수님의 3년 사역은 제자훈련에 생명을 건 사역이었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청중들을 모으고 병이나 고쳐주고 가르쳐주고 떡이나 먹이고 했다면 오늘날 교회가 어디 있겠어요? 12명의 제자를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것 아닙니까?!
빌 헐의 책을 읽으면서 옥한흠 목사님의 「평신도를 깨운다」를 다시 읽고 교재를 다시 검토했습니다. 다 검토해보고 내린 결론은 “네비게이토의 책을 가져다가 진수를 빼서 교재를 만들었구나. 그래서 교재를 다시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건 완전히 액기스로 빠진 것이기 때문에 건드리면 오히려 흠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고는 제자훈련반 하나를 맡았습니다. 일년하고 났더니 교인들이 그래요. “목사님! 목사님에게서 10년 설교를 들은 것보다 한시간 마주 앉아서 제자훈련을 통해 얘기를 들을 때 저희들은 10년동안 보지 못한 목사님을 보면서 우리 생에 변화를 체험하게됩니다.”

제가 일년동안 성도들과 함께 제자훈련 하면서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충격도 컸거니와 행복은 30년 목회하면서 받지 못한 행복을 얻었어요.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생명을 거는걸 알았거든요. 그전까지는 목사님이 훌륭하고 좋다고 말하지만 내 동역자가 없었는데 한 일년 같이 인격적 교제를 가지고 또 그들에게 목사의 솔직한 모습을 다 내어놓으니까 옛날에는 허물만 보면 비판하던 사람들이 목사님 허물까지도 사랑스럽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시키신 제자훈련의 마지막 목표는 단순히 예수를 닮는 것이 아니라 옛 제자들을 별세시켜서 자기를 위해 죽은 자들로 세상에 내어보내, 예수에 미친 자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증인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제자훈련을 하면서 “그대들이 나와 함께 예수에게 미쳐서 우리의 생을 불태우자”고 했더니 바로 예수님의 목회의 행복을 알게된 것입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도 제자훈련 사역은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모델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사의 흐름 가운데서 그 의의와 영향을 짚어 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사랑의교회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네 가지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잘못된 성장 신화를 바로 잡았습니다.
한국교회 구조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과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을 비교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치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고속 성장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 경제가 성장했듯이, 한국교회는 60년대에 불과 5천여 교회, 60만 성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90년대에는 3만 5천 교회, 1천만 성도로 기적적 성장을 보였습니다. 근대화의 구호가 “잘 살아 보세”였다면, 교회성장의 구호는 “예수 믿어 복 받자”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농촌이 피폐되고 도시화가 진행되었듯이, 농촌교회는 점차 침체되고 대신 도시교회는 비대해졌습니다. 이런 성장을 주도한 것은 경제에서는 대기업이었고, 교회에서는 대형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결과, 한국 사회나 교회 둘 다 공히 자본주의 성장 신화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회자들의 꿈은 오직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존재로서 대접받기보다는 교회를 채우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기업경영이론이나, 마케팅 기법이 여과없이 교회에 도입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관심이 있었는데 비해, 현대의 교회는 탐스러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의 이런 성장신화에 일침을 놓았습니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혁명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기 원했고, 그 사랑의 관계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물량주의에 매몰되고, 익명성 속에 숨고, 개인주의에 갇힌 비인간화된 인간들, 피상적인 관계에서만 만족하고 자기를 내보여주려 하지 않는 현대 교회 성도들을 사랑의 관계성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이 의도하던 바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제자훈련의 이 근본 정신을 잊고 또 다른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자훈련을 이용하려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장은 제자훈련의 결과이자 사랑이 담긴 나눔의 결과일 뿐입니다.

두번째로, 잠자는 평신도를 깨웠습니다.
다시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비교해 봅시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요구되었습니다. 이런 요구에 의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권위주의적 지도력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 지도력, 즉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초창기의 성장 과정에서는 효율적으로 작용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오히려 성장의 방해요소로 등장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교역자 중심의 지도력에 기초한 교회성장은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 평신도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좀더 열심 있는 성도는 교회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에서 봉사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순종만이 미덕이었습니다. 이런 체계에 익숙해진 평신도들은 스스로 교역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선을 보다 선명하게 그리고는, 제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사역들은 모두 교역자들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자신들은 그 안의 무풍지대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평신도가 이렇게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함으로써 교회의 내적 동력은 차단되었고, 교회는 활력을 잃었습니다.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은 소명의식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속에서 평신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을 통해서 목사나, 제직이나 다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성직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대표적 저서인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의 제목에서 보여지듯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의 의도는 99%의 평신도는 잠들어 있고, 1%의 목회자만 활동하는 이상구조를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제자훈련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은 만인제사장주의는 교황과 사제들만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모든 성도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깨어남으로써 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불길처럼 전 유럽을 뒤덮었던 것입니다. 평신도가 각성하면 교회가 변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곧 교회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옥한흠 목사님께서 이 사상을 구체적으로 목회에 접목을 시켜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앉아서 가져다주는 밥을 먹었는데 이제는 줄서서 타먹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를 깨운다는 것은 평신도의 의식을 깨운다는 것도 있지만 목사와 함께 세상을 섬기고 목사와 함께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함께 섬기라”고하는 의식을 깨워준 것입니다.

세번째로,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왔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신앙적 성숙은 주로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보면 백 번의 설교보다는 한 번의 제자훈련이 훨씬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좋은 설교도 여러 번 듣다보면 타성에 젖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그때의 감동으로 끝날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통해 2시간씩 진지하게 마주앉아서 성경을 적용하고 암송하고 반성하고 회개할 때에 오는 인격의 변화라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말씀을 인격화하는 훈련입니다. 성경을 찾아가며 읽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의 신앙을 점검할 때의 신앙성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수적인 성장에 비해 인격적인 성장이 이에 미치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 안팎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세상에 나가서는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합니다. 한국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 50% 이상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모두가 인격적인 훈련을 소홀히 한 결과입니다. 제자훈련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자로 만드는 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교회가 제시한 제자훈련 운동은 한국교회가 한국 역사에서 빛과 소금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번째는 새로운 교회 성장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는 것이기에, 교회성장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격적 성장을 간과하는 교회성장이요, 물량주의적 사고가 배태되어 있는 교회성장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 건전한 성장전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동안의 복음 전도로 인하여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씩은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거나, 복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체계적이며 집중적인 전도가 요청됩니다. 바로 훈련받은 제자들이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세상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합니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 삶으로서의 전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해서 성장했다. 그거 좀 배워다가 성장들 좀 해라”. 그런데 알고 보니 제자훈련은 성장이 목표가 아니고 예수님의 사역철학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제자훈련에 들어가면서 “사람숫자가 일시에 얼마나 오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함께 제자훈련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가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만 명이 제 설교만 듣고 끝날 것이냐가 아니고 나와 함께 몇 명이 제자훈련을 받고 끝날 것인가 하는 것이 제관심사가 되었어요. 제가 나이든 것으로 후회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 한가지가 생겼습니다. 제자훈련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60세인데도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내 사역에 마지막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을 건축할 때 소그룹 12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을 많이 만들어놓은 것도 바로 그 철학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의교회가 이 세상에 탄생한 것, 한국교회를 위해 탄생된 것 주님께 지극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옥 목사님을 사랑의교회에, 특별히 한국교회에 보내셔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일본교회, 중국교회, 아시아 지역, 미국교회, 앞으로 구라파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는 목회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함께 하는 목회는 쉽고, 즐겁습니다.

(이 글은 10월 31일 사랑의교회 수양관 헌당예배때에 있었던 특별세미나의 내용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