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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평깨 35 호

교회중심의 제자훈련, 그 거룩한 부르심

2004년 06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담임목사)

Ⅰ. 나의 목회 Text : 골로새서 1: 23-29

골로새서 1장 23절부터 마지막절까지는 저에게 있어서 목회로의 부르심의 본문이었고, 또 제자훈련에 대해서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었던 제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형성했던 본문이었습니다.
저는 본래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라는 단체를 통해서 복음의 소식을 처음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생운동기관을 통해서 복음을 처음 들었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이나 젊은이 운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나 애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처음 공부하고자 했을 때 전혀 교회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든지 그런 의도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성경을 좀 더 알고 갖추어야 할 부분들을 갖추고 나서 젊은이 운동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유학을 가게 되었던 디트로이트 바이블 컬리지에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비교하는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교회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제가 귀국하기 직전에 다시 집중적으로 묵상했던 말씀이 골로새서 1장이었습니다. 특별히 골로새서 1장의 마지막 부분을 묵상하면서 제 나름대로 막연하지만 어떤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교회를 소망하고 사모하게 만들었고 또 교회의 일군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이 쓰신다면 제가 교회목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게 했던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이래로 1월 첫주가 되면 거의 예외없이 골로새서 1장의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묵상합니다.

Ⅱ. 나는 누구인가?

1. 복음의 일군(23절)
저는 제가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한순간도 잊어버리지 않은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두가지 매우 중요한 단어를 이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23절 마지막 부분에 있는 “복음의 일군”이라는 단어와 그 다음 25절에 나오는 “교회의 일군”이라는 단어입니다.
저는 이 두가지 단어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단어의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 없이 교회의 일군이 되면 이런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교회안에서 계급주의적으로 변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인 역기능을 산출하는 교권주의자들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평신도들 가운데도 복음에 대한 확신 없이 그냥 교회에서 연륜이 경과하다 보니까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될 경우에 틀림없이 교회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게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교회의 일군이 되기 전에 복음의 일군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 교회의 일군(25절)
그러나 그는 복음의 일군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을 복음의 일군으로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군으로도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라는 현장에 대한 확신이 없이 단순히 복음만의 일군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일을 한다고 가정을 하십시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주변에서 항상 왔다갔다 할 수는 있지만 결국 이 사람이 가진 의식구조의 밑바탕에서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무교회입니다.
교회는 소중합니다. 제가 미국교회에서 청빙을 받을때만 해도 제자훈련에 대한 뚜렷한 그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첫 목회를 경험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제안을 했습니다. 침례교에서는 장로님들이 안계시고 안수집사님들로 구성된 실행위원회 모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삼년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두시간을 저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말씀을 배우겠다는 약속을 하면 제가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날 새벽기도회를 간단히 끝내고 6시부터 8시까지 네비게이토 교재를 가지고 삼년동안 공부하면서 제 목회에 대한 꿈과 기대를 비롯해 우리가 사역자로서 취해야 할 자세등을 나누었습니다. 삼년이 흐르는 동안에 그분들이 정말 저를 신뢰하게 되었고 저도 그분들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 당시 미국 남침례교에서 받은 도전을 가지고 교회의 전 구조를 주일학교(sunday school)구조로 변화시켰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오면 성경공부를 단계적으로 통과하는 장년 주일학교를 통한 제자훈련이죠. 제가 먼저 첫 반을 가르치고 또 저와 함께 공부를 해 온 안수 집사님들에게 한반, 한반을 가르치도록 양도했습니다.
제가 그 경험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다시 목회를 시작할 때도 미리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제자훈련은 이런식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로 장년 주일학교를 통한 단계적인 훈련, 단계적인 계획을 저 나름대로 상당히 정교하게 세웠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가 한 오 년 동안 목회해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장년 주일학교만 가지고는 삶의 총체적인 변화면에서 아직도 좀 부족하다. 주일날 와서 한시간 반 이렇게 그냥 배우고 나가는 것만 가지고는 삶 속에 진정한 변화가 부족하다. 주일학교 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르치는 것에 치중하게 되고 결국 삶의 변화에서 미흡한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실 제가 미국을 떠나기 직전 무렵부터 cell그룹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한국에 와서 저희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델은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Ⅲ. 나의 비전

1.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25절)
오래전에 골로새서 1장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비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골로새서 1장25절에 나오는 “경륜”이라는 말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한다면 파격적으로 “청지기적 직분”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쳐서 읽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청지기적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는 표현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제자훈련의 큰 그림을 공유하고 함께 소망하고 바라고 추진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냐? 우리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이냐?”질문하면서 하나님이 각 교회의 리더인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주신 은사를 통해서 제자훈련의 모델을 펼칠 때 어떤 모델이 가장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지도자가 목회현장에서 자기 자신을 붙들고 씨름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 은사를 체크해 보면 항상 주된 은사로 평가되는 것이 가르침, 지혜, 전도 이 세가지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다스림 같은 부분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섬겨왔던 목회스타일을 살펴보면 자연히 제가 가진 은사에 따라서 가르침을 통한 제자훈련 혹은 전도적 제자훈련 쪽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주일학교 훈련이라는 모델을 찾게 만드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Ⅳ. 나의 사역의 목표

1. 이방인 가운데 그리스도를 알게 함(26-27절)
그러나 어떤 스타일을 선택하든 우리의 모든 목회사역, 또 제자훈련 사역에 있어서 일치할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제자훈련도 이 목표를 놓쳐버리면 성경적 제자화에서는 이미 떠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일군으로서 바울이 가졌던 첫 번째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영광을 이방인 가운데서 풍성하게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을 지배하고 있던 가장 큰 관심은 이방인 선교, 즉 지상명령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종종 전도가 강조되지 않는 제자훈련들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서적 제자훈련의 목표에서 빗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그리스도안에 사람을 세워감(28절)
두 번째로 전도와 함께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람을 세워간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나오는 “완전한 자”라는 말은 “온전한 자, 성숙한 자”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원어의 의미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하는 각 교회마다 그 교회가 추구하는 제자상을 일목요연하게 그림처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나름대로 몇가지를 정리해 본 것이 있습니다.
성숙한 제자상을 말할 때에 저는 먼저 균형에서 찾고 싶습니다. 저는 균형을 전인(whole person) 혹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제가 교회안에서 가르칠때마다 늘 강조하는 몇가지 균형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균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인격과 사역의 균형이 되겠지요.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우선순위는 복음전도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면서도 전도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우리 주변에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돌아보는 균등한 관심과 균형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루살렘과 땅 끝의 균형입니다. 네 번째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균형입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그림을 제대로 그려서 전달하는 것도 제자훈련의 중요한 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역을 어떻게 하느냐. 제자훈련의 사역의 방편, 혹은 나의 목회사역의 방편은 다음과 같습니다.

Ⅴ. 나의 사역의 방편(28절)

1. 전파함
28절을 다시 관찰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전파한다. 가르친다. 권한다라는 세 단어중에서 가르친다, 권한다라는 단어앞에는 각 사람이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그런데 전파한다는 단어 앞에는 그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전파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전도차원이 아니라 선포의 차원에서 강조된 의미일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공적인 설교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교회중심의 제자훈련에 있어서는 목회자들이 훈련을 강조하면 할 수록 설교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옥 목사님의 설교가 없고 옥 목사님의 리더십이 없는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상상이 가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컨벤션이나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고 가서도 많은 교회가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원인은 제자훈련을 수행하는 방법 자체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 배후에 있는 결정적인 두가지 문제가 설교와 리더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 가르침 - 각 사람
그러나 설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저는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강해설교 세미나도 많이 하고 돌아 다닙니다마는 제가 실제로 목회를 해봐도 목회자로서의 제일 큰 좌절중에 하나는 나의 명 강해설교를 듣고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전파했을뿐만 아니라 각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각 사람을 가르쳤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지불되었다는 말이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일대일 모델보다는 소그룹 모델이 훨씬 더 건강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그룹 안에서는 좀 더 역동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있고 모방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권고함 - 각 사람
가르침 못지 않게 또 중요한 것이 권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치유사역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제자훈련의 리더들에게 어느정도의 진지한 상담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수도 있지만 우리가 수없이 사람들을 섬기고 다루다보면 자연스럽게 상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몇 년전부터 특수한 상담이 굉장한 빛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료상담(Peer Counseling)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을 돕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자훈련 프로그램 안에서 앞으로 좀 더 보완되고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 상담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상담 영역까지는 갈 수가 없어도 사람들의 상처를 어느 정도 싸매주고 그 얘기를 들어주고 치료해줄 수 있는 그런 훈련이 제자훈련 지도자들과 순장들(목자, 구역장, 리더)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Ⅵ. 나의 사역의 자세

1. 성령의 역사와 나의 수고의 균형(29절)
제가 골로새서 1장을 제 목회의 텍스트로 그리고 훈련의 텍스트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어느날부터 내가 어떤 자세로 이 사역을 감당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저에게 지속적인 도전을 던진 구절은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하여 어떤 자세나 태도로 이 사역을 감당하고자 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지칠때까지, 쓰러질 때까지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전 존재를 투신한, 모든 것을 투신한 그런 자세겠죠. 그러나 여기서도 바울은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힘을 다해 수고하노라”고 하면서 그것이 인간적인 수고만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줍니다. “내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성령의 역사를 따라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2. 고난을 기쁨으로 수용함(24절) :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러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입니까? 1장 2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제 얘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24절에 나오는 “남은 고난”부분을 난해 본문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은 고난의 뜻이 무엇입니까? 많은 주석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정의는 대부분 이런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가 주님이 하시기를 원했던 그 일을 이땅에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통을 주님은 바로 자신의 고통으로 아직도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땅에서 주의 몸의 지체들이 또 주의 몸된 교회가 이 복음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서, 제자훈련을 위해서 이땅에서 수고하고 고통당하는 그 일을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전통목회를 하면 참 편하죠. 이것이 전통목회의 유혹입니다. 설교만 하고 그리고 큰 그룹으로만 해놓고 그냥 놔두면 얼마나 편합니까? 제자훈련을 한다는 것은 각 사람, 일대일의 접촉을 통해서 내 약점이 드러날 수가 있고 긴장이 있고 때로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주님 나라에 도달했을 때 이땅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주는 사역을 하다가 우리가 얻어맞은 파편, 그 파편 때문에 흘려야 했던 핏자국, 우리가 받았던 상처, 우리가 흘려야만 했었던 눈물, 그 고난은 개선의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그날 마치 면류관처럼, 훈장처럼 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