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일세를 풍미했던 거대한 조직 사회는 이제 그 한계 때문에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수세기 동안 지구촌을 지배해온 산업사회가 종언을 고하고 있고, 이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조차 불분명해 지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라. 지금까지 우리 의식세계를 지배해왔던 물질 문명의 세계를 다시는 건너지 못할 루비콘 강의 저편으로 밀어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농경사회가 자연에서, 산업사회가 자본에서 가치를 얻어내었다면 새로운 정보사회는 정신과 지식에서 가치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창조력은 인터넷 세계에서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동시에 수 백만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3차원의 시공(Time & Space)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징기스칸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인터넷이 이루어내고 있다.
창조된 가치가 승패를 좌우하고 있으며 양의 경쟁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보이는 물질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로의 거대한 이동이다. 나타난 현상(Physics)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력의 창조(Creation of Vitality)로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혁을 경험하는 역사적 변곡점에 우리 사역자들은 서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황폐한 정신사의 간극(間隙)을 메우기 위해 스위스의 라브리(L’Abri)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How should we then live?)”를 외쳤듯이 새로운 밀레니움을 몇 달 앞둔 이 시점에서 우리 사역자들은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사역해야 할 것인가?(How should we then Minister?)”를 통절한 심정으로 외쳐야 한다.
I.재를 무릅쓰고 기도하는 지도자(단 9:3)
필자는 지금 40일 새벽부흥회 기간 중에 있다. 새벽마다 남가주 각지에서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어떤 사람은 100Km이상을 운전하면서 오는 사람도 있다) 1,000여명의 성도들이 40일간 매일 새벽 5시에 모여 기도하고 있다. 주로 필자가 말씀을 전하고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지만 (사실 말씀전하는 것보다 기도회 인도가 영적인 짐이 더 크다) 가끔 외부강사를 모시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남가주 지역에서 15년전 28세에 2명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5,000여명이 출석하는 Cottonwood 교회 담임 목사인 Bayless Conley목사(43세)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필자는 야고보서 5:1-8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파오면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똑같은 본문을 읽어도 이 새벽에 주시는 깨달음은 마치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痛哭)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평소에 알던 구절이지만 오늘 새벽은 뇌수(腦髓)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영적추수와 영혼구원에 관해서 성령의 채찍질이 비수와 같이 찔러 쪼개는 것이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역사를 통해 믿지 않는 영혼들의 심령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지게 하소서”란 기도제목이 저절로 나왔다. 계속해서 필자가 아직까지도 예수 믿지 않는 가족, 이웃 공동체(Community)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자를 초청했더니 강단 위에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그야 말로 1시간 동안 진액을 쏟아 기도하면서 불이 떨어진 기도의 제물이 되었다. 왜 똑같은 본문이라도 이렇게 강력하게 심령에 역사를 하며 어떤 경우는 지나가는가? 우리가 몰라서 사역을 잘못하는가? 알아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으니 못하는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다. 설교자 자신이 직접 불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때 남들의 심령에도 불을 지필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건축을 해보니 전에는 다른 교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밖에 못지었을까?”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지금 느끼는 것은 몰라서 잘못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이 알아도 (1) 건축기간이 충분치 못하면 원하는 것을 다 못하고 (2)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안되고 (3) 실무 기술자들이 말을 안들으면 아이디어가 있어도 안되는 것을 경험했다.
마찬가지이다. 사역에 대해서 아무리 노하우(Know How)가 많아도 영권(靈權)이 없으면 받쳐주지를 못한다. 우리 주위에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젊은 사역자들 가운데 영어 원서도 많이 읽고 목회정보도 많이 알아도 능력이 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영혼 구원의 소원과 이미 믿는 자들에 대한 회복(Revival)에 대한 영성이 통하자 서로 얼싸안고 기도해주는 현장을 인도하면서 감사치 않을 수 없었다(물론 필자와 Conley목사도 함께 부둥켜 안고 목이 쉬도록 서로의 사역을 위해서 영이 통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를 오래 전에 안 것도 아니고 그냥 간단히 인사한 경험밖에 없는데도 10년지기 같은 마음의 유무상통함을 느꼈다). 이것이 되면 사역은 물 흐르듯이 진행될 수 있다.
역사의 대변환점에 선 우리 사역자들은 다시한번 사역의 초심, 기본, 원색적 복음의 능력, 순교적 증인의 자세(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사실 그대로 증거하는 태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지도력이 세워진다. 담임 목사는 이것이 없으면 날마다 메마른 골짜기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 영혼구원, 기도의 영성, 중보기도의 능력에 관한 한 그 어떤 평신도 사역자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의 절박성(Urgency)과 애통과 열정이 있으면 지도력은 흔들림 없이 발휘 될 수 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 그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도록 목표를 삼는 제자 훈련 사역도 이것이 있어야 10년, 20년을 지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다시 다니엘처럼 영혼의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재를 무릅쓰고 죽기 살기로 매어 달리고, 목이 다 쉬어 잠기는 한이 있더라도 가슴 터지라고 강단을 붙잡고 눈물로 적셔보라.
II.끝까지 성공하는 지도력
왜 많은 교회나 단체, 개인이 한때는 부흥을 경험하고 대단한 사역을 하다가도 얼마되지 않아 그것을 무너뜨리는가? 왜 어느 시점이상 올라가면 더 이상 자라지를 못하는가?
그 이유는 지도자들이 성공이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 선배인 토마스 칼라일은 “역경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100명이 있다면 성공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1명 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좀 과장된 표현 같지만 성공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Fuller신학교의 로버트 클린턴 교수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가운데 끝까지 인생을 잘 달린(Well Finish) 사람은 30%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는데 이 내용은 참으로 우리 목회자들에게 경종이 될만하다. 심지어 제자 훈련에 성공했다고 하는 평가를 들으며 어느정도 열매가 맺힌 사역자들에게도 이것은 귀담아 들을 말이다. 즉 성경의 신앙적 인물이라 하더라도 3명중 2명은 끝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의 필부들은 그냥 그냥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어떤 사역이 어느정도 만족되면 허리띠를 느슨하게 하고 시스템으로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을 치지 않더라도 무난하게 움직여주길 원하는 마음이다. 이럴 때 사역자들이 보는 가장 큰 손해는 힘(Power)과 열정(Enthusiasm)이 상실 된다는 것이다(이것이 소위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큰 실수이다). 필자는 많은 교회들이 교회건물을 완성하거나, 어려운 사역의 목표치에 근접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본다.
그렇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이미 이뤄 놓은 것까지도 잃어 버릴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곧 어려워질 수 있다. 미국의 교회 컨설팅 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성인 1,000명이 출석하는 교회라면 1년에 최소한 200여명 이상 등록하지 않으면 현상유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든 일년에 20%정도 새롭게 등록하거나 믿지 않는 영혼들을 초청해서 한 가족이 되지 않으면 바로 퇴보의 지점에 서 있게 된다는 뜻이다.
같은 이치이다. 제자 훈련을 하는 모든 교회마다 처음 계획했을 때의 사역의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한 영혼에 대한 헌신의 정신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가 되어 그 어떤 사고 방식이 접목된다 하더라도 녹여버릴 수 있는 힘과 열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역이 평안할 수록 몸부림을 쳐야 한다.
III. 자신의 리더십 스타일
사람마다 지도력의 종류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개척자, 동기부여가(Motivator), 기획가, 운동가의 역할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디모데와 디도처럼 (디도서 1:5/ 내가 너를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이미 선각자들을 통해 주어진 축복을 잘 관리하는 스타일도 있다. 만약 어떤 교회가 바울이나 디모데같은 양면성을 다 갖춘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면 그 모임의 부흥과 성숙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다. 현명한 지도자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파악하고 자신이 어떤 스타일인가를 알아 자신의 약점을 축복된 만남이나 사람의 양육을 통해서 메우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느헤미야 총독은 선임자들이 70년 동안에도 차일피일 미루고 못하던 성벽 재건을 단 52일 만에 하나님이 주신 그의 은사 활용과 불붙는 기도, 탁월한 지도력을 통해 이뤄냈을 때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영적 부흥으로 연결되도록 사람을 통해서 보완했다.
느헤미야 7:2에 보면 그가 발탁한 동역자 하나니와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런 통찰력 있는 표현은 오랫동안 함께 알고 다듬어지지 않으면 파악이 불가능한 법이다. 제자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된 동역자를 발굴함으로 담임 목사의 지도력과 인격의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요즘 쓰는 용어로 수평적 리더십을 극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 교회 곳곳에서 끓고 있는 담임 목사와 장로들의 내홍(內訌)도 서로가 인생의 계급장 다 떼고 말씀 앞에서 함께 다듬어짐으로 리더십의 부족함을 보완 하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 상당수 해결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되면 매일 같이 새로운 기술, 시스템이 태어나고,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치관의 혼재가 일어나는 오늘의 엄청난 변화의 시점에서라도 시공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자들에게 허락하신 사역의 열매와 성공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는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