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신학자들은 19세기를 가르쳐서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다”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로서는 20세기가 “성장의 위대한 세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복음이 없었던 황무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서 0%에서 인구의 거의 20%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탄생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전 세계 20대 교회 가운데 절반이상이 한국 땅에 존재합니다. 세계의 많은 선교기관들이 한국교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한국교회와의 협력을 우선 고려해야 선교전략을 수립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세계에서 한국교회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통의 관심 때문에 여기에 모였습니다.
바닷물에 4%의 소금만 있으면 결코 썩지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은 카톨릭 신자들을 포함해서 28.2%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개혁의 부르짖음은 더 높아지지만 여전히 어둠과 부패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의 현장마다 거의 예외 없이 기독교인들의 이름이 들먹여져야만 하는 것이 가슴아픈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아픔의 현실, 어둠의 현실에 두 가지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 가지는 이원론의 문제입니다. 거룩함의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이분화시켜 세상을 보려고 했던 우리들의 잘못된 사고방식 때문에 예배당 바깥의 세계, 정치, 경제, 교육, 법조의 세계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삶의 영역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두번째는 건강한 평신도상의 결여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가슴아픈 현실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에 와서 한국교회 안에 주목할만한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를 다시 발견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베소서 4장의 말씀처럼 “어떻게 평신도답게 사역할 수 있도록 구비시켜주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에 키워내야 할 좋은 평신도의 모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런 성경적 모델로 요셉을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사도상, 목사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열렬하게 설교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9장을 펼쳐놓고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교회의 21세기 목회과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세상에서 신뢰받는 평신도 - 균형목회의 과제창세기 39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인물상에서 첫번째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모습은 그가 살고 있었던 삶의 한 복판에서 신뢰받는 평신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9장 4절에 보면 “요셉이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아내를 제외한 그 집 소유를 다 맡겼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은 그의 삶에 일관성있게 드러납니다. 39장 22-23절을 보면 감옥에서도 그런 인정을 받았습니다. 가정총무가 감옥총무가 되고 한 나라의 총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신뢰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습니까? 사실 저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상당한 순교 컴플랙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반세상적인 세계관, 좁은 의미의 세계관을 거의 비판 없이 수용하다 보니 세상을 반대해야할 세상, 거절해야할 세상으로만 알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1세기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상징하는 두 가지 단어는 “핍박”과 “칭송”이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본질적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받을 수 밖에 없었던 핍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불신자들이 인정하고 칭찬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질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생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목회관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신뢰받는 평신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균형목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챨스 라일이라는 신학자는 “영적 그리스도인이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균형목회라는 말은 교회안으로만 시야를 좁힌 목회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세상을 상대로 해서도 목회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할 몇 가지 대표적인 균형의 과제가 있다면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균형, 성령의 열매와 사역의 균형, 인격과 사역의 균형입니다. 또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 예루살렘 사역과 땅 끝 사역의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2. 세상에 기여하는 평신도 - 선교목회의 과제두번째로 창세기 39장 5절 말씀에 나오는 “요셉을 위하여”라는 단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바꾼다면 “요셉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어느 날 보디발은 요셉을 불러놓고 “요셉, 당신은 우리 집의 축복이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어떻게 평신도들이 삶의 모든 영역속에서 요셉처럼 구체적으로 축복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명제를 생각하면서 21세기 목회의 과제 가운데 선교목회의 과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교라는 단어를 너무 좁은 의미에서 사용해왔습니다. 저는 조금은 광범위할지 모르지만 가장 적확한 선교의 정의가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셔서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선교목회는 붙들고 있는 목회가 아니라 보내는 목회입니다. 가서 약한 교회를 섬기고 돕도록 보내고 무엇보다 그들이 세상 한복판에서 강하게 설 수 있도록 계속 보내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평신도의 훈련과 해방이라는 과제를 갖게 됩니다. 훈련의 목적이 어디있습니까?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 때문에 성경공부하고, 무엇 때문에 제자훈련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들을 보내기 위해서 해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보내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저는 교회 내부의 많은 갈등이 보내지 못한데서 오는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공부의 커리큘럼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낼 수 있는 성경공부가 되려면 성경공부의 상당한 내용들이 “가정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직장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기독교적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내용들로 채워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선교목회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21세기 목회는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평신도, 정직한 평신도, 작은 일에 성실할 수 있는 평신도, 삶의 현장에서 강할 수 있는 평신도들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3. 세상에서 구별되는 평신도 - 윤리목회의 과제세번째로 세상과 구별되는 평신도를 요청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세상에서의 기여와 동참을 강조하다보면 준비되지 않은 채 세상에 뛰어들었다가 세상에 동화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세속화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 한복판에 강하게 서서 세상에 기여하면서도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 평신도 요셉 집사를 키워내려면 요셉이 가졌던 도덕적인 용기와 성결성, 거룩함, 순전함, 깨끗함이 필요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완전범죄가 가능할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그 유혹을 뿌리치며 고백했던 내용이 9절의 말씀입니다.
9절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세가지 단어입니다. “악”, “죄”, “하나님”입니다. 요셉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고,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여기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신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미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지금까지 절대로 변화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가치관에 대해서 도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치관이 상대화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는 어떤 지도자를 요청할까요? 저는 이 세계가 가치가 상대화되고, 도덕적 가치가 무너질수록, 변하지 않는 분명한 도덕적 가치를 붙잡고 있는 지도자를 요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이고 아이러니칼하지만 그것이 인간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은 엉망이면서도 정치인이 선거에 나온다든지 하면 굉장히 도덕적인 기준을 따집니다. 21세기에는 이것이 더 심화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이혼자들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아요? 교회가 이혼자들을 감싸 안아주어야 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 이혼한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이혼자들이 많이 모여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혼한 목회자가 이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해서 성공한 교회는 제가 아는한 미국교회 가운데 한군데도 없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중성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편만한 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에게는 여전히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21세기로 갈수록 우리들의 윤리목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하나님이 함께하는 평신도 - 영성목회의 과제또한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평신도. 저는 이것을 영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성은 도덕성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뿌리깊은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요셉의 일대기를 추적해보면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2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를 더 놀라게 하고 도전하는 대목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은폐된 영성이 아니라 드러날 수 있었던 영성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주관적 영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영성, 객관적 영성이어야 합니다. 또 구체적인 삶의 장에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영성의 증거와 영성의 향기가 삶의 한복판에서 드러날 수 있는 삶,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여전히 21세기에 가서도 소그룹 목회가 가장 중요한 목회의 형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그룹보다 좀 더 발전되고 강화된 공동체 훈련이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교회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공동체 훈련이라고 하면 특수한 체질의 사람을 몇명 붙들고 작은 그룹에서 목회하는 것을 지칭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범한 목회안에서도 공동체 훈련이 강조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젊은이들이 한 달이나 두 주간씩 선교현장에서 자기와 전혀 다른 종류의 삶, 깨어진 삶, 가난한 삶, 뭔가를 그리워하고 찾는 사람들과 생활하면 그들이 평범하게 생각했던 복음이 얼마나 보물이고 보석이고 해답이고 권능이고 소망인가를 발견하고 인생이 변화되어 돌아옵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안에서 좀더 시스템화된 공동체 훈련으로 발전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깨울 수 있겠습니까?
헨리 나우웬이 데이 브레이크 커뮤니티 공동체를 통해서 얻었던 영성, 삶의 한복판에서 경험한 영성을 이론이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세와 권능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교회 안에서 좀더 부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과 건강한 사람, 젊은이와 노인들을 섞어서 공동체를 만들면 자아가 깨어지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이 진정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영성이 흘러나올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5. 하나님을 증거하는 평신도 - 전도목회의 과제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전도목회라는 과제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가 받은 많은 비판중의 하나는 한국교인들에게 행함이 없다, 행함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역기능적인 정반대의 반응으로써 말로 전도하지 말자는 운동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지 말고 봉사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태도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작은 변화와 성숙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우리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을 드러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결정적 시기에 하나님을 말합니다. 결정적인 때에 그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는 장면을 보십시오. 이런 장면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 어색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처럼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40:8에도 그런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같이 감옥에 들어온 관원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의 뜻을 모르겠다고 요셉에게 해석을 요청했을 때 “제가 풀어드리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41:16절에도 그렇습니다. 바로가 해석을 요청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 대답하실 것”이라고 결정적 시기에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목회를 통해 양보할 수 없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명령이요, 무엇보다 앞서 순종해야할 가장 중요한 명령인 지상명령을 순종할 수 없다면 21세기의 새로운 문은 열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있을 따름이지 복음전도는 여전히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우선순위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선교학자는 “성육신 자체가 패러다임의 혁명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을 찾기위해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은 혁명적인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21세기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전도목회를 개발하느냐 하는 방법론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전도에 대한 혼을 심느냐? 여전히 21세기에 우리가 양육하고 있는 성도들이 전도를 그들의 생애에서 최우선의 과제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삶을 드리는 사람들로 만드느냐?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저는 결정적인 시기 때마다 하나님을 말했던 요셉을 보면서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복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목회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닫는말우리가 우리 목회의 삶을 다 살고 생명 다하고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것이 그대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고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글은 8월 23일∼25일까지 개최되었던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제4차 영성수련회
둘째날 주제특강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