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제자훈련 운동이 불 붙을 무렵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신학교의 교과과정 중 하나로 만드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고 있는 단체의 책임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선교단체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제자훈련을 기존 교회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신학교라는 교육기관을 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직은 교회에 제자훈련이 정착되기 전인지라 장래 목회자가 될 사람들에게 제자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감을 했었다. 동감할 뿐 아니라 나 자신도 신학교에서 가르칠 기회가 주어져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몇 번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신학교 강의실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가르치면서 점차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이루어진 제자훈련에 관한 강의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던 것과 같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내가 대학시절에 개인적으로 받았던 제자훈련과도 같을 수 없었다. 물론 배운 내용은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제자훈련에 관한 것”이 전달되었지 “제자훈련” 자체가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고 제자훈련에 관한 이야기가 보편화되면서 제자훈련은 교회에서 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한때 유행하는 목회의 방법론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은 “제자훈련 파”가 아니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제자훈련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 원래 제자훈련의 비전이 조금씩 바래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멘토링”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타나면서 프로그램화된 제자훈련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보편화되면 자연히 경직되는데 제자훈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자훈련을 목회 프로그램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좋으면 제자훈련이 높이 평가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제자훈련 자체가 평가절하 되어버렸다. 이것이 프로그램화된 제자훈련의 현실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면서 제자훈련의 원래 의미를 다시 회복하고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과정에서 제자훈련이 차지하는 역할과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1.제자훈련은 성도의 교육과정의 기본이다.
제자삼는 사역은 한때 유행하는 목회 방법론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남기신 비전에 대한 실천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19).” 이 사역은 아주 단순하게 전도와 양육이라는 두 사역으로 나누어진다.
(1) 전도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성도 개인이 흩어져서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모인 교회에서는 전도집회나 구도자예배로 불신자들을 불러서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해야 하며 흩어진 성도들은 자신들이 삶의 영역에서 접촉하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로 인도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1세기에 주신 명령이며 21세기가 되어도 이 명령에는 변함이 없다. 전도를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전도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다.
전도의 명령이 변치 않는 명령이라면 이를 위한 제자훈련 또한 변치 않는 교회의 사명이다. 다만 이 사역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의 개발이 필요하다. 다리예화, 사영리, 전도폭발과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전도방법이 나와야 할 것 같다. 특히 컴퓨터나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매체나 예화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2) 양육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들을 가르쳐서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가진 재생산의 비전이다. 이를 위해서 모인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가 양육의 기본이지만 이를 보완하는 양육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제자훈련이다. 그것이 일대일이든, 소그룹이든 방법에는 다양성이 있겠고 이를 위한 교재도 다를 수 있겠으나 제자훈련을 통한 양육은 변함없는 교회의 사명이다. 사람을 통한 다른 사람의 양육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앞으로 새로운 세대를 위해 이메일이나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양육방법의 도입이 필요하겠으나 기본적인 원리는 변함이 없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2. 제자훈련의 열매는 사역으로 나타나야 한다.
종종 제자훈련을 받았다고 목에 힘을 주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제자훈련을 부정적으로 보는 목회자들도 있다. 제자훈련을 받은 성도들이 목회자들을 우습게 본다는 지적이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된 것은 제자훈련의 목적을 잘 몰라서 생긴 부작용이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워서 성도들로 제자훈련을 받게하신 것은 사역자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여기서 사역자라 함은 목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평신도를 제자훈련시켜서 목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종종 준 목사로 만드는 것을 제자훈련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평신도를 깨워서 제자로 훈련을 시킨 후에 담당할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모인 교회 사역
현재 모인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은 많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많은 사역에 참여하지만 제대로 양육이 안된 채로 일만 하는 경우가 많고 또 훈련은 되었지만 은사와 무관하게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훈련된 사람들에게만 사역이 주어져야 하며 사역이 주어질 때는 은사를 고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모인 교회의 다양한 사역을 정리해서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말씀사역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좀더 훈련을 받아서 그 사역에 헌신하도록 해야 한다. 제자훈련 과정에서 기초적인 성경연구는 모두가 다 하게되지만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역은 이 방면에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맡긴다. 상황적인 필요에 따라서 이들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신도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들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데 피차에게 유익이 크다.
②관계사역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지만(요13:34-35)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을 위해서 그 방면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래리 크랩이란 상담학자는 “컨넥팅”이란 책에서 상담을 전문가들의 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평신도들이 공동체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많다고 했다. 사람들을 돌보는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이 사역에 헌신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훈련된 평신도들이 목회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③예배사역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또 찬양해야 하지만 예배를 돕는 사역을 위해서는 은사와 훈련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찬양대를 먼저 생각하지만 요즈음에는 예배의 형식이 다양해지면서 예배를 돕는 사역도 다양해지고 있다. 기도회 같은 경우 의례 목회자들이 인도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평신도들 중에 특별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더 감동적으로 인도할 수 있다. 교회에서 이 사역을 평신도에게 맡기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사역이라면 의례 모인교회 사역을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헌신된 평신도들은 준(準) 성직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만인 제사장론”을 “만인 목사론”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이 평신도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긴 것은 모인 교회에서의 사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교회로서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사역을 기대한 것이다.
(2) 흩어진 교회의 사역
흩어진 교회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역의 현장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처음 예수님을 따라간 제자들은 다들 가정을 버렸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다. 어부였던 사람은 그물을 버렸고, 세리였던 사람은 세관을 박차고 나왔다. 다들 부모를 버렸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터 속에서 윗사람을 감화시켰고 그들의 가정은 교회가 되었다. 이런 모습이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사역의 모델이 된다.
①가정사역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사역의 현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자기 가정을 돌보는 것 자체가 사역이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하지 않았는가?(딤전5:8) 부부가 하나 되어 서로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들을 돌아보는 사역의 기본이 되어야 하며 자녀들을 바로 양육하는 것은 성도들을 가르치는 사역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가정사역을 위한 훈련과정이 필요하다.
②직장사역
앞으로의 사회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직업의 현장에 있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직업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할 “배설물”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께 하듯”해야 할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불신자와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서 복음의 전파가 일어나는 현장이다. 직장사역 역시 훈련이 필요한 과정이다.
③사회사역
한때 제자훈련 사역과 사회정의 사역은 서로가 상반되는 사역으로 이해되었다. 월드론 스코트 같은 선교학자는 이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제자훈련과 사회정의를 연결하는 사역을 주장했다.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해 무관심할 수 없다. 반면에 세상을 향해 관심을 가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되지 못했을 때 하는 일이 세속화되거나 사회운동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로 훈련된 성도들에게 사회를 향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3.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의 지도자들은 직분에 의해 정해졌다. 목사로 안수받거나 장로로 피택되어 안수를 받으면서 지도자가 되었다. 적절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고 사역의 경험도 없이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 때문에 교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 교회가 제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자로서 훈련을 받고 사역의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 교회의 지도자 직분을 맡겨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는 목회자든 평신도든 똑같이 주님이 사도들에게 주셨던 비전을 공유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를 향한 비전이다.
(1) 세계 비전과 선교 훈련
예수님이 제자삼으라는 명령을 주셨을 때는 지역교회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가정과 직장과 그들이 속한 사회를 염두에 둔 명령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비전은 “모든 족속”이었고 “땅끝”이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의 세계화에 두어야 한다. 세계선교로 열매맺지 못하는 제자훈련은 온전한 훈련이 되지 못한다. 반대로 제자로서 훈련되지 못한채로 세계선교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이야기이다. 종종 선교에 대한 감상적인 이해로 선교사역을 그르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선교사역은 목회자든 평신도든 모두가 제자로 훈련되고 은사에 따른 사역에 열매가 있는 사람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럴 때 선교훈련도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2) 지도자 훈련
21세기의 사회나 교회의 운명은 지도자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은 리더십 훈련이다. 이것은 제자훈련과는 구별이 된다. 기본적으로 제자로서 훈련된 사람들이 주어진 은사에 따라 사역을 경험하게 한 후에 비로소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들에게는 신학교 과정이 이를 대신하지만 평신도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눈가림만 하는 과정을 거쳐서 지도자가 되는 것이 현실인데 이를 위한 과정을 제대로 만들어 실천하는 것이 신학교 과정을 바로 잡는 것과 함께 교회의 최대 과제가 될 것이다.
제자훈련이 전통적인 교회로서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이것을 한 때의 유행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제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이다. 다만 운영에 필요한 방법을 새롭게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제자훈련은 성도들이 사역자로 성장하고 지도자가 되기에 필요한 기본과정이다. 그러므로 후속 프로그램으로 은사에 따라서, 또는 현장에 따라서 각각 사역 훈련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선교훈련과 리더십 훈련으로 열매맺어야 한다. 이 엄청난 일을 개교회가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역교회를 돕는 많은 패러처치 기관을 세우셨다고 확신한다. 지역교회는 선교단체나 전문기관을 경쟁상대로 생각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얻어서 지역교회가 하지 못하는 훈련을 성도들에게 공급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이 기대했던 그리스도의 몸의 사역일 것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참고도서
-폴스티븐스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 IVP
-그레그 옥덴 「새로운 교회 개혁 이야기」 미션월드 라이브러리
-월드런 스코트 「세계선교와 사회정의를 위한 제자도」 두란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