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를 잃어가는 기독교
“기독교인들은 왜 그렇게 배타적이고 무례해요?”
“나를 전도의 대상으로 보고 접근하면, 아주 마음이 닫혀버리죠.”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비기독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듣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평이다. 비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의 내용에 대하여 생각하기에 앞서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같다. 비교적 자주 비기독교인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듣다보면, “이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교회가 다음 세대에도 지속적으로 건재할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까지 한다.
이러한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은 경향은 불행하게도 최근에 나온 통계에 의하여서도 확인되어져서, 더욱 걱정이 된다. 98년 한미준이 한국갤럽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한국 개신교인의 교회활동과 신앙의식, 두란노), 비종교인들 가운데 종교를 가질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32.9%였다. 이를 숫자로 환산한다면, 720만명에 이르는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종교를 갖는다면, 개신교를 택하겠다는 비율이 불과 21.4%밖에 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42.8%의 불교와 36.7%의 천주교와 비교하여 볼 때,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율을 토대로 계산하여 보면, 우리 나라 비종교인 2,200만 중에서 기독교를 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겨우 154만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믿는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종 가능성에 대한 생각에 대하여 그다지 큰 가중치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종교인들이 전도를 받아본 경험에 대한 설문에 답한 것을 보면, 왜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여 비종교인들에게 낮은 선호도를 가지는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종교인들이 지난 1년 동안 전도를 받아 본 경험은 전체의 39%에 이르는데 그 중, 81.5%가 기독교인으로부터 전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9.0%의 불교와 13.1%의 천주교에 비하면, 우리 개신교 신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통계는 이들 중에 이러한 개신교인의 전도 행위나 내용에 대하여 긍적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14.5%에 불과하고, 대신 84.3%의 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국 갤럽 보고서의 해석(158쪽)처럼, 이러한 통계를 놓고 10명 중에서 1-2명은 마음이 움직인다는 데에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열정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전도에 의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10명 중 8-9명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원래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우리가 신학적으로 해석을 해버린다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성경에 반복되어져서 나오는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전도를 포함한 우리의 행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시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는것이다(마태복음 5:16). 그렇다면, 우리에 대한 평판이나, 복음 전도에 대한 평판이 부정적인 것에 대하여, 간단히 그들의 영적 무지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어가 버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복음 전도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과 종교를 택한다면 가져볼 만한 종교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면, 이는 우리의 전도 전략에 대하여 심각한 진단을 해보아야만 한다. 한국 갤럽이 조사한 설문은 위의 두 항목의 상관 관계를 밝힐 수 있게 고안되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전도 활동이 다른 종교인들의 전도활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점(불교와 천주교에 비해 6-9배나 높다)과, 다른 종교인들과의 접촉과 이미지 형성이 이러한 전도라는 매개를 통하여 활발히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우리의 전도활동이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선택하는 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전도에 대한 득과 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도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전도를 열심히 하는데도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서 여러 각도에서 문제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원인 중에서, 이 글에서는 전도 자체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한국 교회는 70년대 초고속 성장을 하면서, 정체 위기에 온 오늘까지 일관된 전도 방식을 택하여 왔다. 그것을 나는 “대면식 전도 방법”(confronta-tional evangelism)이라고 부르고 싶다. 즉, 상대방의 상황이나, 그들이 느끼는 필요보다는 복음 선포 자체에 강조점을 두는 방식이다. 복음을 듣는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기 전에 복음을 선포하고 결단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이는 인격적인 관계가 맺혀져 있는 경우(가족이나 친구)에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나 문제, 즉 그들의 필요보다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결단을 강조하게 된다. 이 방법은 기존의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수를 분명히 알게하고 또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여 주를 위하여 어떠한 고난이나 능욕도 당하겠다는 전투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내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많지는 않지만, 준비되어 있는 피전도자에게 빨리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방식은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비인격적이고 무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복음 전도가 70년대 80년대 중반까지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삶 자체가 고되고, 불확실성에 빠져 있었던 우리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확실하고 자신감 넘치는 접근 방식이 오히려 필요하였었다. 주님은 이러한 전도의 방법을 들어 쓰셨다. 그러나 90년대와 오늘의 2000년대에 이르는 상황은 그 전의 상황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IMF의 위기를 겪기는 하였지만, 우리 사회는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져 가고, 삶의 질을 따지며, 결과 자체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주장 자체 보다는 그 주장에 걸맞는 모습을 보려하는 쪽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그 특성들을 하나 둘 갖추어 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에 불어오고 있는 동양 철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우리 문화와 사회가 점점 더 기독교보다는 더욱 관용적이고 철학적인 동양 사상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우리 문화와 사회는 우리가 살아왔던 패러다임과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전 시대에 활용되던 전도 방식에만 집착하고 있다. “대면식 전도 방법”은 이렇게 변화되어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는 생각지 않은 부산물들을 만들어 낸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진정한 인격으로 취급된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대화를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일방적인 선포를 하고, 정당한 질문에 대하여 먼저 믿어야 된다는 입장을 고집하게 되면,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들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비인격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무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 다른 종교보다 더욱 열심히 말로 전도를 하는 기독교는 그만큼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위선적이라는 딱지까지 얻게 될 위험까지 있게 된다.
우리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대는 결코 변하지 않는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다. 이 끊임 없이 변화하는 시대를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공부하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사역방식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려서, 더 이상 오는 세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는 서구의 기독교가 오랜 세월동안 역사 속에서 보여준 교훈이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전도와 전도의 준비 단계(Pre-evangelism)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어떤 전도 방식을 택하여야 하겠는가? 사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복음 전도”(Life-style Evangelism)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복음 전도”는 전도가 어떤 테크닉이나 훈련 프로그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로 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 전도를 아무 때나 항상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복음 전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져 가고, 복음 전도를 위하여 항상 열려져 있고, 삶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하여, 그들의 필요로부터 시작하여서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도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도 방식에도 결국 결단을 요구하는 “대면식 전도방식”의 단계가 있기 때문에, “삶의 양식으로서의 복음 전도”가 “대면식 전도방식”과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을 요구할 때까지 복음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도와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다. 즉, 복음 전도의 전단계가 강조되는 것 이다.
이러한 복음 전도 방식은,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세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한다: 전도 준비단계(Pre-evangelism), 복음전도 자체(Evangelism proper), 전도 후속 조치(Post-evangelism).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복음전도 자체(Evangelism proper)에 집중하여 왔다. 즉 “대면식 복음 전도”는 이 복음 전도 자체(Evangelism proper)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 따라서는 그 이후의 후속 조치(Post-Evangelism)를 수행하여서 사람들을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전도 준비 단계(Pre-Evangelism)에 대하여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전도 준비 단계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을까? 네가지 정도를 중요한 요소로 들 수 있다. 전도자 자신의 삶의 변화, 관계 형성과 발전, 편견의 제거, 그리고 상대방의 믿음체계 파악이 그것이다. 먼저, 전도자 자신이 전도하는 내용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려고 변화되어져야 한다. 피전도자들이 전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벽성(perfectness)이 아니라, 진정성(authenticity)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를 얼마나 진정으로 따르고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가 비록 영적 순례에 있어서는 조금 앞섰지만, 아직 우리도 우리의 영적 순례를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첫 번째 요소이다.
전도자의 삶이 변화되어져 가고 있다면, 다음으로는 피전도자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웃과 친구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복음 전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서, 비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접근을 항상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결국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지만,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방어적이지 않고 상호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전도자의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 삶과 인격을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전도자의 상황과 필요도 알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요소는 편견 제거인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슬프게 만드는 요소이다.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기독교의 메시지에 대하여 엄청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편견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뿌려 놓은 씨앗들의 열매이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러한 편견들을 하나 둘 인내를 가지고 제거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복음의 내용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들은 메시지도 편견에 기초하여 곡해하기 때문이다. 이 때는 어줍잖은 방어보다는 겸허하고 솔직한 인정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우리의 인내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편견이 제거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네 번째 요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믿음체계를 파악해보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이 삶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내가 전해야 할 내용만 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접근 방법이 될 수 밖에 없다. 복음 전파는 외운 성경 구절을 가지고, 정해진 순서에 의하여, 판에 박힌 듯이 진행되기보다는 상대방의 영적 필요에 접촉점을 가지고 복음을 풀어 설명할 때, 더 효과적일 것임은 당연하다. 이를 위하여 복음을 듣는 자가 영적으로 어디에 서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네가지 요소는 사실 한가지의 중요한 진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 즉, 피전도자를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그가 비록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이다. 그를 진정한 이웃으로 대하고, 나의 삶을 열어보여주며, 그에게 진정으로 다가간다면, 복음 전도 자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 피전도자를 전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그의 영적인 측면(좁은 의미의)만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를 자연스럽게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복음 전도와 기독교에 대하여 불필요한 부정적인 부산물을 만들어 내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대면적 전도방식”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삶의 양식으로서의 복음 전도”라 불리우는 복음 전도 방식의 장점을 보완하여야 할 때이다.
목회자들이 먼저 실습해야 할 방식...
한국 갤럽 조사에 의하면, 목회자들에게서 복음 전도를 받은 사람은 전체의 1.3%라고 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접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활 양식으로서의 전도” 이전에, “대면식 복음 전도”도 목회자들이 본을 보이며 행하지 않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러한 통계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 기획실에서 96년 8월에 목회자 영성 수련회 참석한 예장합동 총회 교역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지난 3년동안 비신자에게 공개적으로 전도한 회수가 3번 이상인 30대 이상의 목회자는 73.42%였는데 반하여 20대 목회자 33.33%가 한 번도 전도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통계 설문 자체가 복음 전도가 삼년에 세 번 이상 복음을 전한 목회자 수를 묻고 있어서, 복음 전도가 목회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3년간 1-2번에 머문 비율이 30%에 육박한다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더 이상 불신자들과 어떠한 인간 관계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하고 정상적인 전도가 이루어져야 할 “전도 준비 단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목회자들이 복음 전도를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훈련을 시키더라도, 복음 전도는 일회적이고 게릴라적인 복음 전도, 프로그램 중심의 복음 전도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불신자들에 대한 민감성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불신자들과 좋은 이웃으로, 또한 친구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그렇듯이, 전도 역시 우리 목회자들의 삶에서 그 근본적인 문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교회 내의 신자들을 관리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우리 대부분의 사역에서 좀 더 불신 이웃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고, 그 속에서 삶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즐거움을 우리가 맛본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를 창조적인 전도자로 발전시킬 뿐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전략을 끊임없이 개발, 발전시켜 나가, 멀지 않아 비기독교인들이 더이상 부정적으로 기독교를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대안으로 여길 수 있는 날이 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