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부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서울에 가서 처음 제16기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제가 모시고 있던 담임목사님의 목회방향이 평신도를 훈련시켜 세우는 것보다는 심방목회에 주력하셨기 때문에 ‘이 공부는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94년 말에 지금 있는 교회에 청빙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1년이 지나니까 더 이상 설교할 재료도 없고 앞이 막히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중에 96년에 국제 3기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나하고 제자훈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그리고 4월부터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훈련을 해오면서 실수도 많았고 틀린 것도 많았고 실패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몇 가지 정리해서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1. 제자훈련은 죽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죽는 것이다.
최근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생겼고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모두 말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공자가 죽고,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입니다. 자기는 죽으려고 하지 않고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좀 죽어 줄 사람이 없을까?’, ‘우리 교회를 위해서 죽을 사람이 없을까?’ 하고 자꾸 죽을 사람을 찾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깊이 깨닫는 것은 교회를 위해 죽어 줄 사람이 당회원 이나 성도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죽을 사람은 나다’라는 것입니다. 대신 죽어줄 사람을 찾을 때는 기도가 안되었습니다. 말씀에 영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자’ 할 때는 말씀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2. 많은 사람 보다 한 사람을 찾으십시오.
저는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 많은 사람 보다 한 사람을 주십시오. 한 사람만 있으면 되겠는데, 누구로부터 시작할까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한 사람을 저는 장로님으로 정했습니다. 교회로 돌아가서 수석장로님 역할을 하는 장로님을 만나 부탁을 했습니다. “장로님, 제가 제자훈련을 하고 싶은데 장로님이 총대를 매 주십시오” “예, 하십시다” 그리고 모든 일을 같이 기도했고 의논하며 발맞추어 나갔습니다.
사람을 선정하고 시간을 정하는 일 등 제 마음속에는 이미 다 결정을 했지만 장로님께 그것을 다 내놓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했고, 그 분은 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목사님, 그렇게 하십시다” 했습니다. 그 한 분으로부터 시작해서 제 1기 제자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1기생들이 모두 안수집사가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1기가 중요하다고 한 적이 없고 1기에서 안수집사를 뽑아달라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교회 안의 영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처음 1기를 시작할 때 함께 기도하고 의논할 한 사람을 찾았다고 하는 것이 저희 교회 제자훈련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3. 차별이 아니라 구별해야 합니다.
분명히 먼저 해야 될 사람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전부 다 들어오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장로님을 먼저 하고 어느 집사님을 나중에 해야될지는 앞으로 5년, 10년, 20년을 같이 사역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차별이 아닌 구별을 두었습니다.
지금 6기를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실패한 반이 하나 있습니다. 구별하지 않고 원하는 사람을 그냥 받은 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훈련이 거듭되면서 광고를 하지는 않았지만 목사와 함께 제자훈련하지 않으면 이 교회에서 소망이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하고 싶지 않지만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이 제자훈련을 하겠다고 들어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체면 때문에 본인도 들어와서 하겠다고 하고 저도 그냥 받았습니다. 그 반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경로당이 되어버렸습니다. 준비가 안된 사람, 마음에 역사가 안 일어나는데 체면 때문에, 억지로, 할 수 없어서 들어온 사람은 훈련 중에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람 뽑을 때 서두르지 말고 철저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4. 기둥 보다 기초공사가 먼저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둥과 기초공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둥은 보이는 것이지만 기초공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둥이라면 기초공사는 목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의 마음에 제자훈련이 채워지니까 설교를 통해서나 어떤 모임에 가서도 사람을 키워야 하고 평신도가 제대로 된 훈련을 통하여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습니다. 목사의 마음속에 있는 뜨거움이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가는 것을 저는 기초공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의 마음에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마음이 채워져야 합니다. 내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초공사가 되어야만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에 관계된 강의라면 50분 강의를 하기 위해 여섯 시간을 비행기로 날아와서 강의를 하고 밤을 새워 돌아가기도 합니다. 주일 설교는 빼먹어도 제자훈련은 빼먹지 않습니다. 목사에게 제자훈련이 가장 중요하다는 확신, 그 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바쁜 일이 있으면 취소할 수 있다?’ ‘아니오, 아무리 바빠도, 장례가 나도 제자훈련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아무리 바빠도 한다는 원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 뜨거우니까 제 말에 교인들이 데인 것입니다.
5. 참고서 보다 교과서대로 해야됩니다.
적용 보다 원칙에 매달려야 합니다. 교회의 형편에 맞게 자꾸 바꾸는데, 바꾸지 마십시오. 바꾸면 죽습니다. 어려워도 하라는 대로 그냥 하셔야 됩니다. 힘들어 하니까 숙제를 줄여주고 바꾸어주는데, 그것은 제자훈련이 아주 망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2기는 없습니다. 1기로 그냥 끝입니다. 봐주면 안됩니다. 봐주는 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제가 배울 때 강명옥 전도사님이 지각을 막기 위해 지각했을 때 벌금을 내기로 정하고, 그것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3분을 지각하고 천 원 짜리를 딱 뽑아 가지고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대로 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제가 늦으면서 5달러 짜리를 흔들면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놀다오신 것도 아니고 심방하고 교회 일 하시다가 늦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받습니까? 내지 마세요” 해요. 이거 유혹입니다. 자기들이 안 내려고 함정 파 놓는 것입니다. 절대 넘어가지 마십시오. 위에서 실패한 반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반을 실패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점잖으신 장로님들이 “목사님, 내지 마세요”하고 만류를 해서 못 냈습니다. 그 후로는 본인들도 늦고 안냅니다. 여기에서 흐트러지기 시작하니까 숙제검사가 제대로 안되고 훈련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큐티와 설교요약은 모두 써오는 숙제입니다. 그런데 종이에다 쓰지 않고 마음 판에 써오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글로는 안 썼지만 다 써왔다고” 그런 사람은 발표를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아, 집사님, 장로님, 알았습니다. 다음에 하십시오” 하고 안 시킵니다. 발표를 시키면 그 다음부터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음 판에 써오지 종이에 써오지 않습니다.
예외를 두면 안됩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예외 없이 처음부터 철저하게 해서 옆으로 샐 수 있는 가능성들을 막아야 합니다. 다른 숙제는 몰라도 예습을 안 해오는 것은 봐주면 안됩니다. 어떤 때는 좀 망신을 줍니다.
그리고 핑계라는 시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도 몇 번 넘어갔습니다. “목사님, 이 교재 언제 쓰여진 거에요?”하고 점잖게 나옵니다. “그 교재요? 한 십 년 됐지요” “그치요? 이거 개정도 안 했어요. 옛날에 써 가지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숙제 안 해 온 것을 ‘말이 이상해서’로 돌립니다. 뭐 별별 핑계를 다 댑니다. 거기에 넘어가지 마시고, “그래요?” 하고 지나가십시오. 그것은 대답해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구암송 테스트를 하면 처음에는 제대로 잘 못합니다. 한번은 남자반 이었는데 채점을 해서 부인들에게 발송해버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얼마나 잘 외우시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수요예배 때 열 분이면 열 분 모두 앞에 나와서 성경구절을 다 외우게 했습니다. 좀 무식하지만 무식해야 성공할 때도 있습니다. 성구를 외우게 하기 위해서 별 방법을 다 써야 합니다. 고상한 것이 필요 없습니다. 외우는 게 문제지 고상한 게 어디 있습니까?
숙제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제자훈련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숙제에 목숨을 거셔야 됩니다. 숙제 안 해오면 그날 공부하는 거 헛수고입니다. 제자훈련은 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와서 나누는 일입니다. 힘들어도 적게 주지 마시고 처음부터 많이 주십시오.
출석도 배운대로 했습니다. “아파도 여기에 와서 누워 계십시오”, “링거를 꽂고서라도 여기에 와서 누워 계셔야 됩니다”, “아, 오늘 급해서, 늦어서...” “아니오, 끝나기 5분전에라도 오셔야 합니다” 처음에는 안 오면 찾으러 보냈습니다. 얼마든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바쁜 일이 생겼다고, 몸이 좀 아프다고 그냥 버티거든요. 전화하고 찾으러 가니까 옵니다. 그것이 남은 사람들한테는 아주 즉효약입니다. ‘아, 내가 버텨도 안 되는구나’, ‘어떻게 해서든지 와야 되겠구나’하는 마음을 콱 심어주는 것입니다.
6. 다 살리려고 하지 말고 다 죽일 생각을 하십시오.
저희 교회에 콜 택시를 운전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시는 분이라 숙제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좀 봐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번 봐드리니까 이것이 다른 분들한테 전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나쁜 것은 금방 전염됩니다. “저 집사님도 그렇게 했는데...” 하면서 핑계를 댑니다. 그 다음부터 예외 없이 모두에게 엄격하게 적용했습니다.
목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 끌고 가고 싶어서 한 분 두 분 처지는 분들을 봐 주면서 다 끌고 나가는데 그것이 결국은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 살리려고 타협하고, 얼르고,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강하게 끌고 나가야 됩니다. ‘안되면 문 닫겠습니다’ ‘안되면, 제자반 이것으로 해체합니다’ 하는, 다 죽일 생각이 있어야 그 반이 살아납니다. 교인들은 목사님이 어떻게 해서든지 끌고 나가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다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티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목사가 어떻게 못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훈련생들과 어떤 경우에든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7. 땀 흘려야 피 흘리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을 받게 되면 ‘왕과비’ ‘허준’ 볼 시간이 없어집니다. “평소에 두 시간 하지 않으면 숙제를 못하겠습디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를 놓고 씨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냥 듣기만 했지 한번도 문제를 놓고 스스로 생각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립니다. 들은 진리는 피상적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파고 고민해서 발견한 진리는 깊게 자리를 잡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비디오 끊고, 신문 끊고, 휴가 끊고, T.V 끊으면서 씨름하게 해야 합니다. 땀흘리는 것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피 흘리지 않습니다.
8. 제자훈련은 서양난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입니다.
난은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습니다. 열매뿐입니다. 제자훈련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양이 없을 뿐 아니라 값비싼 대가를 요구합니다. 제자훈련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오던 심방, 성경공부, 중요한 사역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저는 잠자는 시간과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서너 시간 자면 많이 잡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언제 피곤을 잊습니까? 성도들도 은혜를 받으면 피곤하고 힘든 것을 잊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자기 책에 뭔가 표시해 둔 것을 보여주며 “목사님, 이거보세요. 이게 뭔지 아세요?” 했습니다. 스물 여섯 개 정도의 무슨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만둔다고 얘기해야지’ 했던 표시랍니다. 숙제가 힘들어서 ‘오늘은 가서 얘기해야지’ 하고 와서 하다 보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 한번 더 해 봐야지’, 그리고 또 집에 가면 ‘관둬야지’ 이것을 36주중에 스물 여섯 번을 한 것입니다.
훈련 중에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오가는 대화는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자기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마음의 얘기들입니다. 교회가 세워진지 10년 되는 해에 제가 부임을 했는데 그 동안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민 교회처럼 잘 모이는 곳에서 10년 동안 서로 왕래가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었습니다. 훈련을 시작한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집사님 한 분이 공부 중간에 벌떡 일어나더니 “장로님, 참 죄송합니다. 제가 장로님을 미워하고 싫어했는데, 미안합니다.”하고 앉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제자훈련의 열매입니다. 제자훈련의 열매는 부흥입니다.
9. 제자훈련은 극장이 아니라 목욕탕입니다.
극장은 가서 구경만 하면 되지만 목욕탕은 가서 벗어야 됩니다. 자신을 오픈한다는 것이 목사에게는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제자훈련은 자기부터, 목사부터 벗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벗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벗게 해야 합니다.
장로님 중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도 있고,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창세기도 읽어보지 않은 분이 있다는 것을 훈련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훈련 중에 너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보이기 시작합니다. 부패하고 공허한 내면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웃고 있는 그 가면들이 벗겨지고 그들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공동체 안에서 고백할 때 치료와 교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제자훈련에 있어서 목사는 설명을 해주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있도록 물고를 터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나오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껍질을 벗고 나오기까지 집요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10. 제자훈련은 정거장이 아니라 베이스켐프입니다.
‘제자훈련은 하다가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목사가 그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끝까지 하는 일이다. 여기에 생명을 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제자훈련을 정거장으로, 지나가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베이스켐프로 인식하도록 해야합니다. 실패해도, 어려워도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 제가 한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여튼 원칙대로 안 하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말고, 가감 없이 배운 대로 교과서대로 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