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못 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 - 세상을 잘못 보는 것 사도행전 9장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 형제가 오는 도중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니,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필자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간 비늘 같은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필자는 그것이 바로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물학적이고 신학적인 근거에 따른 분석은 아니다. 당시 사울은 진리 탐구를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노력을 해온 주목받는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게 방해한 것은 바로 ‘비늘 같은 것’이었다. 즉, 낡은 생각이 사울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해온 것이다.
필자는 그 낡은 생각을 대략 4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는 돌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관념이다. 둘째는 사물을 스테레오로 보지 못하는 고정된 관념이다. 셋째는, 시간 속의 반복적 경험을 맹신하는 관념이다. 넷째는 중요성, 크기, 가치를 혼동하는 관념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색깔이 들어 있는 높은 도수의 안경 같아서 눈을 가리면 왜곡, 축소, 확대, 변색, 변질, 날조라는 무서운 현상이 올 수 있다. 한 마디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세상을 못 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이다.
간혹 신앙인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의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교회문화 속에는 그러한 것들이 수없이 많고, 그러한 주관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내의 고정관념들은 대부분 설교를 통해 확산된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 중에 그런 오류가 얼마나 많은가? ‘사울’이 회심해서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그럴듯한 얘기같이, 성경말씀을 적당히 왜곡한 메시지들이 수없이 외쳐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쨌든 고정관념의 안경(Noise)을 벗어버려야 사물이나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고정관념과 신앙을 어찌 분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걸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떼어내야 시력을 회복할 수 있고, 시력을 회복해야 사울 같이 더 넓고 깊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리도, 예수님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돼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비늘 같은 것을 떼어내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가 수도를 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전이다. 고정관념 깨기는 삶 속에서 이뤄지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조금씩 영글어가는 것이다.
고정관념 깨기의 열쇠는 ‘문제의식’이다. “왜 그럴까?”, “꼭 이래야 하나?”, “지금 이대로 좋은가?”, “다른 쪽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하는 문제의식이 충만한 사람이 고정관념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바꾼 일은 없다. 세상을 변화시킨 일은 더구나 없다. 작은 직장에서조차 문제의식을 가진 사원이 더 성장하고 회사를 발전시키지 않는가? 그래서 기업 하는 사람들은 사원들에게 문제의식을 가지라고 통사정을 한다.
필자가 만든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사색(思索)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색(死色)이 되는 날이 온다.” 고정관념 깨기는 연습이다. 삶 속에서 꾸준히 문제의식을 갖고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는 낡은 사고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연습을 시작해보자.
돌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관념에 간지럼을 태우자첫 번째 고정관념은 돌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관념으로 경직된 사고, 스테레오 타입, 공식적 사고, 권위주의, 성격과 기질, 실패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렇게 돌 같이 굳어버린 관념에 간지럼을 태워야 한다.
●’SALT’와 ‘salt’의 차이는 앞의 것은 왕소금이고 뒤엣 것은 곤소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소금이 죽으면 ‘죽염’이 된다는 농담에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유연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날마다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경직된 사고는 파괴를 가져온다. ‘절대로’, ‘오직’ 같은 말은 얼마나 편한 말인가. 그러나 이런 말을 아무 때나 자주 사용하는 것이 경직된 사고의 중요한 증상임을 알아야 한다. 사고가 녹이 슬면 둔감해지고 편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정신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시체의 특징은 유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빠지면 살아 있는 시체가 되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유연한 존재로 지으셨다. 시체 같이 경직된 신앙인은 하나님도 경직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오늘날 우리 교회 중에는 교회의 전통, 형식, 교리를 하나님 말씀처럼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바리새화할 수밖에 없고, 성장을 멈출 수밖에 없다. 딱딱하고 규격화된 가방이 담을 수 없는 것을 보자기는 다 싸안는다. 동해에 나타났던 북한의 잠수함을 잡은 것이 강한 무기나 장비가 아니라 꽁치 그물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 세상을 정복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아니라 평화와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롬 7:6)
● 권위주의도 간지럼을 태워야 할 고정관념이다. 권위가 남들이 인정하는 것이라면, 권위주의는 자기 혼자 자기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날 천국에 한 신자가 도착했다. 주님께서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끌어안고 환영을 해주셨다. 조금 후 목회자가 도착했다 주님께서는 보좌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환영을 해주셨다. 당연히 목사가 항의를 했다. “평신도는 그렇게 환대를 하시더니, 평생을 주님께 바친 저는 왜 내려오셔서 안아주시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좌에서 내려가면 네가 여기 앉으려고 하지?”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의 권위주의는 도를 지나쳐 하늘을 찌르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 사제들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 들린다. 거기에 현혹된 일부 생각 없는 교인들이 그러한 현상을 더 부추기고 있다. 예배의식, 교회내 출판물, 조직 등이 이 권위주의를 든든히 받쳐주는 장치와 도구로 변질되고 있기도 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할 때 “나도 사람이라” 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확인되지 않은 상상, 소문, 간접경험을 사고의 틀로 삼는 것이다. 블랙박스의 색깔이 검은색이라고 믿어버리는 게 스테레오 타입이다. 코피 날 때 얼굴을 뒤로 젖히면 피가 멈출 것이라고 믿는 게 고정관념이다. 어느 지역 출신은 어떻다고 믿는 것, 옥니는 고집이 세다고 믿는 것이 스테레오 타입이다. 피 마사지가 피부에 좋다는 소문에 300명의 주부가 엉덩이에서 피를 뽑아 얼굴에 바르는 피 마사지를 했다가 부작용이 나서 피부를 망쳤다는 사건이 좋은 예다. 확인되지 않은 상상, 소문, 간접경험을 성경말씀보다 더 믿는 게 스테레오 타입이다.
● 공식적 사고라는 게 있다. 세상 만사를 공식 의존하듯 맹목적으로 믿는 생각이다. 왜 그런 공식이 나왔는지 공식에 예외는 없는지를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다.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무식한 사람이라고 한다. 무식하다는 건 학력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작은 공식에 목숨을 거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지나치게 단단히 굳어있는 우리의 생각에 간지럼을 태워보자.
사물을 스테레오로 다르게 보자두 번째 고정관념은 사물을 스테레오로 보지 못하는 고정된 관점이다. 고정된 시각, 부정적 사고, 편견, 수직적 사고, 맹목주의, 흑백논리 같은 것들이 우리 눈을 가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 다르게 보자. 다르게 생각하자(Think Different). 시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동전의 모양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은 동전의 모양을 원형으로 생각하겠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직선이나 타원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과 100개를 가지고 부산을 가면서 반 먹고 오면서 반 먹었다면 얼마나 남았겠는가? 답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다. 그걸 인정하는 사람의 눈에는 훨씬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안다면 인생은 참 즐거울 것이다. 남자는 피아노가 필요해서 산다. 그러나 여자는 옆집이 사서 따라 산다. 남자는 “너 없이는 못 살아” 하지만, 여자는 “너 없으면 어떻게 살아”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것이다.”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사물을 다르게 보지 못하는 것, 남의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우물 안에 가두어버리고 많은 갈등을 만들어내고 불행하게 만든다.
리더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의 시각을 가져볼 수 있다면, 부모가 아이들의 시각을 가져볼 수 있다면, 목사가 교인의 시각을 가져볼 수 있다면, 신자들이 비신자들의 시각을 가져볼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비신자가 모세를 물을 피로 변화시킨 마술가라고 한다면, 이사야를 3년 동안 벌거벗은 채 살았던 나체주의자라 한다면, 엘리야를 과부에게 음식을 구걸했던 거지라고 한다면 에스더를 후궁이었다가 왕비로 올라선 왕의 첩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신성 모독자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각이란 이렇게 다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할렐루야 팀과 임마누엘 팀이 실업축구 결승전에서 만났다. 양측이 무릎을 꿇고 승리를 위해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임마누엘 팀이 이긴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할렐루야 팀은 하나님이 버리신 걸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내 편인가?”를 놓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시각은 살피지 않는다.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가 그렇다. 실력이 부족해도 그렇게 하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기도회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나님이 내 편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성적이란,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아이들의 것이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한 아이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의 진리가 아닐까? 어른들이 순진한 아이들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목사님께 기도 받은 아이들의 합격률을 조사해보면 알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원수는 죽이라는 게 예수님 당시의 율법이었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바울은 서반아 전도를 소망했지만 붙잡혀서 로마로 갔고 그것이 로마전도의 계기가 됐다. 사람의 이성적 전략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 다윗은 성전 헌당식을 기존의 율법적 제사 형식을 버리고 찬양으로 드렸고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우리는 다수결을 신봉하지만,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롯 때문에 다른 죄인들도 살았고, 모세 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든 유대인들이 살았다. 제자들은 옥합을 깨어 경배한 여인의 낭비성을 지적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칭찬하시고 기념하도록 격려하셨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낮아지는 게 예수님의 생각이다.
교회내의 고정관념 가운데 지적하기 미묘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축복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의 축복관과 사람의 축복관은 다른 것 같다. 특히 한국 교회 교인들의 축복관은 더욱 그렇다. 마태복음 5장을 읽어보면 ‘복’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직접 복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니 잘 읽어볼 대목이다. 그리고 바울, 다윗, 칼빈, 아브라함, 모세, 요셉 같은 신앙의 위인들이 받은 고난과 복에 대해 연구해볼 일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의 본질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은 축복관을 갖는 것이 신앙이 아닐지.
● 고정관념 중에서 언제나 우리를 붙잡는 것의 하나가 부정적 사고다. 안 보여서 안경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보려고 안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더 잘 볼 수 있겠는가? 컵의 물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다는 사람이 있고 반이나 있다는 사람이 있다. 상한 사과 3개를 그중 제일 맛있는 것, 그 다음 맛있는 것...으로 먹는 사람이 있고 가장 맛없는 것, 그 다음 맛없는 것......으로 먹는 사람이 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어디에 묻어줄까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치 후 어디로 여행을 가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긍정적 사고는 긍정적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신앙은 긍정적 방향성을 갖는다.
● 편견도 대표적인 고정관념이다. 균형을 잃은 시각이 바로 편견이다. 석탄일 플래카드의 훼손, 천불상의 훼손, 단군상 훼손 등 기독교인들의 타종교에 대한 편견이 사회문제화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편견을 ‘편견으로 보지 않으려는 ‘편견’이다.
여성, 직업 귀천, 장애인, 출신도에 대한 편견도 우리 사회의 큰 문제다. 장애인에 대한 교회의 편견은 그들의 휠체어가 오를 수 없는 예배당 계단에 잘 나타나 있다.
● 두 여인의 아이 소유권을 둘러싼 솔로몬의 명판결은 우리들의 수직적 사고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일화는 생각의 축을 바꾸어보라는 가르침이다. 어떤 사람이 해를 놓고 달이다 해다 하며 다투다가 행인에게 물어봤다. 행인은 엉뚱하게도 “난 이 동네에 안 살아서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양자 택일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비켜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수평적 사고다. 빵 굽는 기계가 없으면 다리미에 빵을 구워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막히면 돌아가야 하는데, 끝장을 보려는 생각이 수직적 사고다. 이젠 한 우물을 파서는 안 된다. 여러 우물을 파야 하는 멀티 마인드가 필요하다.
●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흑백 논리적 신앙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시작된 2분법적 신앙의 틀은 교인들의 삶을 절름발이로 만들어놓고 있다. 남녀, 하늘과 땅, 신앙과 생활, 이 세상과 다음 세상, 일요일과 평일, 교회와 세상, 교회와 가정, 성직과 세속직은 상대적 우열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가 있다. 그것을 한쪽은 가치 있는 것, 다른 한쪽은 무가치한 것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현실적인 삶으로 넓혀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나온 것이 현실 도피형 신앙이다.
신앙과 신앙생활은 결혼과 결혼생활이 다르듯 큰 차이가 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균형, 내적 성령 충만함과 외적 성령 충만함의 조화,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세상 삶의 일치를 막는 주범은 바로 이분법적 신앙관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교회에서의 삶만 의미하지 않는다. 삶과 관련된 모든 부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녀로서 사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 좋은가?”
- 문제의식을 갖자오늘도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들이 우리 삶 속에서 진리의 대접을 받으며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는가?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은 잘못된 고정관념의 안경으로 왜곡, 축소, 확대, 날조된 진리의 본질,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 된다. 성경을 펴놓고 믿어야 한다. 그러자면 문제의식이라는 열쇠가 필요하다.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삶이란 ‘정신적인(신앙적인) 죽음의 상태’다. 개인이나 조직, 사회가 망하는 건 문제가 많아서라기보다는, 그러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찾지 못해서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 4:22,23)
이의용 장로는
교회문화연구소 소장과 이의용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대표로
섬기고 있으며, 중앙대, 서울여대, 국민대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홈페이지 : www.churchculture.co.kr
이메일 : yyii@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