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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평깨 48 호

제자훈련의 성공을 위하여 열린리더십을 개발하라

2003년 04월 옥한흠 목사


제자훈련의 성패는 리더십에 의해 좌우된다. 효과적인 리더십이 없는 제자훈련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자기가 앉을 침대를 수리하는 것과 같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의자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올바른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제자훈련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제자훈련을 잘 하든 잘 못하든 그 책임은 100퍼센트 지도자에게 있다.

좋은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 밑에서 참된 제자가 탄생한다. 어떤 교회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성도들도 멋진 제자로 바뀌지만 많은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대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제자훈련에 실패하는 이유는 리더십 때문이다. 리더십이 무엇인가? 존 맥스웰은 리더십을 한마디로 '영향력' 이라고 정의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만드는 능력이 리더십이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없다면, 그에게 리더십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리더십에는 열린 리더십과 닫힌 리더십이 있다. 흔히 열린 리더십을 리더형이라고 하고, 닫힌 리더십을 보스형이라고 한다. 보스와 리더는 다르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교회의 80퍼센트에 달하는 목회자가 보스형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교회는 계속 침체되어가고 있다. 제자훈련에 성공하려면 열린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는 보스가 아니라 리더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열린 리더십은 열린 인격을 가질 때 가능하다. 열린 인격을 가질 때 열린 훈련을 할 수 있고, 열린 사역을 펼칠 수 있다. 열린 인격, 열린 훈련, 열린 사역을 염두에 두고 열린 리더십을 생각해 보자.

▶ 열린 인격

열린 인격은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인격이다. 열린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는 성도들이 마음껏 믿어주는 인격을 가진 지도자이다. 열린 인격을 가진 지도자는 우선 성품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균형이 없는 인격은 믿을 수 없다. 젊었을 때는 너무 급하든지, 너무 느리든지, 너무 강하든지, 너무 약하든지...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젊은 시절에 이런 약점을 가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성도들의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은 생각이 너무 좁아.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해"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그 인격이 닫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목회자로서 강단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균형을 갖춘 인격이 필요하다. 급할 때에는 급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급하면 안 된다. 조용할 때에는 조용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조용해서도 안 된다. 너그러울 때는 너그러워야 하지만 항상 너그러워서는 안 된다.

지도자가 열린 인격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숙해야 한다. 성숙하면 인격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성격이 균형을 이룰 때 성도들은 그 지도자를 믿고 신뢰하기 시작한다. 제자훈련을 잘 하려면 먼저 성도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성품인지, 성도들이 안심하고 믿어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지, 성도들이 당신을 생각할 때 불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인격을 점검해야한다.

나도 성격이 좋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런데 15년 전부터 아내가 "당신 참 많이 변했어요."라는 말을 한다. 남편의 인격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는 말이다. 이제 나이가 60이 넘었으니까 철이 난 것은 45세 정도로 사랑의교회를 시작하고도 5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니 5년 동안 우리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내로부터 인정받기까지는 목회를 시작하고 5년이 걸렸다.

아내로부터 신뢰를 얻고 교인들로부터 신뢰를 받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제자훈련이었다. 제자훈련을 하면 제일 먼저 깨지는 사람이 누구인가? 장로인가? 집사인가? 장로가 먼저 깨졌다면 일단 제자훈련은 잘못한 것이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제일먼저 깨져야할 사람은 목사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의 나쁜 성격이 바뀌고 정직하지 못한 자신이 변화를 받아야 한다. 목사의 모든 것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을 훈련을 받는 평신도들이 다 보고 있다. '아. 우리 목사님이 변화되는구나. 이제 목사님을 믿을 수가 있어.'라는 마음이 생겨야 한다. 이런 변화들이 제자훈련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 나에게는 제자훈련을 시작하고 5년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아내가 나를 보고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열린 리더십을 가질 수 있다.

열린 인격을 위해서는 성도들이 지도자의 신앙을 철저하게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목사는 모두 신앙이 좋은가? 모두가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목사니까 좋은체 하는 것뿐이다. 목사는 모두 구원받은 기쁨이 있는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지은 모든 죄가 용서받은 감격이 있는가? 성도들이 목회자를 볼 때 "우리 목사님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야"라고 생각하는가? 불행하게도 목사들 중에 신앙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어쩌다가 목사가 된 것이지 예수 믿는 감격이 없는 목사가 있다. 신학교에 들어갔으니 목사가 되었고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지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 앞에서 죽고 깨어지는 체험이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교인들도 다 알고 있다. 설교를 들으면 그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감격하고 생을 헌신하기 원하는 목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만일 교인들의 마음에 '우리 목사님, 설교는 잘하는데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교인들이 목사를 신뢰하겠는가?

또한 목회의 비전을 분명히 하여 성도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나를 철저히 믿고 있다. 22년 동안 비전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었고 그것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옥 목사를 '평신도를 제자로 만들기 위해 미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목회비전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 비전에 있어서 성도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새해가 되면 올해는 제자훈련으로 목회하겠다고 말하고, 2년 지나서 다른 세미나를 참석하고 돌아오면 또 그것이 좋다고 성도들 앞에서 공포한다. 교인들은 두 세 번 정도는 목사님의 말을 따라가지만 그 이상 바뀐다면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일이기에 잘 따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열린 인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열린 인격이란 균형잡힌 성품을 말한다. 사역의 비전이 성도들의 신뢰를 얻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목회자는 제자훈련에 성공할 수 없다. 믿음이 가지 않는 지도자를 어떻게 따라가며 본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열린 리더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신뢰받는 지도자인지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

▶ 열린 훈련

'제자훈련'하면 우선 딱딱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래서 잘못하면 제자훈련의 분위기가 굳어버리게 된다. 훈련을 받기 위해 모인 성도들을 무거운 짐을 지우듯 얼어붙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제자를 만들지 않으셨다. 숨도 못 쉬는 분위기에서 제자들을 다루지 않으셨다. 제자훈련의 자리는 사랑이 넘치는 자리이어야 하고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안기는 것 같은 평안이 있어야 한다. 너무 바빠서 성구 암송을 못해 와도 제자훈련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암송을 못해서 제자훈련에 와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훈련을 받는 분위기에는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고,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열린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들의 분위기는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 한 부류는 마치 군대훈련처럼 제자훈련을 한다. '일어섯! 앉아! 경례! 왜 숙제 안 해왔어요?...' 숨을 못쉬게 한다. 이런 제자훈련은 100번 해도 실패한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잘 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이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물론 숙제도 검사하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훈련생들은 목회자에게 욕을 먹어도 즐거워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만 은혜를 받는다. 거기에는 뭔가가 있다. 지도방법이 열려 있는 것이다. 함께 울고 함께 우는 정이 있다. 그런 지도자들은 말씀 앞에서 목사가 먼저 마음을 연다. 성령의 어루만지심으로 목사가 먼저 운다. 훈련생이 잘못한 문제를 가지고 책망도 하지만 그것으로 목사가 아파하는 것을 성도들이 느낀다. 제자훈련은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지도자는 열린 훈련을 하고 있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유연성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상품으로 보지 않고 인격으로 대한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당장 잘못하는 것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보고 기다려주는 유연함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열린 훈련을 할 때 사람이 변하고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며 신앙이 자라게 된다. 그곳에는 기쁨이 있다. 훈련생들은 좀더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매일 매일 다음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사랑의교회는 1년에 두 번 6월과 12월에 사역보고서를 받는다. 12년 동안 나와 함께 사역하고 있는 어느 여전도사의 글을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되돌아보면 처음 몇 년은 훈련 프로그램에 끌려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때 제자훈련 받은 사람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제자훈련의 기본 정신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거기에 사람을 맞추는 식의 훈련을 하느라 애썼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마음이 급해지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좁고 근시안적으로 지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후에야 사람을 귀하게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을 하고 나서야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 전에는 프로그램만 눈에 들어왔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고백인가? 제자훈련을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프로그램만 눈에 들어온다면 훈련을 잘못한 것이다. 제자훈련을 바로 하려면 사람이 눈에 들어와야 한다. 그녀는 이렇게 또 말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알고 이해하는 것, 그를 위해서 수고하고 오래 기다려 준다는 것, 이것들이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가능성을 보고 기대하고 사랑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은 진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12년이 흐르고 나서야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지금 제자훈련을 잘하고 있는 분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열린 훈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훈련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 솔직해져야 한다. 당신과 나는 똑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여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지도자가 손에 매를 들고 있는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된다.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지도자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보아야 한다. 지도자의 눈에서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 열린 사역

20:80 원리가 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20:80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곤충학자들은 벌의 세계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고 한다. 10만 마리의 벌이 있다면 그 중에 일하는 벌은 2만 마리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하는 지도자는 자기 공동체에서 이 20을 볼 수 있어야 한다. 100명이 모이는 교회라면 20명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20퍼센트가 목회 성공의 자원이 되도록, 20명이 나머지 80명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목회비전을 가져야 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20퍼센트를 발굴하고 훈련해서 일하도록 하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만약 어느 목회자가 100명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10년 동안 100명 전체를 제자훈련 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교회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성도들의 책장에 제자훈련을 수료한 교재만 꽂혀있고 만나면 몇 기를 수료했는지 자랑만 하고있다면 제자훈련에 실패한 것이다. 100명 모이는 교회에서 100명 모두를 제자훈련 시킬 필요는 없다. 20퍼센트가 훈련을 받아서 먼저 교회에 변화를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훈련받은 20퍼센트를 통해서 교회의 체질이 건강하게 바뀌어야 하고 이들을 통하여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 20퍼센트가 목회의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제자훈련을 잘 못한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제자훈련에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리더십이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제자훈련을 시켜도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1기, 2기...자꾸 가르치려고만 한다.

훈련받고 사역자로 뛰는 사람이 몇 명인가? 제자훈련을 수료시켜놓고도 사역의 현장에서 동역하지 않는다면 좋은 상품을 만들어 놓고 창고에 쌓아 놓은 격이다. 상품을 만들었으면 그 다음은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 20퍼센트를 잘 훈련시키고 나면 '나를 따르라'고 해야 한다. 그냥 '가라'고 해서는 안된다. 전도하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전도할 테니 나를 따르라고 해야 한다. 사랑하라고 하는 대신 목사가 먼저 사랑의 실천을 하고 그것을 보도록 해야 한다. 목사가 달려가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성도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처럼 20퍼센트의 성도들을 훈련해서 목사와 함께 뛰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열린 리더십은 사역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훈련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일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훈련을 받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

사랑의교회에서 5년을 부목사로 일하던 한 분이 오랜 전통이 있는 교회에 부임해갔다. 속으로 '너는 죽었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부임한지 5년이 되는 지금 제자훈련은 정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장로님들과 나이든 권사님들이 5년 사이에 모두 다 변했다. 강대상에 올라갈 때 장갑도 끼지 않고, 가운도 입지 않는다. 그 높던 강대상도 바뀌었다. 박수도 못 치던 교회가 박수를 치며 가스펠 송을 부르고. 700여 명이 출석하던 교회가 지금은 1,500여 명이 출석하고 있다. 그 목사가 얼마 전에 나를 찾아 와 "저에게 변화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목회자가 교회를 위해 죽으니까 교인들이 변화되었고, 목사가 죽으니까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이다.

서울은 물이 오염되어서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목사가 섬기는 교회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아파트가 새롭게 들어섰다. 지난 5년 동안 제자훈련 시켜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성도들이 100명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그 목사가 이들과 함께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파트에 가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아파트이고 보니 이사온 사람들이 생수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교회 수양관에서 길어온 생수 500통을 매일 준비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공짜로 넣어주기 시작했다. 남자반 제자훈련을 수료한 사람들이 밤 11시에 생수를 길어다 밤 1-2시까지 아파트에 가져다 놓으면, 낮에는 부인들이 물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나누어주었다. 어떻게 100명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원되어서 물통을 나를 수 있었겠는가? 이유는 딱 한가지, 목사가 앞장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항상 아파트에 나타나 물통을 들고 일을 했던 것이다. 5개월 동안 78가정, 100명이 예수믿고 돌아왔다. 이런 교회는 변화되고 성장한다. 사역의 장을 열어주고 목사가 평신도 지도자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평신도 지도자와 동역하기를 좋아하는 목회자인가? 당신은 평신도가 뛸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목회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열린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다. 머지 않아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그러나 훈련은 시키지만 사역의 장은 열어주지 않고 있는가? 훈련받은 평신도가 뛰려고 하면 견제하고 있지는 않는가? 모든 평신도가 목사만 쳐다보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리더십은 바뀌어야 한다. 당신의 리더십은 제대로 된 제자훈련을 할 수 없는 닫힌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목사가 앞장을 서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사역의 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들을 통해서 교회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을 온 교회가 보도록 해야한다. 가르치기만 하는 제자훈련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훈련받은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나는 교회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교회를 움직여가는 20퍼센트를 발굴하고 훈련하고 사역하도록 도와야한다. 당신의 제자훈련 사역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