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은 목회의 시금석이다. 제자훈련은 단순히 사람을 키운다는 차원에 국한되는 사역이 아니다. 제자훈련 사역을 하다보면,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 모두가 함께 성숙하게 되고, 목회에도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 이것은 실제로 제자훈련 사역에 전력질주 해 본 이들만이 아는 놀라운 영적 일석이조의 비밀이다. 제자훈련을 처음 시작하려는 목회자나 제자훈련목회의 무한한 가능성에 새롭게 눈떠가고 있는 목회자들이 사역할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기본자세에 대해 간략히 함께 나누고 싶다.
첫째, 한 사람의 중요성에 눈떠 그 한 사람을 키우고 변화시키는데 생명을 걸어야 한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나오는 대로, 한 사람을 키우고 변화시키는 제자훈련에 생명을 걸면 교회의 규모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사역의 모든 짐들을 오히려 벗게 된다. 필자도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10여 명의 젊은이들을 제자훈련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필자를 안됐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필자 자신은 아무런 사역의 부담이 없었다.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며 생명을 건다고 여기니 두려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은사를 최대한 발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서 제대로 된 사역의 정신(Spirit)이 세워진다.
찬송 한 곡을 선택할 때에는 찬송가 전곡을 다 뒤져서라도 영감있고 은혜가 되는 찬송을 고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보에 실리는 글의 용어 하나, 사람들을 만날 때 건넬 인사말 한 마디, 교회를 꾸미기 위한 장식 하나, 화장실에 꽂아둘 꽃송이 하나를 고르는 일에까지도 꼼꼼하고 치밀하며 최선을 다해 골라야 한다. 주일 예배의 광고 멘트 한마디도 단순한 정보전달(information)이 아닌 동기유발(motivation)이 될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하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성도들의 몸 속에서 은혜의 세포가 춤을 추는, 영혼의 엔돌핀이 넘쳐나서 환한 웃음을 띠고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창의적인 사역은 창의적인 단어 창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예배의 끝마침은 섬김의 시작"이라는 말이나, 생활 예배와 공적 예배, 주일 예배와 일 예배의 연속성 등을 강조하는 용어들은 다 사역에서 긴장감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사역에서 차선은 최선의 적이다. 물론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선을 택할 때에라도 그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여전히 중요하다. 사람은 24시간 살아 있는 동안은 항상 머리를 써야 한다. 사역자에게는 굳어 있고 닫혀져 있는 머리의 뚜껑을 여는 혁신이 늘 필요하다.
셋째, 제자훈련 사역의 우선순위는 철저히 섬김의 자세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제자훈련을 시작하는 사역자는, 목회자로서 대접을 받겠다는 생각을 모두 던져버리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훈련받는 평신도들과 함께 다듬어져간다는 자세로 인격과 삶의 모든 부분을 벌거벗고 같이 뛰어야 한다. 가르치는 자세가 아니라 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성경 암송 같은 것도 사역자 자신이 먼저 암송하고 적용해야 하며, 때로는 자신이 암송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훈련생들에게 나눠주는 정성도 필요하다. 설교도 명령형으로 성도들을 내려치고 강요하는 설교가 아니라 자신의 진솔한 삶을 나누는 섬김의 자세로 해야 한다. 성경에서 "양을 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말 그대로 양을 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하튼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는 그 사역을 위해 썩어지고 닳아져 없어져도 좋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촛불처럼 녹아 없어져도 좋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제자훈련을 위해서라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이 중요하다. 인생의 시간은 이것저것 모든 것을 다 해볼만큼 그리 길지 않다. 제자훈련은 교회론적으로나 성경신학적으로 이미 검증된 사역이다. 강철판도 뚫고 나가겠다는 집중력을 가지고 제자훈련 사역에 열매를 맺는 목회자들이 더 많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