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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평깨 57 호

목적이 이끌어가는 설교

2002년 12월 릭워렌 목사

어떤 설교가 심오한 설교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심오한 설교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설교이다.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가 가장 심오한 설교이다. 최신의 비평적 관점으로 예리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보다 오히려 삶에 대한 적용점을 찾아내는 설교(Life application preaching)야 말로 가장 심오한 설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새들백교회의 설교는 심오한 설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변화라는 목적이 이끌어가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바로 그러한 나의 설교론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1.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과 설교를 전달하는 방법에 익숙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의 목적이다. 왜 설교를 하는가를 바로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와 “성경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있다. 로마서 8장 29절은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는 성경의 목적이 나와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목적이다. 즉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성경의 목적인 것이다. 목회자의 설교는 바로 이 두 가지 목적이 이끌어가는 설교여야 한다.

따라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결코 설교의 한 장르나 방법이 아니라 설교의 본질인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삶의 적용점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 2.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9가지 전제가 있다

오랫동안 설교사역을 해오면서 나는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에는 기본전제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본전제들은 대략 다음의 아홉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모든 행동은 신념에서 나온다.
내가 만일 당신에게 “왜 그렇게 행동하십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그건 당신의 행동 저변에 깔려 있는 신념을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결혼과 관련된 어떤 신념, 이를테면, ‘독신으로 사는 것보다는 결혼을 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는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죄는 잘못된 신념에서 나온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죄악을 저지르는 순간 자신이 스스로 최선의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된 신념이 잘못된 행동을 낳는 것이다.

셋째, 삶의 변화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로마서 12장 2절에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구절이 있다.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것을 좌우하고, 우리가 느끼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좌우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넷째, 삶의 변화는 신념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설교자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들의 신념을 변화시키려해야 한다. 신념이 행동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다섯째, 신념의 변화 없이 행동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우리가 자동조종장치가 달린 보트를 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는 보트가 북쪽으로 향해 가도록 조종장치를 설정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싶어진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수동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동으로 방향이 정해진 보트의 조종장치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는 것이므로 이것은 굉장히 힘들 것이다.

이처럼 근본적인 신념의 변화 없이 행동만을 바꾸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바로 자동조종장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자동조종장치를 남쪽으로 향하게 바꾸어 버리면 배는 쉽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갈 것이다. 신념을 먼저 변화시키고 행동을 바꿀 때 그만큼 쉬워지는 것이다.

여섯째, 회개(metanoia)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전적인 반전의 순간이나 자신에게 있는 모든 나쁜 행동들을 그만두는 뜻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회개를 뜻하는 “metanoia”란 단어는 단순히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업가들이고 설교는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는 가장 깊은 믿음과 진가에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의 힘으로는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때문에 우리의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바꾸시오.”라고 강요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을 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 구절은 설교가 영적인 사역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설교야말로 우리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싸우는 진정한 영적 전쟁인 것이다.

여덟째, 회개의 열매는 행동의 변화이다.
회개는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이다. 하지만 회개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의 변화는 회개의 열매이다. 세례요한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26장 20절에서 “나는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행함으로 자신의 회개를 증명하라고 전한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인식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홉째, 설교의 목적은 회개이다.
가장 훌륭한 설교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설교이다. 설교의 목적은 회개이다. 교리나 해석, 성경적인 배경에만 치우친 채 실제적인 적용점이 하나도 없다면 그런 설교는 아무리 훌륭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피상적인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 설교의 목적에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념에 패러다 임쉬프트(Parading-shift)를 일으켜 마음을 먼저 변화시키고, 그 결과 행동이 변화되도록 만드는 것, 즉 회개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 3.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해석과 적용의 균형을 유지하는 설교이다.

설교란 텍스트의 세계(That World)와 청중의 세계(This World)를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 두 세계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균형을 잘 유지하지 못하고 텍스트의 세계나 청중의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텍스트의 세계를 다루는 것 즉 텍스트를 해석하는 비율과 청중의 세계를 다루는 것, 즉 삶의 적용점을 나누는 비율이 50:50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브루스 윌킨슨은 스펄전, 무디, 칼빈, 찰스 피니, 척 스윈돌, 찰스 스탠리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분석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대개 50~60퍼센트의 적용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70퍼센트 정도까지 적용을 다루었다.

해석과 적용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내가 로마서를 가르치면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로마서의 50퍼센트가 삶에의 적용을 다루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로마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교리적인 책으로 알고 있는데, 가장 교리적인 로마서조차 절반을 삶에 적용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 4.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청중이 적용점을 기억하는 설교이다.

청중들이 자신의 삶에 성경 말씀을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들이 적용할 교훈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설교를 진행하는 순서는 먼저 본문을 해석한 다음 그 해석에 대한 적용을 나누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메시지를 전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을 설교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산상수훈에 대하여 배경을 길게 설명하고 난 후에 비로소 염려에 대해서 해석하고, 그 다음에 그 해석을 토대로 적용을 제시하는 식으로 본문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 모두 예외없이 염려 때문에 씨름하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우리가 염려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신 여섯 가지 이유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적용 중심의 설교이다.

아울러 설교의 대지를 분명한 적용점들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많은 설교자들이 알파벳을 연결하여 대지를 구성하는 워드플레이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런 워드플레이를 하다보면 대지의 정교함에 치중한 나머지 대지가 명확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지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보다 대지를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지난 21년 동안 새들백교회가 성장해 온 비결은 매주일마다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 하나님과 사단, 미래와 과거,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할 사명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세를 바꾸도록 이끄는 방향으로 말씀을 적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새들백교회에서 설교란 지식(Information)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바로 이러한 능력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