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기간 동안 다양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필자에게 주어진 보너스였다.
척 스윈돌, 빌 하이벨스, 릭 워렌, 찰스 스탠리, 토니 에반스, 진 게츠, 에드 영 등등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고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많은 설교를 들을수록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각자마다 타고난 은사가 다름은 모두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그러나 학습과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점검되고 준비되지 않아서 전혀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설교를 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설교의 은사가 없다고 해도 학습과 노력을 통해 어느 수준까지는 설교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삶에 좋은 습관들을 길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대체 습관이란 무엇일까? 새우리말 큰 사전에서는“어떤 행동이나 의식의 형태가 고정되어 그것이 언제나 같은 형태로 무의식 중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것이 완전히 몸에 배는 것, 삶의 형식으로 굳어지는 것을 말한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습관을 지식, 기술 그리고 욕망의 혼합체로 정의한다. 지식이 무엇을 해야하고 왜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패러다임이라면 기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방법을 말한다. 또한 욕망이란 하고 싶어하는 것, 즉 동기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습관화하려면 반드시 이 세 가지 모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설교자가 가져야 하는 좋은 습관을 형성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 목회의 승부수, 묵상
너무나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습관은 묵상이다. 묵상은 목회자에게 중요한 삶의 패턴이 되어야 하며 훈련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사실 목회자는 늘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산다. 시간 계획을 아무리 잘해도 그 계획을 침범하는 긴급한 일의 횡포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목회 현장이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목회자가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부분이다. 마치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 (행 6:4) 고 승부수를 띄운 것처럼 말이다. 목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말씀 사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저런 섬김과 행정적인 일들로 분주해서 말씀의 샘이 메마르게 되면 결국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성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없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신의 에너지 흐름에 주목해 보았다. “나는 하루 중 언제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충만한가? 언제 가장 왕성한 지적인 활동을 하는가?” 나름대로의 분석 결과, 가장 생기 있는 오전 시간의 일부를 떼어 묵상하고 연구한다. 그 시간에는 절대로 회의를 하지 않는다. 생체 리듬이 가장 왕성한 시간을 묵상과 연구의 시간으로 할애하는 것이 그에게는 삶의 패턴이다. 그것이 그의 삶의 패턴이 되자 교회의 다른 스태프들이나 성도들도 그를 이해하고 적응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 하다.
방선기 목사는 자신의 책제목을 『설교하기는 어려워도 설교 준비는 즐겁다』라고 붙였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 아닌가! 그에게 설교 준비가 즐거운 이유는 묵상이 하나의 습관이었고 그 시간을 통해 누리는 은혜들을 즐겨 왔기 때문일 것이다. 묵상의 깊이가 우리의 설교를 풍성하게 한다. 수도관에 연결되지 않은 스프링클러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 설교듣기를 통한 벤치마킹
좋은 설교를 듣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 한 본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경험할 수 있고, 표현이나 전달에 대한 통찰(insight)을 얻기도 하며, 은혜를 받기도 한다. 물론 설교를 들으면서 당장 자신의 설교에 인용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을 얻을 수도 있다. 릭 워렌은 설교를 들을 때 항상 작은 녹음용 카세트를 가지고 다니는데 설교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나 글귀가 있으면 바로 녹음을 해서 놓치지 않는다.
설교 테이프는 설교집이 가질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설교집에는 감정이 없지만 테이프에서는 현장감과 함께 그 내용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사실 설교집으로 대할 때에는 평범했던 설교가 귀로 들을 때 은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설교란 단지 내용이 잘 꾸며진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감정, 확신, 전달 방법, 내용,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설교를 완성시키기에 설교를 들으면서 분석하기보다는 한 번 그 분위기를 느껴 보는 것도 중요하다.
다양한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좋은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다. 설교를 듣다 보면 각 설교자에게 주신 은사들이 발견된다. 기가 막히게 예화를 잘 활용하는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어눌하지만 묵상의 깊이가 깊은 설교자가 있고, 좋은 스토리텔러(storyteller)도 있다. 물론 그 모든 설교자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설교자들을 모방하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다. 그러므로 먼저 나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가? 나에게 가장 좋은 모델은 어떤 사람일까?”를 물어보라.
다청(多廳), 즉 많이 듣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설교에 인용하기 위한 어떤 자료를 얻는 것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설교를 집중해서 듣다 보면 분석이 가능하다. 나에게 맞는 모델을 발견하고 그 설교자의 설교를 반복해서 들어보면 긍정적 의미에서 벤치마킹이 가능하며 나만의 설교 스타일로 개발될 수 있다.
▶ 설교를 풍성하게 하는 습관, 독서
존 웨슬리는 “책을 읽지 않으려면 사역을 그만 두라"고 말한바 있다. 바쁘게 이곳저곳을 다니던 그가 언제 책 읽을 시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렇게 분주한 삶을 살았던 웨슬리에게도 독서는 중요한 삶의 습관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독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를 풍성하게 한다. 먼저 독서는 우리를 삶과 연결시킨다. 우리는 책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삶의 현장을 접하게 되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이해하게 된다. 삶과 괴리된 설교는 무의미하다.
또한 독서는 우리의 표현법을 개발시켜 준다. 물론 문어와 구어는 다르지만, 멋진 한 문장은 청중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서는 우리의 지성을 예리하게 하며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 우리의 설교를 풍성하게 한다. 존 버건 박사는 성장하는 교회 목회자의 일곱 가지 습관 중 으뜸으로 독서를 꼽았다. 물론 독서한 것을 잘 정리하고 자료화하는 것도 중요한 습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서할 것인가?
프레드 크레독은 이렇게 말했다. “설교의 내용이나 분위기, 특징을 결정짓는 데 가장 많이 반영되는 것은 설교자가 얼마나 다양한 책을 읽었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독서란, 다음 설교의 부담감이 없을 때, 정신이 설교학적인 자석(magnet)으로 끌려가지 않을 때, 책으로부터 사용할 만한 구절들을 발췌하려고 하지 않을 때 읽는 책이다.”
또한 존 던컨은 이렇게 말한다. “설교를 위한 독서는 오히려 설교의 감각을 무디게 하지만 즐거움을 위한 독서는 설교자의 감각을 활기차게 되살아나게 한다.” 이 두 사람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설교재료을 찾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삶의 패턴이 된 독서, 즐기기 위한 독서를 하자. 꾸준한 독서는 나의 설교를 풍성하게 한다.
▶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노력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씀 때문에 괴롭다.”고 마크트웨인은 말했다. 물론 매주 여러 편의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지나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실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묵상하고 증거하는 말씀에 내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묻는 태도 말이다. 그러한 진지함이 없이 쉽게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는 일이 삶의 패턴이 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설교자 자신에게 초래할 수 있다.
사실 인격과 설교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거룩한 부담이다. 나를 통해 증거된 말씀은 나의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 결국 이것은 설교자의 인격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 설교는 말로써 전달되는 것
설교는 설교집으로 활자화되기 이전에 먼저 강단에서 말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이다. 문어가 아닌 구어라는 것이다. 유학 시절 설교학 교수님은 인쇄술이 발달하고 설교가 요약되고 활자로 신문에 실리게 되면서 설교 준비의 형태가 출판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필자의 경우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은혜를 받았는데, 정작 그것을 말로 읽어볼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글로 읽을 때와 말로 들을 때가 다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설교가 전달되는 현장의 청중이다. 책상에 앉아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이 설교가 청중들의 귀에 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묵상된 글의 논리를 말로써 청중들의 귀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쉽고 단순하다는 것이 깊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쉽게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 설교는 정보 중심이 아니라 삶 중심이어야 한다
고급목회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Pastoral Studies)가 설교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많은 평신도들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분석은 많으나 답변이 적습니다.” “수면 위를 날기는 하지만 아무 곳에도 착륙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브루스 윌킨슨은 “당신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당신의 설교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존 스토트는 설교를 “본문에 대한 충실성과 현대세계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때로 신선한 아이디어나 새로운 정보를 던져주는 설교를 뛰어난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설교란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이다. 굉장한 충격과 대단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 설교가 삶을 움직이고 있다면 그 설교는 능력 있는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청중과 호흡해야 한다. 설교자는 사람들의 삶을 탐구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빌 하이벨스나 릭 워렌과 같은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의 필요와 소망, 고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평신도들과 대화의 창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과 같은 소그룹을 통해 성도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 성도들과의 만남의 시간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라. 새들백교회는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 적용에 강조를 둔 설교에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내년 1월에 개최될 설교 세미나는 그런 면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존 브로더스는 설교자를 건축가에 비유했다. 좋은 삶의 패턴들을 습관화함으로 우리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라 장기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설교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 글은 먼저 내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설교는 30분 동안 다른 사람을 잠들게 하는 훌륭한 기술이라고 누군가가 뼈있는 농담을 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설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사람을 살리시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쓰임받는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오늘 작은 하나의 발걸음을 옮긴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설교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