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속 개구리는 결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좁디좁은 우물 속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물 밖으로 나와 넓은 세상을 만나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좁은 곳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자기 한계’라는 굴레 역시 동일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는 데도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 외부의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리더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자기 한계의 예를 성경 속 리더들에게서 찾아보고 그 극복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 중 성경 속 리더에 대한 연구는 곧 출간될 「리더십 바이블」(국제제자훈련원)에서 많은 부분 도움을 얻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 1. ‘합리’이라는 이름의 한계
‘합리(성)’이라는 틀(기준)은 대개의 경우 리더들이 쉽게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이다. 특히 심사숙고가 필요한 어려운 결정이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 속에서 ‘합리’란 틀을 극복하지 못해 어려움을 당한 몇몇의 리더들을 발견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다. 성경은 그를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소개한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 처음부터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이 한번의 그릇된 선택으로 망쳐버렸다는 것이다.
이 불행한 선택은 아브라함의 목동들과 롯의 목동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분쟁의 원인은 그들의 가축 전부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하지 못한 땅 때문이었다. 이 분쟁은 “서로 떼를 나누자”는 아브라함의 제안에 의해 해결된다.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으므로 ‘분리’를 제안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보다 나이도 많고 손위였기에 롯에게 땅 한 쪽을 할당해 줄 수도 있었고 자기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준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선택권이 롯에게 주어진 것이다. 롯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매우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목초가 풍부한 요단 평원을 선택한다.
롯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기준으로 이 선택을 평가하기 이전에, 일차적으로 롯의 이 결정은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기초한 합리적인 판단으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의 선택이 불행의 씨앗이 된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바로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합리’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롯이 내린 선택의 맹점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중요한 기준이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와 함께 하던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 크게 비중을 두지 않은 상태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처럼 ‘합리’라는 기준은 물리적 계량이 가능한 영역에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리’라는 틀은 쉽게 극복하기 힘든 상대이다. 현실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교회 이전이나 개척을 준비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고려되는 기준은 그 곳의 '상주 인구'와 '접근성이 얼마나 용이한가' 이다. 요즘과 같은 형편에서 교회가 위치해야 할 지역의 상황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인 기준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좀 더 본질적인 기준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평깨 57호]에서 이미 소개된 평택 대광교회의 예에서 우리는 ‘합리성’의 한계를 극복한 예를 볼 수 있다.
1983년 8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5명의 성도와 배창돈 전도사로 시작된 평택 대광교회는 교회 개척이나 이전에 있어 남다른 철학이 있다. 평택 대광교회는, 개척 이듬해 야산 중턱 과수원을 매입해 첫 번째 성전을 건축했다. 길도 없고 사람도 드문 곳이었다. 한마디로 교회의 입지조건으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평택 대광교회에게는 최고의 입지조건이었다. 그 동네에는 교회가 없었다. 아니 교회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최근 두 번째 성전이 세워진 곳 역시 비슷한 여건이다.
합리성을 기준으로 평가할 때 최악의 조건이지만 평택 대광교회는 그곳에서 재적 인원 1500여 명에 달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평택, 안성, 송탄 등 인근 지역에서 제자훈련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
이처럼 ‘합리’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나라’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물론 이것이 ‘합리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물리적’ 혹은 ‘상식적’ 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자는 것이다.
▶ 2. ‘원시(遠視)’라는 장애
'원시(遠視)'의 장애를 가진 리더가 의외로 많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 리더십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그 리더는 참 좋은데 참모가 없어.’ 혹은 ‘군계일학이야, 팀이 약해.’라는 평가를 하곤 한다. 성경 속 리더 중에서 야곱에게서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야곱은 굉장히 적극적인 리더십을 가진 리더이다. 자기 방식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을 때면, 언제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묘책을 찾았다. 에서와 이삭 그리고 라반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면, 그의 약삭 빠르고 능숙한 술책을 쉽게 발견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야곱의 공격적인 에너지는 오직 외부세계에서만 발휘된다. 그는 집밖에서는 공격적이었지만, 집 안에서는 수동적이었다. 이런 야곱의 태도 때문에 그의 가정에는 고통과 좌절과 경쟁과 분노와 증오가 늘 자리했다.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난 갈등들을 보면, 외부 세계에는 혼신의 노력을 집중하면서도 조직의 내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소홀한 리더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야곱은 아주 어렵게 자기 가정을 출발했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그를 속여서 첫째 딸과 결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진짜 어려움은 결혼 이후에 시작되었다.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는 아들을 낳은 뒤에 르우벤이라 이름을 지으면서,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라고 생각했다(창 29:32). 레아는 두 번째 아들과 세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덧없는 소망을 표출했다.
라헬은 사랑 받는 아내였다. 그러나 아들들을 낳은 언니 레아에 반해 자기는 수태할 수 없음을 보고 위협을 느꼈다. 라헬이 불편함을 야곱에게 호소하자,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였다(창 30:2). 필사적인 상태가 된 라헬은 자기의 몸종을 야곱에게 주어 그 몸종에게서 야곱의 아들을 얻는다. 라헬은 그 아들의 이름을 단이라 짓고,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창 30:6) 라고 말했다.
빌하가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도 라헬의 반응은 톡 쏘는 것이었다. 그러자 레아도 자기의 몸종을 야곱에게 주었다. 싸움은 극에 달해 마침내 레아가 자기 남편과 하룻밤을 지내기 위하여 라헬에게 값을 지불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야곱이 이런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지를 못했기에, 네 여인들은 끔찍한 상황 가운데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갈등은 열두 아들들 가운데서도 계속되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도 라헬의 첫 아들인 요셉을 공개적으로 편애함으로써 형제들 간에 경쟁과 질시를 부추겼다. 그만큼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증오했다. 게다가 어린 요셉은 순진하게도 뻐기고 다녔고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야곱은 요셉이 그런 행동을 중단시키지 못했고, 형제들의 증오심은 점점 강렬해져서, 요셉을 교묘하게 골탕먹이려던 일이 결국은 노예로 팔아 넘기는 일에 이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동적인 리더는 자기의 조직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에게 그들이 생산하고 있는 일을 넘어서 그들 자체가 조직에 가치를 더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시간을 내지 않는다. 수동적인 리더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고 싶은 마음이 달아나게 만드는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짜 일꾼들이 질투하는 상사나 동료들 때문에 그 조직에서 쫓겨나가고 있어도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한다. 싸우고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것은 그들의 문제니까,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거야”라고 생각하는 리더는 조직이 제대로 기능 할 수 없도록 방치하는 리더이다.
▶ 3. ‘자기 가치’라는 굴레
‘자기 가치’역시 리더들에게는 쉽게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이다. 확고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단점이나 약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갇혀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하고 한가지 기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고질적인 약점일 수밖에 없다.
성경 속에서 이렇게 ‘자기가치’라는 굴레를 극복하지 못해 어려움을 당했던 리더들을 발견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삭’이다. 이삭은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통해 배웠다.
창세기 22장에서 그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고 희생제물을 놓는 번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향해서 칼을 치켜들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일을 멈추게 하셨다. 이삭은 그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의 교훈은 이삭에게서 점차로 사라져 버렸다. 이삭이 자신의 아들들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행하기를 거절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분부하셨다. 그 말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삭에게 에서 대신에 동생인 야곱에게 축복하라고 지시하셨다.
그것은 관행과는 반대였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이 인간의 규범들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명백하게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이삭은 에서를 더 좋아했다(28절). 그래서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파생되는 문제들
이삭의 이러한 결정은 특히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 그 결정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특정하게 분부하신 바와 반대되는 것이다(23절). 둘째, 그의 아내 리브가도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이삭은 자기의 아내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바램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셋째, 에서는 이미 한 그릇의 팥죽에 자기의 장자권을 팔아버림으로써 자기의 무책임함을 드러냈었다(34절).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위대한 언약을 이룰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이삭은 가족의 리더였다. 그러나 '자기 가치'라는 굴레 속에 갇힌 형편없는 리더였다. 이삭과 같은 리더에게서 발견되는 비극들 가운데 한 가지는 그 추종자들에게 파편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삭의 기이한 고집 때문에 가족 안의 모든 사람들은 반생산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브가는 자기가 옳다고 알고 있었던 바를 달성하기 위하여 속임수를 쓰는 책략가가 되었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거짓말을 했으며, 눈먼 자기 부친을 속였다. 에서는 자신의 부주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마땅한 “몫”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왜곡된 가치 감각을 가진 이삭 때문에 책략을 획책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역기능적인 가정이 되어버렸다. 한 인간으로서 이삭은 변함 없이 자기가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을 추구할 수 있겠지만, 자기의 가치들을 조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삭의 이런 실수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삭의 예처럼 왜곡된 자기 가치라는 틀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리더의 편협함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많다. 예를 들면, 급성장 중에 있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열정적인 전도’의 부재이다. 가만히 있어도 교회가 성장하는 데, 굳이 힘을 들여 전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자세를 은연중에 가질 수 있다.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들만 잘 관리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실 전국에 있는 교회들을 살펴보면, 교회가 크든 작든, 거의 매주 새로 등록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렇다면 일 년 후에는 교회가 그만큼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들어오는 수가 많은 만큼 나가는 수도 많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고자 어떤 교회들은 새로 들어온 교인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물 망을 조밀하게 하고, 뒷문을 막는 일에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은 밀려들어온 교인들을 정착시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가르침과 양육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한 재생산도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점에서 여느 조직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몸이 성장하려면 세포들이 원활한 신진대사를 하며, 세포 분열을 통해서 또 다른 세포를 만드는 재생산을 해야 한다. 그럴 때 몸이 건강해 질 수 있고, 정상적으로,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다.
물론 그 동안 한국 교회에 전도를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전도지나 설교 소책자, 설교 테이프, 교회 신문을 이용한 개인 전도로부터 시작해서 총동원 전도주일, 예수 초청 잔치 등과 같은 대중 집회에 이르기까지 전도를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 비해 그 열매는 너무나 초라했다.
전도는 돈만 많이 쏟아 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반짝 세일처럼 요란하게 하고 일회성으로 끝낼 일도 아니다. 전도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힘써야 할 사명이다. 개인적으로도 힘써야 하지만 온 교회가 한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전도에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랑의교회는 개척 이후 줄곧 성장하는 교회였다. 정말 가만히 있어도 성도들이 몰려드는 교회였다. 언제나 부족한 공간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사랑의교회는 1982년이래 지금까지 거의 매년 대각성 전도집회를 가져오고 있다. 이 일을 통해 자칫 빠질 수 있는 영적 함정을 피하고 있다. 영적 재생산의 중요성을 매년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런 헌신을 통해 얻은 열매도 크다. 1980년대 집회들은 그만 두고라도 한국 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집회의 열매만 봐도 그렇다. 1991년도에 열린 집회에서는 615명이 결신했고, 1992년도에 766명, 1996년도에 1,036명, 1997년도에 1,977명이 결신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2,766명이 결신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사랑의교회가 큰 교회이기 때문에 거두게 된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자기 한계’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바라보고 해결해 왔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리더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최선의 것에 부합하도록 자신이 지닌 가치들을 조정하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끌고 있는 조직이 어떤 조직이건 간에, 이삭이나 롯, 야곱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 따르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리더의 자기 한계는 곧 그 조직의 한계가 된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또한 자기 한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리더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해 갈 때 건강하고 균형 잡힌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자기 한계’굴레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영향력 있는 리더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