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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평깨 60 호

주님의 반석 위에 훈련으로 세우는 교회 - 대전 반석위에세운교회

2003년 05월 박순종 목사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목회자이다. 목회자가 어떤 목회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목회의 성패가 좌우된다.

대전 반석위에세운교회를섬기는 김진수 목사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목회자이다.

감옥에서 만난 주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 교회의 장로 집안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청년 시절까지 한번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5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창시절, 그의 마음과 머리에는 온통 ‘민족’에 대한 염원뿐이었다. 독재정권에 의해고통 당하는 민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심하던 ‘애국청년 김진수’는 1974년 동아일보 사건과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두 번째 옥고를 치르면서 그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한번도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의 구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것이다. 5대째 예수 믿는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때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이런 사실을 발견한 이후 그는 줄곧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를 만났다. 이후에는 찬송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 교관들이 문제를피우는 사형수 한 명을 그와 함께 지내도록 했다.

그와 함께 있다 보면 사형수도변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갑자기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사형수에게 그는 복음을 전했고 사형수는 예수를 영접하고 변화되었다.옥고를 치르는 기간이 육체적으로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인생을 새롭게 바꾸는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확실히 경험한 그는 출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감당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초라한 교회를 보며 흘린 눈물
비록 감옥에서였지만,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은 김 목사(당시 전도사)는선배의 권유로 한 교회를 섬기기 위해 난생 처음 대전 땅을 밟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게다가 갓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전도사에게 대전에서의사역은 새로운 기회이자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섬겨야 할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교회 건물. 구석구석 수북히 쌓인 먼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그런 교회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는 초라한, 아니 비참하게까지 보이는 교회를 보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그는 매일 교회에 나와 울면서 기도했다. 교회를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회를 위해울며 기도하는 자신을 향해 돌아온 것은 비난이었다. 평화롭게 잘 있는 교회에 웬소동이냐며, 교회를 분열시키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던 김 목사는 “내 이름에 걸맞은 교회를 세우라”는 주님의 응답을 듣고당시 자신을 돕겠다던 장로 한 분과 함께 그 장로의 집에서 반석위에세운교회를개척했다.

힘들었던 개척 초기
대학 교수이던 그 장로의 힘이 컸다. 그 장로는 정말 엄청나게 사람들을 모아왔다.

개척 첫해 성탄절 예배 때는 무려 92명이 모였다. 하지만 이런 감격도 잠시였다. 개척 2년이 지나자 30여 명 되던 제직들 가운데 20명이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났다. 새로 들어오는 새신자들도 전혀 교회에 정착하지 못했다.뿐만 아니었다. 성도들의 대부분이 그 장로와 관계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담임목회자인 김 목사보다 그 장로의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소신대로 목회를 할 수없었다.

심지어 장로의 반대로 주일 저녁 예배는커녕 새벽 예배와 금요 예배도 드릴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었던 김 목사는 이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실시했다. 성경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장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려면 저와 함께 성경공부하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결국 그 일로 장로가 떠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김 목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자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하지만 무작정 시작한 성경공부는 실패였다. 우여곡절 끝에 1년 과정을 마치자 사람들이 “끝났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다시는 하지 말자”는 말까지 나왔다.물론 사람들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어렵게 했던 것이 실패의 요인이었다.

‘이것도 안되는가?’ 하며 낙심하던 김 목사는 그 다음에는 쉽고 재미있게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새신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목회 전환점, 『평신도를 깨운다』

김 목사는 1987년을 “사역의 분기점”이라 말한다. 그때 만난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접한 『평신도를 깨운다』(옥한흠저)를 읽고 김 목사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충격은 충격에서 끝나지 않고 밤을 새며 그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다섯 번 정독을 하고 난 뒤, 김 목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목회철학에 있어서 몇 가지 새로운 결론을 얻었다.

첫째는 교회론이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전도사 시절, 초라한 교회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자신의 모습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교회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김목사는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성도들을 훈련시켜 작은 예수로 만드는 것이라는사실을 깨달았다.

둘째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목회선배들로부터 “평신도를 키워놓으면 나중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또자신도 경험한 바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교회는 평신도를 ‘책임지는 성도, 능동적인 조력자, 헌신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목사는 이제까지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지식만 전달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처방목회’보다는 ‘예방목회’, ‘보호목회’보다는 ‘훈련목회’의 중요성과 소그룹 사역의 중요성을 발견했다.삶을 변화시키는 제자훈련만이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인한 김 목사는 3명의 여 집사들과 함께 1988년 제1기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당시‘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를 참석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오로지 ‘평신도를 훈련시켜 목회의 동역자로 삼는다’는 목회철학 하나를 붙잡고 시작한 훈련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변화가 일어났다. 김 목사는 “한번도 눈물 없이, 감격 없이 마친 적이 없었다”며 당시의 훈련 상황을 회상한다.

성도들이 세워 가는 교회
2001년, 반석위에세운교회는 아름다운 새 성전을 건축했다. 교회의 영광은 내면과외형이 함께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를 했다. 출석교인 300여 명 남짓의 교회에서 총 공사비 50억은 엄청난 부담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헌신하며 동역한 평신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자반 1기생을 비롯한 평신도들의 헌신은 남달랐다.

김 목사는 “그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나를 위해 목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교회와 목사를 섬기는 동역자들”이라고 소개한다.제자훈련으로 천천히 가더라도 성도들을 반석 위에 서게 만들겠다는 그의 목회철학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김 목사는 오늘에 만족하지 않는다. 훈련목회를 교회 안에 정착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은 약하다고 자평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성도들에게 영적 재생산의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감옥에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진수 목사.


평신도 사역에 대한 새로운 목회철학을 정립한 그가 앞으로 보여줄 힘있고 건강한사역을 기대해 본다.

취재·사진/ 박순종 목사
(국제제자훈련원 지역네트워크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