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병철 목사_ 주향교회
안디옥교회의 특징
초대 교회 중에서 위대한 교회를 꼽으라 하면 안디옥교회를 말할 수 있다. 안디옥교회는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일에 가교 역할을 한 교회로서, 교회사적으로 몹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회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 사람’(One New Man)이 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안디옥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한 놀라운 교회다.
또한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한 교회다. 나아가 1세기 당시 주님의 뜻을 가장 잘 받들어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 교회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된 안디옥교회
첫째, 안디옥교회는 유명한 사람들이 아닌 무명(無名)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 구브로나 구레네는 지명(地名)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명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아니다. 소수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주 예수를 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교회를 세웠다.
둘째,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환난을 피해 안디옥으로 간 사람들이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환난을 당하자 안디옥이란 지역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을 전해 교회를 세웠다.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타지에 정착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먹고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했는데,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당한 환난을 도리어 영적으로 승화시켜 복음을 전함으로써 안디옥교회를 세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무명의 소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음에도, 유대 민족주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디옥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하나가 되는 ‘한 새 사람’(One New Man) 교회였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 이 장벽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 ‘막힌 담’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엡 2:14). 그런데 소수의 무명 그리스도인들이 이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된 교회를 세웠다. 그 시대의 장벽이 소수의 무명 그리스도인들의 도전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왜 환난을 피해 안디옥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를 전파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전도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주 예수를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이었기에 복음을 전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준다
동·서독이 통일됐을 당시 한 일화가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동·서독 인근 마을이 서로 교류하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동독 쪽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서독 쪽에 있는 마을에 자꾸 쓰레기를 몰래 갖다 버리는 것이었다. 서독 마을에 있던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일에 대해 몇 번이고 항의를 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서독 마을 주민들은 고민 끝에 의견을 모아 동독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릴 만한 곳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가져다 뒀다. 생필품을 가져다 놓으면서 그곳에 이런 푯말을 붙여 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준다!” 그다음부터 동독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쓰레기를 그곳에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주게 돼 있다.
쓰레기를 가진 사람은 쓰레기를 준다. 빵을 가진 사람을 빵을 준다. 돈은 가진 사람은 돈을 준다. 사랑을 가진 사람은 사랑을 준다.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줄 수 없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파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분을 전해 줄 수 없다. 환난을 당해 피난을 가고, 무명의 소수였으며, 시대의 장벽이 아무리 강력하게 가로막고 있어도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주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것이 곧 그들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가는 무엇을 전하며 살 수 있는가와 연결된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눠 말한다. 전반부에서는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말하며, 후반부에서는 그 정체성이 어떤 역할을 위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인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두 가지 면에서 균형을 이뤄야 한다. 택함받은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 즉, 예수의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정체성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그 정체성이 갖는 역할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 즉 예배는 많이 드리지만 실제로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일에는 미흡하다. 이는 성도로서 균형을 잃은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그 답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 이전과 이후의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복음으로 무장되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몇 차례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순간에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회복시켜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직접 주옥 같은 말씀을 현장에서 들은 사람들이다. 기적과 이적도 체험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족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말씀으로 회복시키셨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에 뜨거워짐을 느꼈다(눅 24:32).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직접 말씀해 주셨다. 제자들을 다시 말씀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중적인 말씀 공부는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에서 빛이 났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을 향해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위기를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전환시킨다. 그는 급작스럽게 시작한 첫 번째 설교에서 자신들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전한다. 그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논리정연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위기의 상황을 역전시켰다.
이런 모습을 보면 베드로는 더 이상 무식한 어부가 아니다. 말씀에 대한 비약적인 성장으로 급작스러운 위기 상황을 역전시킨 말씀의 사람이다. 당시 종교적으로 구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구약을 인용해 말씀을 전파해 3천 명이나 되는 무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한 것은 말씀에 대한 그의 능숙함이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탁월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철저하게 무장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할 수 없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전하지 못하는가? 예수님을 빈약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 3:15)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고 제대로 전하기도 어렵다.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만이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복음으로 무장돼야 한다.
성령의 충만한 기름 부음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고 하셨다. 제자들이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 직전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고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직접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어도 제자들은 아직 완전히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성령강림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 및 12명의 성도들은 10일 동안 마음을 다해 기도에 힘쓰면서 기다렸다. 모든 일을 내려놓고 기도에 전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를 위시한 제자들과 성도들은 기도에 전념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바람소리와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각 사람에게 임하셨다. 그 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됐다(행 1:8).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요행이 아니다. 우연히 만나는 횡재도 아니다. 성령님은 아무 노력 없이 그냥 배달되는 택배로 전해지지 않았다. 치열한 말씀 공부와 누적된 기도의 삶에 대한 순종이 담보가 돼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전파하게 하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이 임해야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 예수님을 쉽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내가 믿은 예수님을 간증하며 간단하게 4영리 차원에서 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이 땅에서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데, 그 소식을 잘못 전하거나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데 논리적으로 빈약하거나 감정적으로 메마른 상태에서 전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제자들에게 치열한 말씀 공부와 뜨겁고 간절한 기도의 삶이 누적됐을 때에 성령님이 강림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전하기 전에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내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다. 미혹과 혼란이 판을 치는 시대에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와 부활의 영광을 전하는 삶은 가장 가치 있는 삶이다. 그것은 이 세상 어떤 일보다 소중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서 살든지 구원의 주이시며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마 6:33).
이병철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사랑의교회에서 화천군 농촌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했다. 춘천에서 주향교회를 개척해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강원 CAL-NET 총무로도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