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기혁 목사_ 대전새중앙교회
오래전의 한 방송 프로그램 중 아직도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노부부가 출연해 제시된 단어를 설명해 알아맞히는 게임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주어진 단어는 ‘천생연분’이었다. 할아버지가 이 단어를 “임자와 나와의 관계”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할머니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웬수”였고, 다시 “아니 4글자!”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할머니는 거침없이 “평생 웬수”라고 답했다. 천진스러운 노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장대소하는 사이, 덜컥 두려움이 스친다. 내가 느끼는 것과 상대방이 지각하는 것이 이렇듯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너와 동행한 적이 없다”라고 하신다면 이 무서운 괴리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행이란, 함께 여행하는 나그네임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과연 ‘동행 의식’과 일치하는가?
나는 인생 나그넷길에서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영적 순례의 길을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 과연 죄인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 그분과의 동행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동행의 주체가 내게 있다면 능동적이지만, 동행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다면 수동적이지 않을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장애물은 없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무엇이 다른가?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혹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다. 어떻게 표현하든 의미의 큰 차이는 없다. 에덴동산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죄인인 인간에게는 본능적 허탈감과 소외감, 공허감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 탕약 수건을 아무리 비틀어 짠다고 해도 허탄한 것들로 채워진 그것에서는 국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원초적 죄인이기 때문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일이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절대자에게로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인간의 영원한 공허감은 텅 빈 절대 공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물며 ‘어둠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가 빛의 근본이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없다. 더구나 죄인인 내가 감히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객이 뒤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동행은 그야말로 환희에 찬 눈부신 은총이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어디서부터 풀어 가야 하는가다. 인간 이해로부터 출발하면 소위 ‘인권우선주의’에 가려져서 인간 본연의 죄악성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자기 주도적 사고는 인간 스스로를 역사의 중심에 세우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선택과 결정의 주도권을 내가 거머쥐고 스스로 주연 배우가 된다. 하나님은 그저 필요할 때 살짝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행인 1, 2, 3’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역사의 총감독과 주연은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조연에 불과하다.
내 생각 중심의 착시 현상을 극복하라
예수께서 열두 살 됐을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유월절을 마치고 부모는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길을 떠났다(눅 2:44). 하지만 하루 뒤에 만난 예수는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토론 중이었다. 동행 중에 있다고 생각한 착시 현상이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마음을 유린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삿 16:20) 장담했지만 결과는 비극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착시 현상에 속고 있는지 다 알 수 없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라는 자기중심적 인식이 착시 현상의 주범이다.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스펙으로 증명하려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착시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내 생각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어마무시한 착각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더 늦기 전에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숫자 놀음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신다(고전 10:5). ‘주여 주여’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현란한 언어유희에 흔들리지 않으신다(사 29:13; 마 7:22).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치는 고함 소리에 현혹되지도 않으신다(계 3:1, 17).
착시 현상은 일시적인 엔돌핀을 생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참혹한 자신의 상태를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감출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치명적인 전자파 교란으로 심각한 장애를 일으킨다. 아담과 하와를 교란시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정보를 잃어버리고, 사탄의 거짓 정보에 휘둘리게 만들었던 에덴에서의 착시 현상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라는 확신은 모든 것이 해결되게 하는 만능 암호문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간절함은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지만, 동행의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다. 아모스 선지자는 ‘뜻이 같아야’ 함께할 수 있다는 동행의 원리를 선언했다(암 3:3). 서로의 생각이 다른데 어찌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사람과 어떻게 동행이 이뤄질 수 있을까. 최소한 자기 고집이나 아집부터 포기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을 고집하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아무리 최신 논리를 개발하고 강력한 설득력을 장착했더라도 죄인의 본질을 벗지 못하는 한, 잡스러운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자아도취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착시 현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겸손으로 위장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정직하게 고백하자. 표현된 언어에는 겸손이 묻어 있는데, 내 마음에는 뽑을 수 없는 자만의 철심이 박혀 있지는 않은가? 시온 성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너를 몰라” 이 한마디면 모든 착시 현상은 공허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착시 현상이 일반적이라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여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진리는 다수의 의견에 의해 선택되지 않는다. 진리는 누구의 동의나 의결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우리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진리다. 제자훈련은 왜곡된 착시 현상의 근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제자훈련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생활 속에서 일치하도록 반복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이 현실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소박한 삶의 모퉁이에서조차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울림이 없다면 내가 정말 살아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만 해도 가슴 속에 울림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과의 동행에 울림이 없을 수 있는가?
은혜에 중독되라
하나님과의 동행은 은혜로만 이뤄진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 곁으로 다가오셔서 동행해 주시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훨씬 전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 수없이 약속하셨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심판대 앞에 서는 것조차 오금이 저린 죄인이 아니던가. 하나님과 원수 된 신분이 아니던가.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수 없는 탕아(蕩兒)였지 않은가. 그런데 우주의 쓰레기보다 더 더러운 나를 찾아 주셨고,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나를 불러 주셨고, 하나님에 대한 존재 의식이 있기도 전에 나를 선택해 주신 이 은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더러운 입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구원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그렁거린다. 은혜는 은혜를 부른다. 은혜를 깨달으면 더욱 은혜에 목마르게 된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만 접속되면 걷잡을 수 없이 은혜에 휘말린다. 은혜는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한번 은혜에 맛들이면 놓칠 수 없다. 죽음의 문턱을 넘으면서도 은혜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은혜의 속성이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났다고 누굴 비판하고 비난할 것인가?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 놓고 은혜의 막차를 겨우 얻어 탄 느낌인데, 누굴 탓하겠는가?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해 흐르는 눈물을 훔치기에도 모자라는데, 무엇을 더 요구하겠는가? 나와 동행해 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또 어디 있는가! 나같이 냄새나고 못난 죄인과 동행해 주신다는 말만 들어도 송구스럽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베드로의 고백에 적극 공감한다.
지금도 주님의 제단 앞에 엎드려 오열하며 흐느낀다. “주님, 차라리 나를 떠나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냥 이대로 버려두세요, 주님. 왜 나 같은 무녀리를 목사로 부르셨습니까? 주님의 말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해 장애가 내게 있습니다. 나 때문에 주님의 명예가 더럽혀질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려면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실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입는 나야 더없이 행복하고 즐겁지만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무엇을 얻어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그동안 받은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런데 무엇을 더 요구하거나 원할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 없는 동행은 없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태도를 가져야 할 뿐이다.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이 옳을 것이라는 고집을 버리자.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 중 두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상식적 사고에 갇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슬픈 얼굴빛을 띠고 힘없이 하향 길에 올랐다. 그때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눅 24:15~16).
십자가 사건의 후유증은 역사적 부활까지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해 불감증에 감염된 것이다. 십자가는 동행 허가증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적 영역을 뛰어넘는다. 십자가를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이라거나, 죄인을 응징하는 도구로만 바라본다면 역사의 심장은 그 자리에서 멎어 버린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모습과 더불어 흉악하고 더러운 죄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이 클로즈업돼야 한다. 거기에 화목의 은혜가 머문다.
화해가 없는 동행은 온전한 동행이 아니다. 갈등과 적대감을 키울 뿐이다. 십자가는 날마다 나는 죽는다고 선언했던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에,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는 동행 역사의 궤적을 남기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영적 본능이 되살아난다. 나를 돋보이고 싶어지는 자존감은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님으로 다시 사는 아름다운 흔적을 추구하라.
십자가 앞에서 철저하게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질긴 풀뿌리를 잡을 수 없다. 나를 부인하고 죽이는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필요한 기본이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알 것이다.
주님의 뒤를 따르라. 감히 주님께 내 뒤를 따르라고 명령하지 말라.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지 않고 따를 만큼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누구의 뒤를 따른다는 말은 삼가라. 왜 가야 하느냐고 묻고 싶다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생각은 애당초 그만 두라. 내게 생명 주신 주님이시다. 주님을 신뢰하라. 그래야 동행의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피로 범벅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온 영혼으로 들어 보자. 내 영혼에 은혜의 전율이 덮쳐오는 것을 느껴 보자. 2017년의 끝자락에 걸터앉은 태양을 바라보며, 변함없이 안겨 주실 2018년의 하루하루에 오롯이 동행의 흔적을 남겨 보자.
이기혁 목사는 총회 개혁신학연구원과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풀러신학교(D. Min.)를 졸업하고, 사우스웨스턴 신학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대전지역 CAL-NET 대표, 학원복음화협의회 충청 대전 지역 공동대표, 대전새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