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장관익 목사_ 전주사랑의교회
예배,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신 이유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께서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목적으로 교회를 만드셔서 세상에 두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해 교회를 세상에 두신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행하신 사역, 즉 창조와 구속을 찬양하고 그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앞에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다. 그래서 예배는 교회가 누리는 가장 아름다운 특권이요,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교회다운 영성이 회복돼 예배가 살아 있을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우리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고 예배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자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자신의 인격과 삶의 변화를 맛보며, 소명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을 살려고 하는 자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예배는 산 예배, 능력 있는 예배가 될 것이다.
현대 교회의 예배에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양상은 좋은 예배자로 훈련된 자의 비율이 전체 예배자의 수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이다. 이는 ‘자기중심적 예배’라는 병폐를 가져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나오는 예배, 인스턴트식 순간적 감정 충족을 위한 예배, 못 이룬 욕망과 소원을 갈망하는 예배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는 ‘예배는 그 자체 안에서만 목적을 가진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예배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그분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예배의 목적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하라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릴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즐거운 찬송이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우러러볼 때 그분의 이름을 높이지 않을 수 없기에,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솟구쳐 흐르는 찬송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경배가 있다.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고 선한 목자가 되신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삶이 주어졌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손을 높이 들고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높이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 안에 이런 진정한 예배가 회복돼야 한다.
우리는 예배의 형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예배와 달리 어떤 형식이나 전통에 굳어진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 않고, 교회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요 4:23~24)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여기에서 ‘신령한 예배’는 영적인 예배를 말한다.
신령한 예배는 장소나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의 산당이 이제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신다.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이 예배하는 곳이요, 그들이 드리는 찬송과 기도, 예물과 말씀 및 성도의 교제가 모두 신령한 예배가 된다.
‘진정으로 ’는 진리로, 즉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예배를 드리면 우상과 미신 숭배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삶이 곧 예배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즉 우리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몸을 바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충성하고, 몸을 움직여서 일하는 현장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도록 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생활 속에서 전인격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교회가 정한 시간을 따라 한자리에 모여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중예배가 다른 예배와 달리 특별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교회의 심장, 공중예배
고(故) 옥한흠 목사님은 시편 95편 설교를 통해 공중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로 공중예배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주는 첫 이미지다. 교회가 무엇이냐고 세상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예배드리는 곳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교인들이 주일마다 드나드는 어떤 장소를 가리켜 교회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의미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다. 더 깊은 차원이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은 잘 모른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등한히 해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한낱 형체 없는 이미지로 남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형체가 없는 것은 실체로 통하지 않는다.
둘째로 공중예배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임재하시는 예배다. 다른 예배보다도 공중예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적어도 두 군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장면과 오순절 성령이 예루살렘교회 위에 임하신 사건이다. 둘 다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이 있는데, 그날이 주일이었다는 것과, 성도(제자)들이 다 함께 모여 있는 자리였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미뤄 보아 하나님께서 공중예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일은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날이요, 전 교회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날이다.
한편, 공중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기회가 된다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지 내 머리는 아니다.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예배는 교회적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군천사의 찬양을 받으시고, 14만 4천의 노래를 받으신다고 했다. 어느 한 개인의 찬양과 경배만을 받으시는 분으로는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전 교회가 모인 자리를 더 없이 기쁘게 여기시고 축복하시며,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셋째로 공중예배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다. 말씀을 선포한다는 말은 설교한다는 말이다. 설교는 선포다. 듣든지 말든지, 동의하든지 말든지 하나님께서 설교자라는 전달자를 통해 모든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행위다. 그러므로 청중은 설교를 어떤 개인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께서 듣는 각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실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심령의 변화가 일어난다.
넷째로 공중예배는 교회의 심장이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은 공중예배에서 흘러나온다. 공중예배가 중단되면 교회는 병이 들거나 죽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심장에 비유한 것이다. 생명체가 심장의 박동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듯이, 주일학교에서부터 소그룹 다락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이 공중예배라는 심장에서부터 계속해서 새 피를 공급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배당이 아닌 예배다
최근 교회의 심장처럼 중요한 공중예배가 맞닥뜨린 유혹은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 교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예배는 복음주의 시대를 거처 마치 구약시대 예배로의 회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예배는 점점 형식화돼 가고 있고, 예전은 구약 시대 혹은 예전을 중요시 여기는 로마 가톨릭을 닮아 가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분위기와 문화에 민감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영향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복음주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예전은 시끄럽고 좀 저속하며 가볍다고 생각해, 예배를 이끌어 가는 교역자의 복장이나 찬양대, 성찬식과 세례식, 예배당 장식과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예전을 중요시하는 가톨릭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향해서 “목회자는 주의 종이다. 주의 종은 구약시대 제사장들과 같다. 제사장인 주의 종들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일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아직도 예배당을 성전으로 생각해 거룩하게 장식하고 분위기를 만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계속해서 이렇게 하다 보면 목회자는 마치 구약이 제사장처럼 되고, 중세시대 평신도와 구별된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처럼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그 역할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예배당은 더 화려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환경에 집중하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예배와 예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
나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40대 중반까지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많은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누렸다. 지금도 옥 목사님께서 뜨겁게 찬송을 인도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어떤 때는 마이크를 들고 회중석으로 내려와서 손을 높이 들고 찬양을 인도하시면서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매주 부르는 주기도문송의 감격, 성찬식 때는 성찬식에 맞는 찬양을 부르며 온 성도를 십자가로 이끄는 회개와 감동의 시간, 특히 ‘성찬을 위한 공동체 고백’도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 되시며 만유의 주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떡을 받을 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찢기신 주님의 거룩한 몸을 생각하고, 우리가 잔을 받을 때 우리의 더러움을 씻기시는 주님의 거룩한 보혈을 기억하며, 그 영적 임재와 은혜에 동참하게 됨을 믿습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나누는 성찬에 참여하오니,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마음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찬 가운에 임재하여 주셔서 주님의 은혜로 덮어주시고 만나주시고 다스려 주옵소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특별히 세례식 장면은 정말 큰 은혜였다. 남녀 한 사람씩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는지를 간증하고 고백할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고, 주님께 돌아온 형제자매들을 위해 한마음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했다.
예배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찬양하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게 하자. 비록 세상 앞에 시끄럽고 천박하고 무식하게 보여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찬양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고백하는 예배가 되자. 지금까지 복음주의 교회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복음의 감격과 은혜가 만들어 내는 예배, 오직 하나님 중심의 예배와 예전,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예배의 감격과 기쁨,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길 바란다.
장관익 목사는 전남대학교 법과대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11년간 부교역자로 섬겼고, 미국 풀러신학교 목회학 박사학위(D.Min.)를 받았다. 현재 전북 CAL-NET 대표와 전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