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옥한흠 목사
설교자의 리더십, 설교 청중을 통해 평가받는다
이 글은 2003년 2월 18일 수영로교회에서 개최된 교회갱신협의회 목회자세미나에서
옥한흠 목사의 <설교와 리더십>이라는 주제 강의를 대폭 요약한 것이다.
설교자와 리더십. 제목은 거창하지만 나는 이런 영역에서 전문가가 아니다. 교회 안팎에서 리더십 연구가 참 활발하다. 그래서 국가와 기업, 심지어 교회까지 어떤 지도자가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인도하느냐에 따라 그 조직원의 생명까지 좌우된다. 한마디로 리더십에 따라 그 조직의 성패가 좌우된다. 좋은 리더십을 가졌는가? 거기에는 햇살이 비춰진다. 나쁜 리더십을 가졌는가? 거기에는 그늘이 드리운다. 좋은 리더십을 갖고 있으면 그 교회는 생명이 살아난다. 좋은 리더십이 안 되면 교회의 생명은 죽게 된다.
목회자, 리더십을 지닌 강력한 자리
리더십을 갖고 있는 리더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냉혹해지고 있다. 어떤 창업주가 끝까지 눌러 앉아 있는 회사 같으면 사정이 다르지만,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는 기업은 얼마나 냉혹한지 모른다. 만약 전문 경영인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면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정없이 내친다. 책임을 묻는 면에서도 엄격하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들이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못 견뎌 한다. 결국 중도하차 시키고, 리더십을 교체해 버린다. 이런 추세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을 갈고 닦으며, 교회 지도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옛날처럼 기도만 많이 하거나 이벤트를 자주 연다고 리더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존 맥스웰은 리더십을 ‘영향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리더십이 영향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영향력이 좋으면 리더십이 좋은 것이고, 영향력이 없으면 리더십이 약한 것이다. 나는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리더십을 영향력이라고 정의했을 때, 목회자만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목회자야말로 한정된 자기 교인들에게 가장 정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강력한 도구를 갖고 있다.
전도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면 영적으로 부자관계가 맺어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그 목회자가 전도 받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흔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또 어떤 교인을 양육했다면, 양육자와 피 양육자의 관계는 엄청난 영적 깊이를 갖게 된다. 또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한다면 그 관계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목회자가 몇몇 사람들을 1~2년 동안 훈련시켜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켰다면, 그 목회자와 훈련생의 관계는 엄청난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만큼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입지에 서 있는 사람도 드물다.
설교, 영향력을 가장 크게 펼치는 채널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가장 잘 행사할 수 있는 채널은 바로 설교다. 설교는 교인들의 의식세계와 영적 세계, 심지어 교인들의 사생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설교는 굉장히 중요하다.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서고, 설교와 함께 쓰러진다. 그만큼 설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채널이다.
설교자는 가장 확실한 리더다. 목회자는 일주일에 몇 번 설교를 하는가? 교회마다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2번에서 4번까지 설교를 한다. 그러면 목회자의 설교를 한 사람이 일주일에 2~4번씩 1년을 듣고, 10년이나 20년을 계속 들으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은 한 사람의 설교를 계속 듣게 된다. 그 사람에게 목회자가 미치는 영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설교는 목회자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목회자의 영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정확한 데이터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설교 청중’이다. 설교 청중은 목회자의 리더십에 대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현장이다. 목회자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적당히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목회자가 어떤 리더십을 갖고 있느냐는 설교 청중을 보면 정확하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는 숨길 수도 없고, 숨을 데도 없다.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반면 설교는 주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하며, 기쁜 사역 중 하나다. 미국의 유수한 잡지 중 하나인 <프리칭>(Preaching)은 지난 천 년 사이에 배출된 설교자 중에서 최고 설교자 10명을 선정했다. 그 10명 중 한 명이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미국의 설교자다. 그는 “설교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나를 부르셨으면, 설교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설교자가 자기 일을 철저하게 즐기는 것이 성공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설교를 즐기면 즐길수록 설교를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 들어야 할 최선의 설교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좋은 설교자는 자신의 일을 철저하게 즐긴다는 의미이다. 설교를 즐기면 즐길수록 설교를 더 잘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또 진짜 잘하는 설교는 우리의 미래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설교자의 설교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말에 나는 굉장히 공감하며, 하나님 앞에 설교자로 세워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 우리는 다 부족한 질그릇인데, 설교라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데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 사역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가져야 한다. 내가 비록 50명을 앉혀놓고 평생 설교하다가 끝이 나더라도, 설교 그 자체는 청중의 숫자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설교 자체가 갖고 있는 가치와 영권, 그리고 설교의 능력 때문에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설교 안에는 감격의 눈물이 담겨 있다.
설교가 즐겁다, 과연 즐거울 수만 있을까?
그런데 고민이 하나 있다. 설교자로서 항상 설교를 즐길 수 있을까? 그런데 가끔 나는 설교를 진짜 즐기면서 하는 목회자들도 보게 된다. 설교를 즐기니까 설교도 잘 한다. 설교를 잘하니까 꽤 큰 교회를 목회하게 된다.
그런 목회자들은 강단에 안 올라가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강단에 올라가 설교 한번 하면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 강단에 올라가 액션을 한번 휘두르면서 땀이 뻘뻘 나도록 설교하면, 운동기구에서 1시간 뛰는 것보다 더 좋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설교하는 것이 스트레스 풀려서 좋고, 건강관리 잘돼서 좋고, 스스로 즐기기 때문에 좋다. 또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말해주니 기분 또한 좋다.
이런 설교자들은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가 꼭 그렇게 즐거울 수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목회자라면 누구나 경험적으로 잘 알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나 요한 웨슬레처럼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설교라면 진짜 기쁜 사역이 될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인데,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설교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두 가지 목적이 나온다. 하나는 믿지 않는 자에게 구원의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해 말씀을 주셨다고 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셨다는 말이다. 설교의 기능이 복음만 전하는 데 있다면 정말로 즐길 수 있고, 설교를 할 때마다 영혼을 구원하는 감격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주신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 온전해지도록 돕기 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설교는 조언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는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복음을 전하는 쪽보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데 설교의 비중이 좀 더 가까이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설교의 주 목적 80%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쪽에 가 있어야 하고, 나머지 20%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80%는 예수 믿고 돌아온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삶과 인격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교훈하고, 책망해야 한다. 잘못된 것은 고쳐줘야 하고, 의로 교육하는 높은 수준에까지 끌어올려줘야 한다. 설교의 목적이 이렇다면 과연 즐거울 수만 있겠는가. 책망을 하는데,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는데 과연 즐거울 수만 있을까?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는 새 생명을 얻은 해산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양육의 수고가 뒤따르고, 양육의 눈물이 뒤따른다. 설교도 똑같다.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립스 브룩스가 ‘설교를 즐겨라’고 했지만, 사실 그 자신도 설교를 많이 즐기지는 못했다. 즐기라고 말한 것은 다른 차원인 것 같다. 만약 설교를 하다 죽거나 평생 가난하게 살더라도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맡기신 영광스러운 사역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교, 그 자체가 좋아 즐거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설교는 눈물과 고통이 뒤따르는 사역이다.
‘설교 청중’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는가?
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더 고민이 많아지고 겁이 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을 빌려보자. 루터는 사역 초기부터 1546년에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설교했다. 그는 34년 동안 약 4천 번 이상의 설교를 했다. 심지어 건강이 좋지 못해 어려움을 당하던 해에도 200번 이상 설교했다. 그런데 그가 설교하는 것을 항상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설교자로서 리더십을 펼치는 것은 값을 적당히 지불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루터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내가 선한 양심을 지닐 수만 있다면, 나는 설교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참 묘한 말도 했다. “저주 받은 악마가 설교자가 되어야지, 선한 사람은 결코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오해할 수도 있는 말이다.
이렇게 루터가 소명 받은 자답지 못한 소리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자기 설교를 오래 들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여전히 생기를 잃고 있으며, 불신자와 별로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때는 노골적으로 교인들에게 말하며, 한동안 설교를 중단한 적도 있었다. “설교를 들었으면 들은 표가 나야 될 텐데, 교인들에게 표가 안 나는 거예요. 듣기만 들었지, 삶의 어떤 변화가 안 보이는 거예요.”
안타까운 점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루터와 같이 이런 고뇌를 할 수 있는 양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며, 설교도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내 설교가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인사말에 놀아나면 안 된다. 그것은 상투적인 말이다. 그리고 가만히 교회에서 보면,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항상 그런 말이 입에 붙은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설교 청중의 변화다.
설교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성도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인격과 행실로 계속 변화되고 있느냐? 그래서 그 사람이 교훈을 받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진정 회개했는가? 그 사람의 모든 사고가 기독교적인 사고로 재조정되고 있는가? 삶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처신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설교를 통해 이런 것을 읽어야 한다. 이게 변화이며, 영향력이다.
루터는 자신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절망했다. 설교자는 말씀을 가지고 책망을 해야 한다. 바르게 되도록 잘못된 것은 고쳐줘야 된다. 여기에 어떻게 목회자로서 고민이 없겠는가?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변화된 증거들이 나타나야, 영향력이 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목회자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참 어렵게 되는 것이다.
자기 설교에 책임지는 설교자
그래서 설교자는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 경우 지난 25년 동안 예배시간에 청중들이 설교를 잘 듣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들어주는 것이지, 듣는 것이 아니었다. 설교자는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들어주는 것이다.
미국의 GE 전 부회장이었던 래리 보시디는 “당신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으면 당신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고 말했다. 즉 어떤 사람의 리더십을 보고 싶으면, 그 사람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의 리더십은 교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설교의 능력은 내용보다 청중의 반응과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설교자로서 위기를 맞고 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절박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신자와 불신자의 삶에 별 차이가 없다. 한 사람이 새벽기도 설교까지 포함해 일주일에 10번 이상의 설교를 듣는데도,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별 차이가 없다.
설교를 많이 들은 성도들이 사회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되는데, 거꾸로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이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설교를 듣고 무엇을 하느냐 하고 물으면,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설교 갱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목회자가 안 되었더라면 무슨 재주로 사랑의교회를 통해 25년 동안 수많은 열매들을 볼 수 있겠는가? 1년에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랑의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제자훈련을 받고, 그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었다.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기 직전에 치유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심어주었다. 내가 목사가 안 되었더라면, 무슨 일을 가지고 이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자녀들에게는 목회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설교 때문이다. 설교는 진짜 못할 일이다. 내가 설교를 하면 내가 살아야 된다. 말하는 것만큼 책임을 져야 된다. 남에게 가르치는 것만큼 나를 먼저 가르쳐야 된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이런 일은 진짜 할 짓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제일 부끄러울 때는 아내가 볼 때다. 주일예배에 사모가 앉아 내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완벽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자기 설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설교가라는 직업의식을 버리라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진짜 영향력을 끼치려면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직업의식을 버려야 한다. 설교라는 것을 직업의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직업적인 설교자는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가를 묻는다.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했느냐를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고 만족해한다. 그러나 소명적인 설교자는 내 설교자가 얼마나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직업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설교를 통해 나타날 결과나 열매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설교 잘했다고 하는 평가만 들으면 그만이다. 설교를 잘한 것과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갱신하기 원한다면 ‘설교갱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하는 설교자의 의식이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목사가 직업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직업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하고, 먹고 사니까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직을 봉사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옛날이야기다. 그렇지만 아무리 목사가 직업처럼 보여도 설교자로서의 입장을 직업처럼 보면 안 된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까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는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명자로서 설교하는 사람은 설교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열매 맺는 영향을 주었느냐를 가지고 고민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내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백 마디 말을 해도, 성도들에게 어떤 변화나 열매가 안 보이면 그 말은 과장된 말일 뿐이다. 이게 소명 받은 설교자의 자세다.
둘째, 자신에게 먼저 설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설교를 하는 목회자나 듣는 교인들이나 이 문제가 항상 걸림돌이 된다. 설교는 영원한 진리를 불완전한 인격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인격이라는 이 질그릇으로 인해 설교가 장애를 받는다. 그 장애 가운데 가장 심각한 장애는 자신에게 설교하지 않고, 남에게만 설교하기가 쉽다는 점이다. 이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책망 받은 내용이다. 자신은 말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입장에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럼 점에서 설교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
소천한 고려대학교 교수인 김인수 박사가 있다. 그는 OMF 이사장을 맡으면서 외국에 강연이 있으면 꼭 가까운 OMF 선교사가 일하는 사역지를 들러 2~3일을 같이 지내며 기도해주고, 격려해준 후 집으로 돌아온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홍정길 목사가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입양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입양을 잘 하지 않는데, 이것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진짜 이웃을 사랑한다면, 부모 없는 핏덩이들을 우리 자녀로 받아 키우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런데 김인수 박사 부부가 일주일 후 조그마한 아기를 안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 집에는 이미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홍 목사가 물었단다. 그랬더니 그가 “목사님이 지난주 하신 설교 말씀대로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딸아이 하나를 입양했습니다”라고 답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목사를 정면으로 치는 답변이다. 그래서 홍 목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왜? 자신은 입양을 하라고 설교했지만 정작 못했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먼저 가르치고 전하라
설교는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설교 경력이 쌓이다 보면 설교 준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써놓은 글을 지울 때가 많다. “나도 감당 못할 소리를 아무리 성경 말씀이지만, 설교라고 무조건 말을 해도 되겠는가? 이것 좀 지우자.” 그런데 이것은 100% 옳은 태도가 아니다. 100% 옳은 태도는 아니지만 바람직한 태도라고는 할 수 있다.
내가 옳은 태도와 바람직한 태도를 구별하는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왜 옳은 태도가 아니냐 하면 하나님이 가르치고 전하라고 하셨으니까, 내가 비록 지키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전해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게 설교자의 사명이다. 만약 내가 지키고, 순종하는 것만큼 그 테두리 안에서만 전한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 전체의 1/10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게 정확한 답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키든, 지키지 못하든 간에 나는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지만 나 자신에게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 그러나 마냥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가르치면, 결국 나 자신도 관계없는 말씀을 그냥 설교라는 틀에다가 넣어 아무 생각 없이 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먼저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태도다.
오늘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문제점이 있다면, 설교가 설교로서 끝나버리는 데 있다. 무책임한 말을 너무 많이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듣는 사람도 설교니까 듣는 것이지, 그 설교를 들은 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하고 되묻는다면 무책임한 설교가 된다. 설교를 들은 것뿐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영향력은 점점 왜소해지고, 설교는 많은데 청중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오늘날의 설교자가 놓이게 되었다.
설교자는 실탄과 같은 설교를 해야 한다
또 하나 설교자가 노력해야 할 점은 ‘들리는 설교’를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들리는 설교가 있고, 들리지 않는 설교가 있다. 억지로 들어주는 설교는 들리지 않는 설교다. 안 들으려고 하는데도 귀에 들어오는 설교는 들리는 설교다. 어렸을 때 들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들었다. 어린시절 보았던 목회자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해 강대상에 올라와 성경을 펴놓고 계속 기도하고 묵상했다. 어떤 때는 금식하면서 토요일을 넘기고, 주일날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봤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들리는 설교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굉장히 순박한 스타일이었다. 이런 자세가 먹혀들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만 강조하고, 준비를 잘 하지 않는다. 준비만 강조하고 은혜를 모르는 것도 큰 병이지만, 은혜만 알고 설교 준비를 등한시하는 것도 문제다. 하나님께서는 둘 다 주셨다. 들리는 설교는 시대마다 다르다. 농사짓던 사람들의 귀에 들리는 설교가 있고, 못 배운 사람에게 들리는 설교가 있다. 또 유식한 사람들에게 들리는 설교도 있고, 오프라인 시대에 들리는 설교가 온라인 시대에는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는 설교가 디지털 시대에는 맥을 못 출 수도 있다.
이것은 청중이 변한다는 의미이다. 말씀과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진리를 포장해야 되는 포장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대한 선배들이 가르쳐준 대로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과 감동이 있으면 그 설교는 귀에 들어가고, 영혼을 꿰뚫으며, 영혼의 귀를 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기본이며, 은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쳐주지 아니한 부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 목사님 맨날 설교 시작하면 저런 예화를 하나씩 하지. 다음에 또 나올 거야’ 하면 설교는 끝나는 것이다. 어느새 교인들은 도사들이 다 돼버렸다. 그냥 들어주는 설교에 익숙하다. 솔직히 교인들에게 들리는 설교는 몇 편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설교자들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정보문화가 발전해 자극적인 것을 많이 듣다 보니, 이제는 웬만한 설교로는 감동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둔감해졌고, 어떤 면에는 귀가 막혔다. 이런 청중을 앞에 놓고, 설교자는 설교를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설교는 ‘산탄’이 아니고, ‘실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산탄은 막 흩어진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치명적으로 피해를 주지 못한다. 그러나 실탄은 맞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설교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실탄과 같다. 설교자는 실탄과 같은 설교를 해야 한다. 실탄과 같은 설교는 바로 들리는 설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놓고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절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부들이 식사 준비를 할 때마다 고민하지 않은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밥을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데, 엄마의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할까? 이런 고민을 주부들은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성도들의 귀에 들리는 설교가 되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설교 준비를 위해 씨름해야 한다
설교의 핵심은 적용이다. 모든 성도들이 들을 때, ‘내 말을 하는구나’ 하고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 양념도 치고, 꽃꽂이도 한다. 이는 할 수 있으면 귀에 들리도록 설교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듣든지 말든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식으로 소리나 지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설교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 상원 채플의 로이드 존 오지빌 목사라는 분이 있는데, 어느 날 기자가 찾아와 그에게 물었다. “만일 목사님이 다시 사역을 시작한다면 설교자로서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설교 연구와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강단의 1분을 위해서는 서재에서 1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몰랐습니다.”
1분을 설교하기 위해 서재에서 1시간을 땀 흘리는 자세로 준비한다면, 분명히 그 설교가 들리는 설교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설교를 너무 가볍게 준비한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많은 자료들을 접하다 보니, 쉽고 재미있게 청중들을 웃기는 게 은혜 충만한 설교로 착각한다. 설교가 타락한 것이다.
들리는 설교를 하려면 해산의 진통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예화 몇 편을 넣고 웃겼다고 해서 잘한 설교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예화는 창문일 뿐이다. 답답하니까 한 번씩 문을 여는 창문과 같다. 예화는 본질이 아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금, 토요일은 목회자가 설교 준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정말로 성도들의 귀에 들리는 설교가 선포되면,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설교를 흐리멍텅하게 하니까 있던 교인들도 도망가는 것이다. 들리지 않는 긴 설교를 듣고 앉아있는 것도 고문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교인들이 아직은 들리지 않는 설교라도 끝까지 듣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순진하기도 하고 기가 막힐 때도 있다.
나는 설교 준비를 위해 몸부림을 친다. 내 경우 설교 준비를 좀 어렵게 준비하는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설교를 컴퓨터로 작업하는데, 먼저 성경 본문에 대한 검토를 충분히 한다. 이렇게 성경 본문을 검토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그 본문에 있는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진리, 이번 기회에 꼭 전해야 될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붙잡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통해 전할 말씀이 정해지면, 어떻게 설교를 구성해야 성도들이 ‘또 한 말이다’ 하고 듣지 않고, ‘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귀가 열리도록 할 수 있을지, 이것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두 검토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흔히 말하는 설교의 맛이 나도록 또는 지루하게 않도록 양념을 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도록 좀 더 구체화시키고, 설교 진행에 있어서도 긴장을 시킬 때가 있는가 하면 풀어줄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좀 웃겨야 될 필요가 있는 부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넣는다. 그렇게 해서 속된 말로 ‘교인들이 혼이 좀 쏙 빠지도록 어떻게 하면 설교할 수 있을까?’ 이것을 놓고 매번 고민한다.
내 경우 설교 원고를 다 작성해 놓고도, 그 원고를 계속 뜯어 고치는 작업을 보통 5번은 반복하는 것 같다. 토요일 저녁까지 다 해놓고 나면, 마음에 또 안 든다. 그러면 또 작업하고, 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고친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그 다음에는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담기 위해 애쓴다. 성경구절은 할 수 있으면 외우려고 하고, 할 수 있으면 원고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컨택(eye-contact)을 하면서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한마디로 연출을 준비하며 연습한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연출가다. 아무리 헨델의 ‘할렐루야’가 위대한 곡이라도 성가대가 죽을 쓰면 아무런 감동을 못 받는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라는 자리는 보람이 있으면서도, 무거운 십자가다. 이 십자가를 목회자는 잘 감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