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5년 09월

특집1 - 옥한흠 목사 추모 5주기, 목회자이면서 신학자였던 학자 옥한흠 목사를 말하다

특집 송태근 목사_ 삼일교회

나는 지난 2008년 10월 월간 <디사이플>의 배려로 고(故) 옥한흠 목사님과 대담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당시 옥 목사님은 은퇴 후 5년간의 시간을 지내고 계실 때쯤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세월을 잊은 듯, 여전히 독야청청(獨也靑靑)하셨다. 건강과 체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의 목양일념(牧養一念)으로 빛나는 안광과 표정, 그리고 어조에서 굳건함을 느꼈다.
그날 옥 목사님은 70세를 넘으셨음에도 “옛날 버릇이 그대로 남아서 설교하는 자체보다 준비하는 데 기진맥진하게 되고, 그러다 힘들어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책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라는 말씀으로 마주한 후배를 숙연하게 하셨다.
개인적으로 1994년 귀국 후, 옥 목사님께 인사드릴 때 두 마디 말씀을 들었던 것이 지금까지 마음속에 굵은 원칙처럼 자리하고 있다. 옥 목사님의 첫 번째 말씀은 주보에 글자 하나 바꾸지 말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말씀은 무지막지하게 기도하고 설교에 온전히 생명을 걸라는 것이었다. 이는 목회자가 정진해야 할 바를 깨우쳐 주는 교훈으로,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어떤 사역자들은 순교하기에 딱 좋다. 그들은 너무 메말라 있어서 불에 잘 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통렬한 격언을 전했다. 그런 면에서 나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설교자요, 목회자로서의 롤 모델(role model)로 옥한흠 목사님을 꼽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옥 목사님은 일평생 광인(狂人)으로, 오롯하게 한 영혼을 살려 내는 데 집중한 목회자였다. 또한 불타오르는 열정과 날카로운 지성으로 매 주일 강단을 섬긴 설교자로, 많은 후배들의 ‘큰 바위 얼굴’로 여일하게 자리하고 계신다.

 

목회자이자 신학자, 신학자이면서 목회자
어떤 이는 신학자와 목회자(설교자)는 전혀 별개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목회자는 신학자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건전한 신학 체계 위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다. 그런 의미에서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자이시면서 동시에 신학자셨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분의 설교나 저술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개혁주의 신학 사상이 도드라지게 나타나 있고, 그의 신학의 요체(要諦)인 그리스도가 언제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옥 목사님의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요인을 그분의 뛰어난 수사력과 언어 구사력, 시대와 사회를 살피는 분석력과 청중을 사로잡는 열정 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요인보다도 그분의 ‘학문에 대한 열정’, 특별히 성경 본문을 대할 때의 ‘학자적 태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석과 원문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옥 목사님의 설교에는 늘 있었다. 목사님은 현 시대적, 교회적, 상황적 메시지를 도출하기에 앞서 언제나 최우선적 과제를 본문에 대한 깊은 연구에 두셨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목사님은 삭개오에 대한 본문을 설교하실 때 여리고 지방의 지역적 특색, 당시 사회에서의 세리장의 위치와 역할, 삭개오의 이름과 유대의 명명법, 유대 문화 안에서의 배상법에 대한 설명을 빼 놓지 않으셨다.
총 52회로 강해하셨던 로마서 설교에서는 각 장의 중요 단어와 개념,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이해, 언어학적 분석, 동시성을 가진 언어적 접근 등 주경신학에서 본문에 대한 의미를 도출해 내는 경로를 충실히 따르셨다. 다른 설교 역시 마찬가지다. 본문에 깊이 뿌리내린 설교를 전하기 위해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로 성경 본문에 매달리셨다.
옥 목사님의 설교는 메시지에 맞는 적절한 예화와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하는 적용을 통해 청중들이 변화를 체험케 하는 설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결코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서재에서의 지루한 씨름’이었다. 목사님의 설교는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매달리고, 붙들고, 고심한 결과물로서, 그야말로 ‘갓 지어낸 밥’과 같은 메시지로 예배당을 울렸다. 옥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다 보면 설교자로서 ‘서재와 현장의 균형성’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무릎을 치게 될 때가 적지 않았다.

 

학자로서의 준비
옥 목사님은 1938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셨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구원의 감격을 처음으로 뜨겁게 경험하자, 말씀을 배우고픈 열망으로 낡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이후 지세포 대광중학교 시절, 부산남교회에서 열린 학생신앙운동(SFC) 제8회 수련회에 참석해 십자가의 은혜를 강렬하게 체험했다. 초중고 시절을 거치면서 교회 어른들을 통해 신학교에 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처음부터 ‘목회자’의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목회자에 대한 높은 기대 수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감히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다 21살의 나이에 비로소 잠언 16장 9절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는 말씀에서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확인하게 됐다. 
이후 군에 입대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입시 준비를 했다. 심지어 훈련 중에도 화장실에서 공부했다. 결국 1962년 성균관대학교 문리대(영문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부대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몸이 많이 약해져 폐결핵으로 고생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목사님은 1968년에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신학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당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진은 여러 면에서 매우 탁월했고, 우수한 학생들도 상당수 입학해 학업 분위기가 좋았다. 옥한흠 목사님은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 이상근, 김의환, 김희보, 간하배(Harvie M. Conn) 등의 교수진을 통해 학문과 경건의 깊이를 더했다. 
옥 목사님은 완벽주의적인 기질 때문에 누군가의 지도와 감독 없이도 꾸준하고 성실하게 학업에 임했는데, 당시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그람마>라는 회지도 만들었다. 더불어 서너 명씩 그룹을 지어 원서를 번역하고, 토론하는 독서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신대원 시절 옥 목사님이 보인 학문적 열정과 소양은 교수진에게 널리 인정받기도 했다. 또 1971년 이래로 총신대학교에서 발간하는 <신학지남>에 여러 번역 논문과 서평을 기고했는데, 이런 일련의 학문적 노력과 수고가 후일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과 요건을 갖추게 했다. 
서울 은평교회를 거쳐 김희보 교수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시작한 성도교회에서의 사역은 전통 목회를 고려하고 있던 옥한흠 목사님께 전기(轉機)를 마련해 줬다. 목사님은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 단체로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이를 통해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발견했다. 복음, 훈련, 그리고 비전이었다. 당시 대학 내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성도교회 청년이었던 방선기 목사에게 제자훈련을 가르쳐 달라고 해,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성도교회 대학부는 날로 부흥해 5년 사이 한국 교회에서 가장 큰 대학부가 됐다. 100여 군데의 교회에서 그 비결을 배우러 탐방을 올 정도였다. 

 

유학과 교회 개척, 그리고 『평깨』 집필까지
옥 목사님은 자기 자신이 바뀌고, 성도가 변화되고, 교회의 체질까지 바뀐 제자훈련이야말로 자신이 평생 걸어가야 할 길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경적 체계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평소 가지고 있던 학자적이며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제자훈련의 성경적, 신학적 뿌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스스로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1975년 여름, 국비장학생으로 선정된 옥한흠 목사님은 가족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유학길에 오른다. 그해 가을 학기부터 신학석사(실천신학 전공) 학위 공부를 시작해, 1977년에 2년간의 과정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해 5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학교를 옮겨 목회학 박사 과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곳은 실천신학 분야가 다소 취약했는데, 바로 그때 제자훈련의 풀리지 않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구내 서점에서 한스 큉의 『교회론』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찾았던 제자훈련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그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제자훈련에 몰두해야 하는지, 평신도를 왜 제자로 삼고 일깨워야 하는지, 이것을 왜 목회 철학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학적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다”라는 평생의 명제를 얻는다. 
본래 섬겼던 은평교회 배기주 목사님으로부터 개척 권유를 받은 후, 1978년 7월에 ‘강남은평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한다(3년 후 사랑의교회로 개명한다). 그리고 옥 목사님은 제자훈련에 본격적으로 매진한다. 첫 제자반은 비록 실패했지만, 다시 시작한 여성 제자반에서 큰 변화를 경험한다.
1979년에는 남성 제자반을 시작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교회에서 남자 성도가 증가했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훈련받은 남녀 제자훈련생들은 사랑의교회의 터를 닦고, 제자훈련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차대한 역할을 감당했다. 
1984년 사랑의교회 건축을 진행하던 중 옥 목사님은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다.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한 지 5년이 됐을 때, 일종의 ‘중간결산’을 하는 심정으로 3개월간 자료를 수집한 뒤, 1984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탈고한 책이 바로 『평신도를 깨운다』이다. 당시 이 책은 매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유는 제자훈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함께 사랑의교회가 보여 준 놀라운 성장 속도 때문이었다.

 

목회자와 현실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적지 않은 이들이 옥 목사님의 ‘완벽주의자적인 기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꼼꼼하고 치밀하며 세심한 그분의 성격이 어수룩하고, 두루뭉술하게 성경 말씀과 목회 현실, 그리고 성도의 삶을 대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목사님의 설교와 글에는 탁월한 논리와 지성이 담겨 있다. 그것은 청중 혹은 독자의 현실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넓으며, 지식을 전해 주는 한편 마음을 움직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고민’(苦悶) 혹은 ‘고뇌’(苦惱)라는 단어를 옥 목사님께로부터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심지어 1983년에 출간한 그분의 첫 번째 저서 역시 『고통에는 뜻이 있다』이다). 그 이유는 목사님 자신의 현실과 한국 교회의 현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들의 현실에 대한 깊은 묵상과 해석, 공감이 저술과 설교에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자신의 현실 세계에서 피 끓는 열정과 깊은 고뇌로 엮은 저술과 설교가 이제 한국 기독교의 고전이 돼 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평신도를 깨운다』는 교회의 본질과 목회 철학을 논할 때 선봉의 자리에 서있다. 『평신도를 깨운다』 뿐만 아니라 제자훈련, 사역훈련 교재를 비롯한 목사님의 저술과 교재(대략 100여 권이 넘는다)를 두루 살필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선배 노병(老兵)이 수고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으로 시대를 살필 줄 아셨다. 동시에 이 시대에 자리하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 불합리한 문제들의 해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기반 위에 굳게 선 ‘한 영혼’으로부터 가능하다고 확고히 믿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에 입각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한 영혼을 세우는 데 생애를 바치셨다. 이런 일련의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옥 목사님을 우리 시대의 목회자(牧會者)이면서, 동시에 학자(學者)요, 사상가(思想家)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옥 목사님은 평생 고민하고, 더 알아가기 원하셨다. 사도 바울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는 고백이 옥 목사님의 삶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만 같다. 옥 목사님을 기억하는 한 목회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옥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두꺼운 요세푸스 전집 중 교회사 책에 밑줄을 그으며 읽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 시간만 나면 워크맨에 이어폰을 끼고 걸으면서 당대의 유명한 목회자들의 설교를 귀담아들으셨던 것도 더 큰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옥 목사님은 언제나 갈고 닦으셨다. 갈고 닦아 ‘이만하면 됐다’ 싶을 만도 한데 멈추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진액(津液)을 쏟아내는 태도로 준비하셨고, 설교하셨으며 가르치셨다. 가벼운 이야깃거리가 아닌 충실한 학자적 태도로 내어 놓으신 설교와 저술들이 그 증거다. 목사님의 수고와 애씀의 결과물을 많은 목회자와 성도, 그리고 교회들이 공유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하워드 헨드릭스라는 저명한 신학자는 “하나님은 더 많은 스타가 아닌, 더 많은 종들을 찾으신다”라는 말로 오늘날 교회 현실에 대해 일갈(一喝)했다. 지금은 부단히 갈고 닦는 자세로 섬기며 살아가는, 예수님의 진실한 종이 필요한 시대다.
“우리 목회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삯꾼 목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옥 목사님은 사랑의교회를 담임하시던 시절 자주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독교의 바른 가치와 방향이 흔들리고 있는 오늘날, 진실한 신자이면서 충실한 학자요, 동시에 한 영혼을 예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데 투신(投身)했던 목회자 고(故) 옥한흠 목사님의 자취를 더듬어 우리의 시금석으로 삼는 것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아마도 고(故) 옥한흠 목사님의 까랑까랑한 음성을 때로 간절히 듣고 싶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목회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본질이 아닌 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라. 정말로 양 떼들이 신뢰하고 전적으로 따를 수 있는 지도자로 거듭나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런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옥한흠,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中에서)

 

 

 

송태근 목사는 총신대학교대학원, Golden Gat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Fuller Theological Seminary (D. Min.)를 졸업했다. 현재 교회갱신협의회 공동대표와 서울 CAL-NET 대표, 삼일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