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는 뉴욕의 바우어리 지역 사람들 모두가 다 아는 형편없는 술주정꾼이었다. 한 마디로 인생의 낙오자였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완전히 변화되었다. 남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밤낮으로 전도집회 현장을 드나들면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해치웠다. 자신의 체면을 차리지 않고 남들이 꺼려하는 일들을 처리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앉아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전도집회가 진행 중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복도를 따라 강단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는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저를 조와 같이 만들어 주세요! 조와 같이 만들어 주세요! 저를 조와 같이 만들어 주세요!” 그는 반복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말씀을 전하던 강사가 몸을 숙여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나를 예수님과 같이 만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남자가 이상한 듯이 강사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라는 사람도 조와 같아요?”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했다. 바울도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조처럼 예수님의 모델을 그대로 따라 살기로 헌신한 사람이었다. 작은 예수가 된 것이다. 바울의 권면은 어떻게 보면 교만하고 뻔뻔스러운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이 예수 안에 살고 있음을 확신했기에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즉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을 본받아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히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고 말한다. 그들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최근의 저서 『세상을 바꾸는 작은 예수들』에서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제시한다.
기독교 - 그리스도 = 종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과 비전,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영혼이 메마른 종교적인 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예수님을 빼면 종교의식과 제도만 남는다. 예수님의 사진을 복사기에 복사하고 그 복사된 그림을 가지고 다시 복사하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사진이 흐릿해서 볼 수가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던 형식이 나중에 제도로 바뀌면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방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성경에서는 바리새인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들도 열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무리들이다.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믿었고,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믿었다. 이들은 전통을 지키고 기도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못 박는 데 앞장섰다. 오늘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이런 바리새적 요소를 제거하고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분이 왜 불신자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실까? 그분이 오늘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는 않을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