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 있다. 누가복음 15장을 17세기의 화가 렘브란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채 그려낸 유작이다.
둘째 아들은, 머리는 거의 빠지고 몸은 지치고 여윈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외투도 없고, 아랫도리는 다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해어졌다. 신발은 너덜너덜해졌고 그것도 한쪽만 신고 있다. 자주색 망토를 넉넉하게 걸친 아버지는 그 아들의 어깨를 감싸쥐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그 옆에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아버지를 응시하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체험하면서 라르쉬 공동체의 지적 장애인들과 남은 평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얻은 통찰과 경험을 엮어 『탕자의 귀향』을 썼다.
나우웬은 처음에는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 힘들고 분주한 삶과 사역에 지친 그가 하나님의 품 안에 누리는 은혜를 나눈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에 기대어 그분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둘째 아들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모습일 것이다.
나우웬의 관심은 큰 형에게로 이어진다. 그림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큰 형의 모습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포함하고 있다. 큰 아들도 역시 치유와 용서가 필요한 존재였고, 둘 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용서받아야 할 존재였다. 나우웬은 작은 아들보다 냉혹한 눈초리로 원망과 분노에 차있는 형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느낀다. 독선과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형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오늘 분노를 처리하고 못하고 더불어 춤출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형의 모습을 닮았다. 원망하고 분노하고 기분이 언짢고 불만스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헐뜯고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형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겸손한 영웅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방어적이며 남의 시선에 민감하고 종종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다. 항상 조바심을 내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고해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약함보다는 강함을, 은혜보다는 교리를, 깨진 것보다는 완전한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나우웬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탕자의 귀향에서 이야기의 핵심은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다. 그래서 제목을 제대로 잡는다면 “인정 많은 아버지의 환영”이라고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나우웬은 아버지의 두 손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아들의 어깨와 등을 가리고 있는 왼손은 강하고 억세게 보이는 아버지의 손을, 움켜잡지 않고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은 오른손은 어루만지고 토닥이고 위로와 위안을 주는 어머니의 손으로 묘사한다. 두 아들에서 이제는 아버지에게로 초점을 옮겨와 용서하고 용납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도록 초청한다.
나우웬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한다. “더 이상 아들의 신분을 이용해 아버지가 되기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눈앞에 있는 저 노인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진리를 주장할 때가 됐습니다.”
교회는 탕자와 맏아들로 가득하다.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도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원망과 분노로 불평을 일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타난 아버지처럼 껴안아주고, 공감해주고,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의 아버지, 어머니로 성장하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깨지고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리더십을 강조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