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이라는 용어는 이제 너무나 흔한 말이 되었다. 교회를 소개하는 브로슈어와 주보,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제자훈련을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빼놓지 않고 소개한다. 그렇게 보면 한국 교회 대부분이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제자훈련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성도들을 제자로 세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무늬만 제자훈련일 뿐 실제로는 구색을 맞추기 위한 이름뿐인 제자훈련도 많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는 분명한 비전으로 제자훈련을 시작했던 교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함정에 빠지거나 본질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제자훈련의 본질을 놓치는 순간 지도자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섬김의 제자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로 제자훈련에 임했던 사역의 동지들이 바로 이 덫에 걸려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적잖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목회의 열매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런 증상들이 나타난다.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게 되면서 얻는 특혜와 영향력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부여된 힘과 지위를 하나님보다 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순간,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제자훈련이 된다. 성공한 지도자에게 섬김의 동기가 사라지면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기능도 약화된다. 따르는 이가 많아질수록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막고 자신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기 쉽다. 독선적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신약성경은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를 늘 복수 형태로 설명한다. 팀 사역은 지도자 개인의 약점들을 보완해준다. 하지만 독선적인 지도자가 군림하면 팀 사역의 개념은 사라지고, 대다수의 성도들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전락하며 평신도 지도자들은 거수기 역할만 하게 된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제자훈련 사역자가 의도적이며 지속적으로 제자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옥한흠 목사가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한결같이 “한 사람 철학”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별히 제자훈련으로 교회성장을 경험한 목회자들을 멘토링할 기회만 주어지면 한결같이 “한 사람 철학”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곤 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한 사람을 중시하는 제자도를 역설한 것이다.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존 스토트가 고별 메시지로 선택한 주제도 “제자도”이다. 그의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 제자도를 말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위기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할 사명이 본질적인 제자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들추어내고 대의에 철저하게 헌신하는 급진적인 제자도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제자도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가야 할 길을 가도록 만드는 힘이다.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함정과 덫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막이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붙잡아야 할 변함없는 핵심이다.
제자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 해서 제자도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본질을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자도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며 철저하고도 급진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리더십만 이야기하다 진정한 팔로워십은 사라지고, 제자도가 없는 제자훈련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