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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오정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부친께서는 내게 크게 눈물을 보이셨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시지 않았기에 여쭤봤다. “아버지, 왜 그리 많이 우세요?” “나는 이제 평생의 기도후원자를 잃었다.”
할아버지는 별명이 낙타 무릎일 정도로 기도하는 분이셨다. 목회자로서 누구보다 기도의 후원이 절실하셨던 아버님의 애절한 심정이 이제는 고스란히 이심전심으로 내게 이어지고 있다.
8월 초 예기치 않았던 부친의 소천 소식을 해외에서 듣고 급히 귀국하면서 어릴적 아버님과의 여러 추억이 가슴에서 뭉글거렸다.
성도들에게는 한없이 인자하시면서 아들에게는 글자 한 자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엄격함, 조상의 고난을 생각해야 한다는 이유로 매달 첫날은 꽁보리밥으로 도시락을 싸 주신 애족(愛族)의 마음, 서울로 올라가는 내게 노잣돈 대신 성경 구절을 담아 건네신 봉투 등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아버님께서 남겨 주신 큰 유산이다.
아버님의 목양을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목회자가 되는 길이 내 인생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달동네 개척 교회는 가족들에게 너무도 힘든 삶이었다. 부친의 목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부산의 큰 교회 당회원들이 와서 “목사님, 이만한 고생이면 됐습니다”라며 다른 목회지로 가시라고 권유했다. 그때 부친은 ‘누가 와도 이 교회는 고생하게 돼 있다. 그 고생 내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한 교회를 44년간 섬기셨다.
부친의 천국환송예배는 영가족의 넘치는 사랑이 깊은 슬픔을 품었던 시간이었다. 2년 전 어머님의 장례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는 한국 교회의 하나 됨을 기도했었다. 이번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는 한국 교회가 회복을 넘어 뜨거운 부흥의 문을 여는 현장이 되기를 소원했다. 아버님은 언제나 <국민일보>의 미션 면과 <기독신문>을 가까이하시면서 한국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셨다.
조문을 받는 내내 아버님의 영정 사진 속 따뜻한 미소는 나와 가족을 위로했다. 그 사진은 몇 년 전 동생 오정호 목사와 함께 교회 목양실 앞에서 찍은 것이다. 평소 부친의 온유하신 성품을 담은 사진을 찾다가 마음에 들어온 사진이었다. 그때는 이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 일은 우리의 매 순간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거듭 일깨운 경험이 됐다.
부친에게 찬송은 기쁨이자 감사, 기도였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영혼의 햇빛 예수여”, “내 진정 사모하는”,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내 평생 소원 이것뿐” 부친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찬송들은 내게서도 흘러나오는 찬송들이다.
아버님께서 남겨 주신 가장 큰 신앙의 유산은 신앙의 계승이다. 아버님의 신앙은 아들과 손자들에게 이어져 삼대 목사의 개척으로 열매 맺었다.
폭염 가운데서도 사랑의 발걸음을 해 주시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