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07년 01월

참된 부흥을 사모하며

발행인칼럼 오정현 목사_사랑의교회

부흥은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왜 다시금 부흥인가? 2007년 평양대부흥 백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나 교단마다 부흥은 일종의 유행어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아마도 100년 전 평양에서 일어났던 강력한 대부흥의 역사가 그만큼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에 절실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흥에 대해서 긍정적인 기대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침체기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를 일시적으로 살리는 앰플 주사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의미 있는 이벤트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또한 부흥을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때가 되면 일어나는 주기적인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더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적인 부흥을 표면적으로 보거나, 부흥의 포커스를 사람이나 사건에 둘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시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변화와 감동적인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몇 명이 회심하였고, 얼마나 동시대적인 사회가 변화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수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부흥을 기대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부흥을 소원하는 이유는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흔히 교회부흥의 원형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강림을 든다. 그리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하는 사도행전을 교회부흥의 원전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정한 부흥인지는 사도행전을 읽고 또 읽으면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성령행전으로까지 불리는 사도행전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과 사건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읽는 내내 긴박감을 가지지만,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우리의 심안(心眼)을 가득히 채우는 것은 사람도, 사건도 아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다. 구체적으로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복음증거가 마치 연이은 고리처럼 순환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네 가지는 우리 기독교의 부흥과 세상적인 부흥을 결정짓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임한 부흥이 진짜라면 보이는 것은 하나님뿐일 것이다. 만일 부흥의 현장에서 사람의 수나 사건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더 이상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부흥 이후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의 관심은 부흥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부흥의 역사와 기적의 현장을 사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눈은 부흥 이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부흥은 순교의 피가 땅을 적심으로 피어나는 것이지만, 찾아온 부흥은 또 다른 시련을 통해서 강화되고 선명해지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교회 역시 부흥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도들이 능욕을 당하는 일이 생기고 결국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시련을 겪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수천 명이나 예수님 앞으로 돌아왔던 그 부흥의 현장이 바로 그 예수님 때문에 순교의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부흥의 현장이 순교와 고난의 자리로 중첩될 때마다 교회의 영적인 근력이 강화되고, 복음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이 순교의 피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 부흥 이후에도 순교의 피가 요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는 통찰력과 영적인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 이럴때 우리는 부흥을 더 이상 지나가는 유행어처럼 가볍게 대할 수가 없게 된다. 부흥의 뜨거움과 순교정신의 결연함으로 교직(交織)되어 강철 같은 심령의 강건함을 가진다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주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