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오정현
성령님의 능력이 없으면 기독교는 태동조차 할 수 없었다. 성자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잉태돼 이 땅에 오셨다(마 1:18).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됐으며(벧후 1:21), 교회는 성령님의 강림으로 탄생됐고(행 2:3), 무형 교회인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는 것도 성령님에 의해서다(고전 3:16). 성령님의 주권적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거듭날 수 없고(요 3:5),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받을 수 없으며(롬 8:16), 장차 심판의 정죄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없다(롬 8:1~2).
성령님의 능력과 주권은 경험적 진리이기도 하다. 40여 년이 넘는 목회를 돌아보면, 영광스러운 사역의 물꼬를 열었던 것은 성령 사역이었다. 나는 4대째 예수님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목회자이신 부친은 예배드리기 전에 장로교 12신조를 읽으셨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지닌 보수적 신앙의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소중한 말씀과 교리를 중요시하는 전통 위에 성령 충만이나 성령의 은사적 역사에 대해서는 보다 균형이 요구된다. 누가 성령론과 종말론에 관해 완벽하게 다 안다고 자부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성령론에 관해서 늘 겸손함과 사모함이 필요하다.
청년 사역을 하면서 늘 심령의 갈증이 있었다. 매삼주오(每三主五)로 말씀을 충실히 읽고, 견실한 신앙생활을 했지만, 심령에는 뭔지 모를 눌림이 있었다. 그런데 1976년 강원도 예수원에서 대천덕 원장님을 만난 후, 신앙의 껍질이 벗겨지는 경험을 했다. 만약 내가 반세기 전으로 돌아가 다시 목회를 한다면 지금의 신학도와 젊은 목회자들을 아들처럼 아끼는 목자의 심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진리가 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축적이 목회를 결정한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과 주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면, 찬송 한 장을 부르더라도 기름부으심을 사모하며 전심으로 부르라. 찬송을 인도하기 전에 열 번, 스무 번을 부르고 강단에 서야 한다. 강단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축적되면 어느 순간 영적인 임계점이 열리고, 보혈의 강수로 축복의 잔이 넘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이영훈 목사님이 사랑의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강단 교류를 했다. 이전에도 2001년 선대 고(故) 옥한흠 목사님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고, 이듬해 고(故) 조용기 목사님이 사랑의교회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여기에는 성령님의 능력과 주권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공감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는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복음주의연맹(이하 WEA)의 7대 신앙고백이 있다. 그중 세 가지가 성령님의 능력과 주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 성령에 의한 중생을 믿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참된 성도들과,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믿습니다.” WEA 서울총회는 성령님의 주권과 능력이 어떻게 세계교회 속에 역사하시는지를 목도하는 현장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냉소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사회의 무신론적 사상과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영향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에 성령님의 능력과 주권을 절대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교회는 물론 성도 각 사람에게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쌓일 때, 능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장벽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