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14년 04월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제자훈련

발행인칼럼 오정현 원장_국제제자훈련원

혹독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세상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잇달아 보도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의 그물이 찢긴 것을 탄식하기 전에 교회는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건들의 이면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늘진 곳의 신음에서 교회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나뿐 아니라 많은 목회자가 밤을 새워도 다다를 수 없는 자책의 심연 속에서 고통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보도될 때마다 제자훈련 하는 교회의 목회자로서 ‘제자훈련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깊은 우려를 하게 된다. 세상을 벗어난 복음이 생명력을 담보할 수 없듯이, 삶의 현장을 떠난 제자훈련은 그 자체로는 설사 영적인 불로장생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다 할지라도, 가난한 자, 약한 자, 병든 자들이 결코 취할 수 없는 신포도요, 그들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화중지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 제자훈련은 이미 복음의 생명이 소진된 허울뿐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제자훈련의 현장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제자훈련이 고통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진정한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삶의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는 제자훈련의 야성을 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처럼 일 년의 제자훈련과 일 년의 사역훈련이라는 일상적 과정으로는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제자훈련을 제대로 담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존의 관점에서는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제자훈련의 방향키를 단단히 붙잡고, 진로를 서서히 돌리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현장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의 원형(prototype)은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이런 원형에서 벗어난 것은 사이비다. 제자훈련은 성육신은 물론이요, 그분의 공생애 사역이 그러했듯이 위를 보는 것만큼이나 아래를 봐야 한다. 제자훈련의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거니는 것만큼이나, 예수님께서 보내신 70인 제자들처럼 ‘괴론 세상’에 나가서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제자훈련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견고하게 묶는 이중 매듭, 즉 ‘더블 피셔맨’(double fisherman)이 돼야 한다. 더블 피셔맨은 어부들이 그물을 묶을 때에 어떤 경우에도 풀리지 않게 이중으로 매듭을 만드는 것에서 차용한 등산용어인데, 생명을 담보로 하는 산악의 로프가 절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이중으로 묶는 것을 말한다.
대사회적인 봉사와 섬김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묶는 하나의 매듭이라면,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늘진 이웃을 이중, 삼중으로 묶어서 어떤 경우에도 단절 없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내는 더블 피셔맨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사명의 매듭과 대계명의 매듭을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이중매듭으로 삶의 현장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제자훈련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단단히 묶는 이중 매듭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제자훈련을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가장 확실한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우리 모두의 리그가 되도록 힘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