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야기

2016년 07월

신평로교회 * 사명에 집중해야 상처가 치유된다

현장이야기 박희원 목사

김학준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사랑의교회에서 청년부 팀장으로 섬기다 2011년 12월에 부산 신평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지금까지 섬기고 있다.




“과연 한국 교회에 소망이 있는가?”라는 탄식이 우리 귀에 맴돌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탄식의 핵심에는 수많은 교회의 분쟁과 분열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에서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던 신앙인들은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안타깝게도 상처에서 당사자뿐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를 오염시키는 독소가 흘러나와 상황을 점점 더 악화시킨다.
문제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에 집중하지 않고, 섣불리 상처를 봉합하려 하면 오히려 상처가 더 커지기 일쑤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처받은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교회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까? 무너진 주의 성전을 다시 수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부산 신평로교회를 찾았다. 부산 신평로교회는 1949년 하밀턴 선교사가 자신의 집에서 마두원 목사와 함께 시작한 교회다. 출석 교인이 1,700명이 넘고 재적 교인은 4,000명 정도로, 근처에 있던 호산나교회보다 규모가 더 컸다. 이처럼 신평로교회는 뿌리도 깊고 자부심도 있어서 “부산 동쪽에는 수영로교회가, 서쪽에는 신평로교회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09년 후임목사 청빙과 관련한 문제로 일어난 당회의 갈등은 상호 실력 행사까지 치달았다가 결국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분열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상처받은 많은 교인들이 떠났고, 남은 성도들의 마음도 갈가리 찢겨 상처로 인한 불신만이 남게 됐다. 지역사회의 불신자들이 “저 교회만 빼고 다른 교회에 가라”라고 할 정도로 교회의 영광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분열 사태가 일어난 2011년 12월 신평로교회에 김학준 목사가 부임하자 교회는 급속도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학준 목사가 지난 약 5년 동안 추진한 제자훈련 목회는 남아 있던 교인들의 상처를 싸매어 줬을 뿐 아니라, 교인들 간의 화해의 물꼬를 트게 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교회로 거듭났다.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던 출석 인원도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며 과거의 교회 규모에 다가가고 있으며, 무엇보다 성도들이 교회의 변화와 회복에 기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김학준 목사와 신평로교회 성도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뜻하지 않게 부임한 교회
신평로교회가 분열된 후 2개월이 지난 2011년 6월, 사랑의교회 청년부 팀장으로 사역하고 있던 김학준 목사는 담임목사 오정현 목사로부터 신평로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때만 해도 김 목사는 신평로교회에 부임하고 싶은 마음도, 또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그때는 그냥 담임목사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김 목사는 부산에 전혀 연고가 없는 데다, 그 당시 신평로교회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김 목사가 설교를 한 다음 달인 7월 공동의회에서 김학준 목사 청빙이 가결된다. 투표를 한 신평로교회 성도들마저 이를 놓고 기적이라 했다. 이렇게 상황이 급물살을 타자 김학준 목사는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사실 설교를 한 것이 꼭 이 교회에 부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임하기 전에 김학준 목사는 신평로교회에 12월에 부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교회는 그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다.
“내가 요구한 조건을 다 받아 주는데 안 갈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김학준 목사는 2011년 12월 신평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교회는 이듬해 2월에 위임예배를 드린다.
어떻게 보면 김학준 목사는 얼떨결에 신평로교회에 부임한 것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그가 특별히 분열로 인해 상처 입은 교회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거나, 부산 지역을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학준 목사는 선교사로 파송을 받거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면이, 그리고 무엇이 신평로교회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 것일까?

제자훈련 철학에 붙잡히다
신평로교회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제자훈련 목회를 교회에 도입하고, 정착시킨 것에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담임목사의 의지였다. 한마디로 담임목사가 제자훈련 철학에 붙잡히지 않고서는, 다른 말로 ‘제자훈련에 미치지’ 않고서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결과를 볼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김학준 목사는 신평로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적임자였다. 제자훈련에 ‘미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부임 당시 김 목사의 꿈은 ‘한국에서 제자훈련을 제일 잘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2012년 2월, 위임예배를 앞두고 김 목사가 부산 CB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도 이것이다.
“제자훈련을 잘하는 교회로 변모시키고자 한 것이 제가 신평로교회에 부임한 이유입니다.” 김 목사는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한 기간 동안 제자훈련이 갖고 있는 영향력과 역동성을 알았기에 새로 부임하는 교회에서도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신평로교회처럼 깊은 상처를 가진 교회에 이처럼 짧은 시간에 제자훈련을 뿌리내리게 할 수 있었을까? 김 목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솔직히 잘 모르고 왔다”라고 말한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깊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와 보니, 성도들의 가슴에 맺힌 상처가 너무나 컸다. 화해, 사랑, 용서에 대한 설교를 하면 누군가는 화를 냈다. 어느 날은 한 교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거의 두 시간 동안 그가 퍼붓는 욕설을 들어야 했다. 김 목사는 그때를 생각하며 웃으며 말한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거죠. 감사하게도 제가 그때에는 부산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들어서 별로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김 목사는 교인들의 상처와 문제를 싸매고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을 붙들었다. 그것이 바로 제자훈련이다. 그리고 김 목사가 상처 입은 교인들 가운데 제자훈련의 씨를 뿌릴 소망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부임 후 만난 교인들이 ‘신평로교회는 뿌리 깊은 전통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실패했다. 근본부터 잘못됐다. 변화해야 한다’라는 마음을 갖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위임예배를 드린 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당회원들에게 제자훈련을 하자고 제의했다.
“오히려 문제가 있었던 교회에 제자훈련을 접목하기가 훨씬 좋습니다. 제가 부임해 보니 당회원들을 비롯한 성도들이 모두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배운 것은 제자훈련밖에 없으니 이 교회를 바로 세우려면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라고 했죠. 당회원들이 동의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장로님들부터 해야 한다고 했더니 감사하게도 다들 하겠다고 나서 주셨습니다.”
사실 당회원들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제자훈련을 받겠다고 결단한 것은 아니다. 당회원으로서 1기 제자훈련을 수료한 박상근 장로는 “훈련을 받다 보니 좋은 줄 알고 다들 꼭 수료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졌지만, 처음에는 6명의 장로 모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시작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 교회에서 당회원 모두가 제자훈련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김 목사는 교회 중직자들이 제자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다. 그는 2012년 7월에 제자훈련 모집 공고를 내며 당회원들뿐 아니라 권사, 안수집사까지 제자훈련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다들 하겠다고 해 놓고는 막상 하려니 자꾸 빠져 나갈 핑계를 대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두 다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냐고 물었더니, 주일 저녁밖에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4부 예배까지 설교를 마친 그때가 가장 피곤하지만, 그 시간밖에 안 된다고 하니 주일에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9월에 1기 제자반이 시작됐다. 주일 오후 4시에 예배를 마치면 4시부터 6시까지는 장로반을 인도하고, 장로반을 마치자마자 바로 6시부터 9~10시까지 안수집사반을 인도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전은자 사모는 권사반을 맡아 장로반, 안수집사반, 권사반 세 반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2기는 다음 해 2013년 3월, 그러니까 아직 1기가 수료하기도 전에 시작돼 4개 반이 동시에 진행됐다. 2기 제자반은 남제자반 1개, 여제자반 2개, 그리고 교역자반까지 총 4개가 개설됐다. 여제자반은 전은자 사모와 사랑의교회 청년부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지은 전도사가 하나씩 맡았다. 이후 1기가 7월에 수료할 때까지 김 목사는 1기 장로반과 안수집사반, 2기 남제자반과 교역자반까지 총 4개의 제자반을 맡았고, 전은자 사모는 1기 권사반과 2기 여제자반을 맡아 진행했다.
제자훈련에 대한 어지간한 확신과 열정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김 목사는 부임 전부터 지금까지 당뇨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제자훈련을 위해 열정적으로 뛰는 것을 보고 모든 훈련생이 놀라워했다.
2기 제자훈련을 수료한 이호승 집사는 김 목사를 보며 ‘대체 무슨 ‘빽’을 믿고 저렇게 뛰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윤형 집사도 “주일에 4번 설교를 하신 후에 다시 장로반, 안수집사반 두 제자반을 연이어 인도하고 밤 10시를 넘기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제자훈련은 현재 5기까지 진행돼 200명이 넘는 제자훈련 수료생을 배출했다. 2015년에는 사역훈련이 시작돼 현재 2기까지 진행했는데 총 90명이 수료했다. 김 목사는 교인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훈련에 대한 동기 부여가 쉬웠다며, 자신이 몰고 간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 의해 진행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제자훈련 철학에 붙잡혀 열정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신평로교회 제자훈련은 5년 만에 이만큼의 열매와 기틀을 닦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역자들과 제자훈련 철학을 공유하다
어느 정도 규모로 이미 성장해 있는 기존 교회에 제자훈련을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평로교회는 5년 만에 200여 명의 수료자를 배출해 제자훈련 하는 교회로 변모됐다. 이에는 전은자 사모가 제자훈련 사역에 가담한 공이 크다. 그러나 담임목사와 사모 두 사람이 200명 모두를 훈련시킨 것은 아니다. 이는 제자훈련 철학을 공유한 부교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평로교회 제자훈련에서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점은 교역자들 모두 제자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2기 제자반에 교역자반을 만들어 당시 모든 부교역자가 제자훈련을 받게 했다. 그리고 이후 들어오는 신임 교역자는 모두 남제자반에 소속시켜 평신도와 같이 담임목사가 인도하는 제자훈련을 받게 했다.
김 목사가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제자훈련 교재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와 동일한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공유하고, 교회에 그 철학을 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김 목사의 지론은 이것이다. 중요한 것은 직분이나 봉사가 아니라 영적 성숙도다. 기존 전통 교회에서는 사람의 직분이나 교회 출석 연수, 성가대, 교사 등의 봉사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제자훈련 목회를 위해서는 기존의 이런 생각을 뜯어고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교역자들부터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평신도와 같은 눈높이에서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제자훈련을 부교역자들에게 위임했을 때 우려되는 문제들로 인해 선뜻 부교역자에게 훈련을 맡기지 못하는 교회가 많은데, 신평로교회는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를 직접 훈련시켜 담임목사와 같은 목회 철학을 갖게 한 후에 위임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김 목사는 아무리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라도 단기간의 교육으로 제자훈련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김 목사는 제자훈련을 받아본 사람만이 훈련을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또 제자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담임목사와 부목사는 매주 훈련 내용과 과제, 각 반의 상황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다른 훈련 교역자들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얻고, 서로의 영적인 상태도 점검해 줘 훈련 교역자들이 서로 유리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신평로교회의 사례는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한 교회에서 어떻게 부교역자들과 제자훈련을 공유할 것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영적 토양 개선을 위해 싸우다
김 목사는 교인들에게 소그룹뿐 아니라 모든 교회 활동을 통해 제자훈련 철학을 심는 데 애쓰고 있다. 즉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이나 행하는 의식, 예배 순서 등에 제자훈련 철학이 반영되게 한다. 이를 위해서 기존 전통이나 선입견과의 충돌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훈련을 진행하면서 ‘훈련 없이는 직분도 없다’라고 선언했다. 직분보다 영적 성숙이 우선이라는 철학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처음에는 교인들이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이 훈련을 받으면 직분자가 되기에 유리한가?’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초기 제자훈련 수료식 간증자들 중에는 “직분을 갖기에 유리할 것 같아 훈련에 지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마음이 부끄럽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았다.
최근에는 직분에 대한 관심 때문에 훈련에 지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변화는 제대로 된 훈련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인들 사이에 들어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 목사는 이렇게 제자훈련 철학을 공유해 가는 활동을 “영적 토양을 바꾼다”라고 표현하며, “이제 출석 인원의 20% 정도가 훈련을 마쳐 가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의 영적 토양이 많이 변화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김학준 목사가 진단하는 신평로교회, 어쩌면 현재 한국 교회의 영적 토양의 문제는 이렇다. 교인들은 제대로 말씀으로 훈련된 적이 없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관계가 사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교회 사역, 봉사, 친교로 멤버십이 형성되고 정착된다. 사역을 통해 보람을 느끼기는 쉽다.
그러나 이런 일이 지속되면 일상의 삶은 변화되지 않고, 말씀과 삶에 괴리가 오고 만다. 그 괴리를 기껏 연결시켜 주는 고리가 기복주의다. 그것은 다시 종교적 외식으로 발전하고,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로 변해 간다. 그렇게 교회의 터가 굳어지면 결국 갈등이 생겨, 그 안에 곪아 있던 것들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김 목사는 제자훈련을 교회에 온전히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이 철학을 모든 성도와 공유하려고 힘쓴다. 예배 시간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모임과 활동에서 제자훈련 철학을 공적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런 노력이 상당한 혼란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제가 부임했을 때 보니 매 예배 시간마다 헌금 봉투가 강대상에 올라왔어요. 당시 교회는 헌금 봉투에 적힌 내용을 일일이 읽어 주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교인들은 봉투에 적은 것을 목사가 읽어 주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저는 안 읽어 줬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래도 헌금 봉투를 강대상에 올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교인들도 꽤 있었기에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부교역자가 설교를 맡은 수요예배 때 예배실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려는데, 여전도사 한 분이 그에게 앞자리를 가리켰다. 설교자 정면 맨 앞자리가 담임목사 자리였던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님이 어디 계신가?’에 엄청나게 신경을 쓴다. 담임목사가 마치 주님의 대리인처럼 되고, 담임목사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인 양 생각하다 보니, 예배 시간에는 담임목사가 교인들이 다 볼 수 있는 맨 앞자리에 ‘좌정’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제자훈련에서는 평신도나 교역자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았죠. 그런데 교인들끼리 ‘목사님 어디 가셨냐?’ 하고 웅성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후 예배 때 목사에게 관심 갖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김 목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인가, 어떤 것이 더 성도들을 위한 것인가’를 물으며 사역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담임목사에게 어떻게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것이 과연 성도들을 이롭게 하는지를 생각해라.’ 사실 이것은 하나의 싸움이죠.”
실로 예배 시간에는 헌금 봉투에 적힌 기도제목을 읽어 주면서 제자훈련 때에는 청지기직을 가르치고, 늘 예배실 맨 앞자리에 ‘좌정’하면서도 목사와 평신도는 동등하다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김 목사는 제자훈련이 제자반이라는 소그룹 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영적 토양을 바꾸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중국어 예배부와 구역장을 맡고 있는 김영선 집사는 이런 김 목사에 대해 “본질과 비본질을 잘 분별하시는 분”이라고 평가한다. 김 집사는 “성도들이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실 뿐 아니라 당신도 그렇게 사시려고 굉장히 노력하시는 모습에 큰 도전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사실 전통 교회에서 기복신앙이나 형식주의가 가진 문제들을 단번에 제거하는 일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자칫하면 갈등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김 목사는 이를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제자훈련 철학이 현실의 예배와 생활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제자훈련은 생활입니다.” 이처럼 훈련 내용과 교회에서 드러나는 외양이 일치해 교역자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그 철학을 공유하는 것, 곧 영적 토양을 바꿔 가는 것이야말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는 길이라고 김 목사는 확신한다.


말씀 중심, 생활 중심으로 훈련하다
제자훈련 목회란 결국 교회의 영적 토양을 바꿔 가는 농사와 같다고 말한 김 목사는 기존의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영적 토양을 갈아엎기 위해 특별히 말씀 중심, 생활 중심 훈련을 강조한다. 신평로교회 제자훈련 커리큘럼이 다른 교회에 비해 특별히 다른 것은 없어 보이지만, 김 목사는 특별히 D형 큐티와 생활숙제를 강조한다. 그가 D형 큐티를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자훈련의 핵심이 곧 말씀을 해석해 삶에 적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D형 큐티는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신평로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수료한 평신도들은 힘든 과정을 통해서큰 유익을 얻는다고 입을 모은다. 남우성 집사는 제자훈련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면서도 또한 가장 많이 남는 것이 바로 ‘D형 큐티’로, 이를 통해 말씀과 기도의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정명옥 권사는 “평소 숙제라면 끔찍했는데 마치 현미밥처럼 먹기가 쉽지 않지만 꼭꼭 씹어 먹으면 제대로 된 영양을 얻듯이, 삶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라고 고백한다. 유숙지 집사는 “성경 통독에 암송에, 특히 D형 큐티를 하려니 과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지만, 그것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양식이 됐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평신도들이 D형 큐티를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담임목사의 설교로부터 소그룹, 훈련 과제로 이어지는 모든 것이 귀납적인 성경 연구를 기반으로 일관된 흐름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김 목사는 “저는 설교도 D형 큐티 하듯이 합니다. 주로 성경 연구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많은 참고서를 보기보다 성경에 초점을 맞추고, 선명한 적용을 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말한다.
신평로교회 제자훈련이 강조하는 또 하나는 바로 생활숙제다. “학력이 낮으신 분들이 확실히 과제를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가르친 대로 순종하시고, 생활과제를 너무 순진할 정도로 잘하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맞벌이를 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변화를 이뤄 훈련이 너무나 보람됩니다.”
그리고 신평로교회 제자훈련은 공동체성을 상당히 중시한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엠티부터 다녀온다. 그러면 확실히 그 전과 후가 달라져 서먹서먹하던 사람들이 형제처럼 지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훈련을 수료한 훈련생들에게 제자훈련 기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느냐고 질문하면 대부분 엠티 때 있었던 일들과 함께 교제 시간을 떠올리는 것을 봐도 이들에게 공동체성이 무척 중요해 보인다.
결국 기복적, 미신적 신앙으로부터 성도를 깨우기 위해서는 말씀을 직접 읽고 해석하며 실제로 그것을 생활에 적용해 신앙의 형제들 사이에서 허물없이 교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신평로교회 제자훈련은 여러 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적용해 가고 있었다. 신평로교회를 통해 교회가 거듭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은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다
김학준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신평로교회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점점 안정을 찾아가게 됐다. 하지만 극단적인 갈등과 충돌 후에 갈라선 두 교회 간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상호 간의 첨예한 정당성의 갈등은 연말이면 교인 쟁탈전으로 이어졌고, 그런 가운데서 두 교회의 관계는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평로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부산사랑의교회의 담임목사가 2015년 4월, 만 4년 만에 부산사랑의교회를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산사랑의교회는 노회가 정당한 공동의회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주장하며, 공동의회를 통과한 목사를 자신들의 담임목사로 세워 개척한 교회였다. 그런데 그 목사가 사임한 것이다. 많은 경우 분쟁으로 갈라진 교회는 서로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교류가 일어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런데 김학준 목사가 부산사랑의교회 당회에 사랑의교회 청년부에서 함께 동역했던 염부섭 목사를 후임 목사로 추천했다.
“부산사랑의교회가 갈라져 나갈 때 함께했던 목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시게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죠. 자신들이 평생 섬기던 교회를 이탈하면서까지 따르던 목사님이 갑자기 그 교회를 떠나니 교인들은 상처가 얼마나 컸겠어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각해 보니 사실 교회가 그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분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들이었어요. 주님께서는 저들까지도 사랑하길 원하실 것 같더군요. 그런데 형제로서 어떻게 사랑하면 되느냐 생각해 보니 정말 저보다 더 좋은 목사님이 오시도록 도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염부섭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염부섭 목사에게는 삼고초려를 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몰아서 염 목사님이 부산사랑의교회에 오도록 하셨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제 두 교회 사이는 더 이상의 갈등이 없고, 서로가 축복해 주는 사이가 됐습니다. 서로 감사하고 형제 교회처럼 돼 가고 있어요. 앞으로 더 좋은 소식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거기도 이제 제자훈련을 시작했거든요.”
원수처럼 갈라져 지내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들에게 후임목사를 추천한다는 것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지은 전도사는 그 당시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인들이 목사님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사실 그렇게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도 김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하나 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그 일을 추진하셨어요.”
김 목사가 염 목사를 부산사랑의교회에 추천한 이유 역시 염 목사가 부산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진행하기에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진정성이 부산사랑의교회의 온 교우들과 장로님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염부섭 목사는 2015년 7월 부산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됐다.
마치 신평로교회에서 김 목사의 부임 즉시 제자훈련이 시작된 것처럼 부산사랑의교회도 올해부터 제자훈련이 시작됐다. 김 목사를 비롯한 신평로교회의 교역자들은 신평로교회와 부산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형제교회가 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역동적 제자 공동체, 신평로교회
신평로교회의 홈페이지는 신평로교회를 “역동적 제자 공동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 표어처럼 신평로교회는 과거의 아픔이나, 전통적 형식주의,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기복주의에 묶여 있기를 거부하는 교회였다. 그리고 한 명의 목회자가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겠다는 철학과 열정을 가지고 뛸 때, 얼마나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아직 신평로교회 제자훈련의 역사는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놀라운 변화와 열매를 맺고 있다. ‘저 교회만 가지 말라’라고 지역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교회에서 이제는 주 4회 무료 급식봉사(사랑의 밥 나누기)도 거뜬히 감당하는, 봉사 잘하고, 역동적인 예배와 성장과 사랑이 넘치는 좋은 교회로 불리운다.
이는 꾸준히 제자훈련으로 체질을 개선하며 밭을 갈고 있는 진행 중인 열매들이다. 앞으로 더욱 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이후에 신평로교회가 참으로 김학준 목사가 처음 꿈꿨던 것처럼 “제자훈련 제일 잘하는 교회”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