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제자훈련

2014년 05월

5 * 주님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시다

교회와제자훈련 조현용 목사_ 목포 빛과소금교회

제자훈련과 선교에만 전념하면서 누린 행복 
다른 개척 교회들이 봉고차를 사서 교인을 수송하고 심방할 때, 나는 자전거를 타고 걸어 다니며 심방하고 제자훈련을 했다. 교인들에게는 평생 조립식 예배당에서 지내도, 제자훈련과 선교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제자훈련에 미쳐서 쉬지 않고 제자훈련을 진행했다. 때로는 세 명을 데리고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한번은 사랑의교회에 가서 옥한흠 목사님을 처음 뵙고, 교회에서 간증도 했다. 그때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조 목사!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딱 3년만 엎드려 제자훈련에 전념해라. 그러면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해 주실 것이다!”
개척 1년이 되자 주일에 출석 교인이 100명이 넘었다. 그 좁은 예배당에서 더는 예배드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했다. 기도하던 중에 이면 주택가 깊숙한, 동네 하수가 모이는 저지대 공터를 임대했다. 좋은 흙으로 복토하고, 하수구를 정비해 대지를 만들고, 120평 조립식 예배당을 건축했다. 18평 예배당에서 120평으로 이사를 하니, 대궐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비록 조립식 예배당이지만 담임목사실과 사무실도 만들고 제자훈련실도 마련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국제제자훈련원을 쫓아다니면서 배우려고 노력하며 제자훈련에 전념했다. 외부 출입도 거의 하지 않고, 제자훈련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만 힘썼다. 이렇게 열심히 제자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훈련 시간마다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은혜와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눈에 띄게 변화되는 훈련생들을 보는 기쁨은 어느 모임, 어떤 자리보다 나를 행복하게 했다.
개척하고 5년이 됐을 때, 교인들이 성전 건축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금을 들었다. 그런데 그해 가을에 한 분이 나를 찾아와 교회를 건축할 땅을 팔겠으니 제발 사달라고 사정했다. 국유지를 불하받았는데, 대금 납부가 어려워 그중 제일 좋은 위치를 우선 팔겠다는 것이었다. 사정에 못 이겨 3,700평의 부지를 시가의 30%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매입했다.

 

사랑의교회 탐방 목사 1호가 되다
개척하고 6년이 지난 후 첫 안식년을 맞이했다. 교회에서는 성지 순례를 하고, 쉬면서 배울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 줬다. 안식년을 어떻게 보낼지 기도하던 중에 사랑의교회에 가서 현장을 보며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옥한흠 목사님을 찾아가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래! 조 목사가 사랑의교회 탐방 목사 1호네. 그러나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예!”
서울에 방을 얻어 두 달 동안 매일 사랑의교회로 출근했다. 첫 안식년을 사랑의교회 탐방 목사로 간 것은, 그동안 제자훈련을 바르게 한 것인지, 수정하고 보완할 사항은 무엇이며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제자훈련은 어떻게 하는지를 모델 교회에 가서 직접 살펴보며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옥한흠 목사님의 배려로 사랑의교회가 시행하는 거의 모든 사역을 보고 듣고 참관할 수 있었다.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교육 기관의 사역들을 참관했다. 여러 다락방과 각각 다른 제자훈련, 사역훈련반에 들어가 보고 배웠다.
백문 불여일견이었다. 옥 목사님과 사랑의교회를 통해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 그동안 내가 제자훈련을 올바른 방향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용기도 얻었다. 그러나 제자가 제자를 낳는다는 말을 체감하면서,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보기도 했다. 참된 제자훈련은 담임목사인 나 자신이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내가 먼저 예수의 제자답게 살겠다고 결심하다 
사랑의교회를 탐방하며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온 후, 나는 참된 제자훈련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무엇보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답게 섬기는 종으로 살겠다고 작정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는 말씀을 생각하며, 주님께 영광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섬겨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서 국내외 선교 기관과 선교사들, 농어촌 미자립 교회와 도시 개척 교회를 후원하고 섬기며 협력하는 일에 적극 관심을 보이자, 어떤 분은 무슨 목적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그저 오직 하나, 주님의 제자답게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한편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렇게 몇 년을 계속해서 섬기니 동역자들과 많은 분들이 진심을 알고 격려해 줬다. 그런 가운데 시내 동역자들의 요청으로 ‘초교파 목사 제자훈련반’을 하게 됐다. 매주 화요일 오전에 열한 분의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 1년 동안 수료할 때까지 제자훈련을 함께했다. 그때 만났던 분들과는 지금까지 사랑과 신뢰 속에서 계속 교분을 나누고 있다.
이렇게 제자훈련을 계속하면서 주님의 제자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교회는 평안하고 건강하게 성장해 갔다. 이에 따라 나는 노회와 총회의 부름을 받아 더 많은 부분에서 이웃을 섬길 수 있게 됐다.
빛과소금교회를 개척했을 때는 이웃 교회와의 거리가 500m 내에 있다는 이유로 노회 가입도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노회원들의 추대를 받아 노회장이 되고, 목포시 기독교교회협의회장이 돼 어려운 교회와 동역자를 섬기고, 교계 연합 사업과 선교 사역에 헌신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내용을 밝히는 이유는, 처음 옥한흠 목사님께서 주셨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른 일에 마음 쓰지 말고 3년만 열심히 엎드려 제자훈련에 전념해라! 그러면 주님께서 조 목사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옥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옥 목사님은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제자훈련을 교회 성장의 방법이나, 목회의 효과적인 교인 양육 수단으로 오해하는 이도 있다. 나는 제자훈련을 잘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누렸다. 나는 제자훈련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목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역이며,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장 올바른 사역이라고 확신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세워야 할 본분을 가지고 살고 있다.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남편과 아내 등 사람을 사람답게 세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부모와 스승과 목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녀 잘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어떤 목사가 성도들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나는 제자훈련을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해서 목숨을 걸고 했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니, 훈련생들도 열심을 냈고 좋은 평신도 동역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때의 제자훈련생들이 지금은 장로, 권사가 돼 동역하고 있는데, 김희숙 권사는 요즘도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는 목사님이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시켰는지 어쩌다 특별한 일로 휴강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에,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까지 이렇게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건축 허가가 나지 않던 성전 건축부지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훈련을 한 지 10년째가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해야 했는데, 교회와 교회학교의 부흥과 다양해진 사역을 조립식 예배당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 건축부지는 5년 전에 마련해서 건축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교회가 만장일치로 성전 건축을 결의했지만, 그동안 선교에 전념했기에 성전 건축을 위한 예산이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교회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공표했다.
“성전 건축 때문에 목회자 생활비, 선교비, 교회 교육비를 절대 줄이거나 동결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고 주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성전 건축은 교회의 존재 목적 성취를 위한 한 방편이다.”
나는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지 않고 평소처럼 당회가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설계를 의뢰하고 절차를 알아보니, 건축 허가를 받는 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5년 전 성전 건축부지로 매입한 땅은 자연녹지로 건축할 수 없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땅이었다. 건축 허가를 받으려면 시 조례가 개정돼야 하는데, 자연녹지가 다른 시군보다 더 적어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목포시가 조례를 개정해서 건축 허가를 내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나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된다고 교회에 선포하고, 기도하면서 건축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위한 토목 설계와 기본 설계를 끝내고, 허가 부서의 담당자들을 찾아가 상의했는데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있는 땅이기에 건축 허가를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서 담당자를 찾아가 건축 허가를 받을 길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1년에 한두 차례 열리는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조정안이 결의되면, 시장이 시의회에 부의하고, 시 의회의 결의를 거쳐 공포가 된 후에야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녹지 확보가 급선무인 도시계획위원회나 시장, 시 의회가 허가해줄 리 만무하니, 그 부지에 건축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건축부지를 마련하는 것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삼일 동안 금식기도 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갔던 에스더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건축 허가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서 담당 부서를 찾아가 알아보고, 여의치 않으면 행정 소송이라도 해봐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시청으로 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국립대학교 교수인 우리 교회 집사님이, 시장과 점심 식사를 하려는데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함께 식사하고 싶다며 전화를 한 것이다. “사람을 잘 만나면 일이 이뤄지고,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김장환 목사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주님께서 건축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식당으로 달려갔다.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시장은 “목사님이 무슨 서류 봉투를 들고 다니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주님이 시장과 독대할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임을 확신했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시장께 상세히 설명하고 적극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렸다.
불교 신도회 회장인 시장은 웃으면서, “목사님! 걱정 마시고 식사나 드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인데, 뭘 걱정하십니까? 그리고 여기 계신 김 교수님이 목포시 도시계획심의위원이고, 목사님 교회 집사인데 무슨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시계획심의위원회가 다음 주에 열리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약속해 줬다. 그렇게 어려워 보였던 성전 건축 허가는 주님의 은혜로 두 달 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면적이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되면서 바로 받게 됐다. 성전 건축을 한창 하고 있던 어느 날, 시장은 건축 현장을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조그만 예배당을 짓는 줄 알고 허가를 해 드렸는데 어마어마하네요! 이렇게 큰 예배당을 건축할 줄 알았다면 그때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주님의 은혜로 성전 건축 허가를 받는 순간, 지나온 10년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어려워 빚을 내고 집사의 집 지붕위에 18평 조립식 예배당을 건축해 개척 교회를 시작하던 첫날, “주님! 3년 안에 장년 출석 100명만 허락해 주십시오! 5년이 되면 성전을 건축할 부지를 시내 한복판에 1,000평 이상 마련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10년이 되면 성전을 건축해 교회다운 사역을 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었는데, 신실하신 주님이 종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음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저절로 찬송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성전을 건축하게 됐는데, 자연녹지에 건축하니 우선 토목 공사가 큰일이었다. 그래서 겨울을 보내며 기도로 많이 준비하고, 봄이 되면 건축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설계도를 검토하면서 건축 규모가 점점 커졌는데, 은혜 가운데 준비하다 보니 이의가 없이 그저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저절로 잘 될 것으로 여기고 규모를 키운 것이다.
봄이 돌아와 2000년 3월 5일 주일 예배 후에 성전 건축부지에 모여 기공예배를 드리고 건축을 시작했다. 그때 가진 돈은 2,500만 원이 전부였는데, 중장비가 들어와 토목 공사를 시작할 수도 없는 액수였다. 그래서 교인들이 직접 공사를 하고 전문적인 부분만 전문 업자를 선정해서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터파기 공사를 시작하자 공사 차량 진출입로 옆의 주민들이 공사용 차량의 출입을 막고 공사 진행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형 트럭과 중장비의 출입으로 집에 균열과 침하가 예상된다면서, 선 보상을 요구했다. 정당한 건축 허가를 받고 공로(公路)를 이용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도로 양옆에 사는 주민들과 피해 발생 시 보상금과 공사가 끝날 때까지 협력하는 대가로 오천만 원을 약정하고, 은행에 공동명의로 예치했더니, 공사비가 하나도 없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 더더군다나 그때 IMF가 터져, 자금조달은 더 어려워졌다.

 

잡음 없이 모두가 똘똘 뭉쳐 건축을 진행하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건강한 교회로 인정을 받았기에, 필요한 건축비를 은행에서 대출받으려 하자 호의적으로 대해 줬다. 공무원인 교우들 명의로 십억 원을 신용 대출받기로 하고, 공무원인 교우들에게 재직 증명서를 가지고 대출을 받아달라고 했다.
IMF라 공무원들은 보증 금지를 지시받고 있었지만, 신실한 교우들이 기꺼이 보증을 서서 건축비를 대출받았고, 수많은 교우가 옥합을 깨뜨리는 헌금을 했다. 건축을 기공해서 준공을 받고 입당할 때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공사가 진행됐다. 8개월 만인 11월에 입당을 하고, 9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고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됐으니,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며 수많은 교우가 최선을 다한 헌신의 결과였다.
은행에서 신용 대출을 받아 건축비를 마련하려고 대출 겸 보증인으로 은행에 찾아온 많은 교인을 보고, 담당자가 걱정이 됐는지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지금 이 도장을 찍으면 얼마 대출을 받는지 아십니까? 아주머니 명의로 3천만 원이고 다른 두 분 보증까지 서시니 총 9천만 원인데 아십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허락된다면 전부 다 내가 대출받아 성전 건축을 하고 싶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이런 여 집사님의 말을 듣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사인만 해주시면, 건축 끝날 때까지 필요하신 모든 자금을 책임지고 빌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은 시간의 절반을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했고, 어떤 자매는 공사 기간 내내 모든 인부들과 현장에 나와서 봉사하는 모든 교우에게 간식과 식사를 제공하는 함바 식당의 주방장을 자원했다. 그 자매는 그 무더운 여름철 임시 수도가 연결된 먼지 나는 건축 현장에서 8개월 동안 날마다 시장을 보는 것에서부터 조리와 설거지까지 다 담당해 전신에 땀띠로 수를 놓을 만큼 헌신했다.
또 어떤 분은 오랫동안 집안에 소장돼 내려오던 고가의 고서화를 처분해 헌금했고, 어떤 분은 퇴직금을, 어떤 분은 적금 대출을 받아 건축 헌금을 드리는 등 공사를 마무리할 때까지 계속되는 감동으로 피곤함도 어려움도 모르고 건축을 마치게 됐다.
담임목사인 나는 성전을 건축하면서도 건축 현장에는 잘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날마다 제자훈련 하는 일과 교인 양육을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을 바쳤다. 시작부터 준공하기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그렇게 빨리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인 동시에, 제자훈련을 통해 교회가 건강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 교회가 짧은 시간에 그렇게 아름다운 성전 건축을 아무런 잡음도 어려움도 없이 거뜬하게 마치고 입당 예배를 드리자, 많은 이들이 교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봤고, 우뚝 선 성전만큼 교회의 위상과 영향력도 솟아오르게 됐다.

 

어려운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었던 성전 건축
순탄하게 성전 건축을 마친 후에 만나는 사람마다 “성전을 건축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하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겨우 빠져나온 사람에게 위로하는 것 같은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어려운 줄 모르고 잘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분들은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목사님, 얼마나 애간장이 녹으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전 건축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어려운 일이 없었고, 한 번도 마음에 어렵게 느껴진 일이 없었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은 성전을 준공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면서도,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감동이나 감격스러운 마음이 없었다.
제자훈련 하는 교회가 주님께 예배드리고, 제자훈련 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신앙 교육의 장을 만들고,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마땅히 필요한 건물을 건축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제자 된 우리는 마땅히 헌신해야 옳다고 생각했다. 성도들도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높은 언덕 위에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이 건축된 후 사람들은 나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조그만 조립식 교회에서 열심히 제자훈련 하면서 교회가 그런대로 부흥하는가 생각했던 이들이, 눈에 확 띄는 예배당을 건축한 후에는 신앙 여부를 떠나 목사를 달리 보는 것 같았다. 
성전 건축을 마치기까지 교우들이 최선을 다해 헌금했고, 건축을 하는 교우들은 전공을 살려 직접 건축에 나서는 등 최대한 건축비를 절약했지만, 정산을 해보니 12억 원의 은행 빚을 지게 됐다. 당시는 IMF로 대출 금리가 연리 8~9%로 높을 때여서 매달 나가는 이자도 상당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제자훈련을 통해 교회가 하나로 똘똘 뭉쳐 있어서, 무거운 짐을 나눠서 지면 넉넉히 감당할 수 있고 교회가 속히 부흥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목사인 나는 누가 얼마나 건축헌금을 드렸는지 기억하지 않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만 드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