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제자훈련

2014년 07월

7 * 아내의 죽음, 그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

교회와제자훈련 조현용 목사_ 목포 빛과소금교회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세상 모든 사람이 좋은 배필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배우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결혼하는 당사자와 그 부모들이 함께 좋은 사람을 찾는데, 우리가 어떤 배우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모를 만나느냐가 목회의 성공을 좌우한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창 2:18, 한글 KJV 번역본)는 성경 말씀처럼, ‘돕는 배필’이 절대 필요한 존재인 남자가 어떤 아내를 만나느냐는 후손에게 큰 영향을 준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 부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삶이 후손들에게 끼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남자에게는 좋은 아내가 필요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교회의 규모와 특성에 따라 사모의 비중과 역할은 차이가 있고, 목회자 가정과 교회가 주님의 은혜로 평안할 때는 사모의 역할과 중요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목회자의 가정이나 교회에 힘든 일이 있을 경우, 사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선배 목회자들보다 가정의 소중함을 알고, 가정을 회복하며 세우는 ‘가정 사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대부분의 목회자는 거룩한 소명 의식으로 가정보다는 교회를, 가족보다는 성도를 더 우선으로 여기며 사역하고, 새벽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도록 계속되는 목회 활동 때문에 정작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들과의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고 있다.
많은 목회자가 사모와 함께 활동한다. 개척 교회나 성장 과정의 교회는 평신도 동역자가 적어서 사모가 함께 사역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남자보다 여자 성도들이 많고, 여성들도 갈수록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사모의 동역이 요구되고 있다. 대부분의 교인은 목사와 사모가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모의 역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사모는 목사의 내조자요 목회 동역자로서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교회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자녀들을 돌보고, 가정 살림을 하며, 남편의 동역자로 내조해야 하고, 심지어 목회에 항상 쫓기는 남편 대신 이웃을 섬기는 일까지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사모의 일이 다양하고 막중하기에, 목사에게는 사모가 정말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실한 목회를 위해서는 먼저 가정 목회를 잘해야 한다. 결국 가정 목회의 성공은 목사보다는 사모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어떤 사모를 만나는지에 따라 목회의 명암이 달라진다.

 

목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모의 역할
일반 목회에서도 사모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제자훈련 목회를 하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제자훈련 하는 교회들도 남자 훈련생보다는 여자 훈련생들이 더 많은 것이 일반적인 실정이다. 제자훈련은 목사와 훈련생들이 1년 동안 매주 정기적으로 모여 2~3시간 동안 함께 마음을 열고 삶을 나눈다. 제자훈련 수료 후에는 사역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짧아도 2년 이상을 믿음의 가족으로 지내게 된다.
따라서 사모가 먼저 훈련을 받고 사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내조와 동역이 이뤄진다. 제자훈련을 하는 목사는 먼저 자신이 예수의 참된 제자가 돼야 하고, 누구보다도 사모가 먼저 제자훈련을 받고 신실한 제자로 세워지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서 사모가 제자훈련 목회를 이해하는 목사의 동역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훈련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 사모의 역할과 비중은 일반 목회자의 사모보다 더 크다.
일반 목회를 하든, 제자훈련 목회를 하든 분명한 것은 사모의 동역과 영향력은 목회자인 남편과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목사도 매일 새벽 함께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내조하며, 항상 곁에서 그림자처럼 목사 옆에서 동역하는 사모가 없다면, 목회를 잘할 수 없으며 특별히 제자훈련 목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모의 역할은 목사가 하는 사역의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사모는 담임목사 사역의 절반 정도가 아니라 목회 사역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동역자다. 평소 사모는 목사에게 가려져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만약 사모가 아프거나 어려운 일로 목사와 함께할 수 없게 되면 사모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통탄하게 될 것이다.

 

불신 가정의 아들과 모범 신앙 가정의 딸
내 아내는 60세대가 사는 신안군 섬마을에서 함께 자란 손아래 여동생의 친구였다. 그 부모님은 우리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부락민 대부분을 전도해 예수촌으로 만드셨던, 신앙의 모범으로 존경받는 장로님과 권사님이셨다. 우리 마을은 마을 사람 모두가 농번기에도 주일이면 일손을 놓고 철저하게 주일예배를 거룩하게 지키는 신앙 중심의 마을이었다.
아내의 부모님은 자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철저하게 양육하며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분들이었고, 우리 집은 가부장 제도가 엄격한 불신 가정으로 마을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집안이었다. 내 부모님은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혼을 내고 야단을 치셨지만, 아내의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아내의 부모님은 항상 자녀들에게 너그러웠고, 자녀들이 잘못하면 품고 기도해주시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아내와 그 형제들은 항상 얼굴이 밝고 성품이 활달했다. 나는 그런 가정의 모습이 부러웠고 그 형제 중에서 가장 참하고 고운 아내를 좋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가깝게 대면할 일이 없었고, 나중에서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다니다가 군에 입대해 아내와 편지를 나누게 됐다. 제대 후 아내와 교제하게 됐는데, 이때가 내게는 참 힘들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힘들었던 것은 군 복무를 마친 후, 취직을 못 하고 영적으로 방황을 하면서 그동안 받았던 은혜들을 많이 상실했다. 행복했던 것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내와 더 깊이 교제하며 사랑과 격려를 받고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교제를 계속하던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아내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 계획을 말씀드렸다.
두 분은 말없이 한참을 계시다가 주님의 뜻대로 되도록 기도하자면서 무척 힘들어하셨다. 당시의 나는 직장도, 믿음도 없었고, 불신 가정이면서 조부모님과 아버님은 계속 교회를 반대하시는 분들이셨으니,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모든 속사정까지 훤히 잘 아시는 아내의 부모님이 결혼을 허락하기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명확한 태도를 보인 아내 덕분에 결국은 양가의 허락을 받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여러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오직 한 가지, 내가 신앙생활 잘하는 것만을 소원했다. 그동안 방황하던 나는 결혼하면서 상당한 토지를 상속받고, 오랫동안 준비하던 취직을 하며 분가했다. 덕분에 생활의 염려는 없어졌지만, 아내가 그토록 바라던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의 믿음을 철저하게 지키고 신실하게 살면서, 내가 다시 은혜를 회복해 주님을 위해 살기를 소원하며 묵묵히 기도했다.

 

신앙생활에는 타협이 없었던 아내
그러던 중 우리는 두 딸을 낳고 기르는 부모가 됐다. 여전히 나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세상의 잘못된 문화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낙심하지 않고, 신앙에 관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 양보와 타협 없이 담대히 나갔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신앙에 대해서만은 아내의 뜻을 언제나 그대로 인정했는데, 그 이유는 만약 내가 아내의 신앙을 간섭하면 아내는 이혼도 불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가을 농사수확물 판매금과 만기가 된 적금, 보너스까지 나온 월급을 합했더니 상당한 거금이 됐다. 그 주일 아침에 아내는 내 앞에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헌금봉투에 넣었다. 당시 나는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던 때라 거액을 헌금하려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많은 돈을 다 헌금할 거야?” 아내는 나를 똑바로 보면서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 신앙생활이나 헌금생활에 간섭하면 당신과 같이 살 수 없어요!” 아내의 눈빛과 표정에서 분명한 결기가 느껴졌고, 나는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이나 헌금에 대해 간섭하면 정말 이혼도 불사하겠구나!’
그 후로도 아내는 신앙생활과 헌금에 있어 흐트러짐이 없었고, 나는 아내를 신뢰하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통해 헌금을 배웠고, 그 후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주님께 헌금을 드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은 아이들까지 어려서부터 성실히 헌금을 내게 됐다.

 

아내의 지혜로운 자녀 신앙 교육
우리는 딸 셋을 키웠는데 신학생 때는 몹시 어려운 미자립 시골 교회를 섬겼고, 도시 근교의 자립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지금의 교회를 개척해 부흥하기까지 상당 기간 생활에 쪼들리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허리띠를 졸라매 절약하고 검소하며 어려워도 주님께 감사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참 힘들었으니,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두 딸의 한 달 용돈이 500원이었다.
큰딸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집에 돌아올 때면 정말 배가 고팠는데, 친구들이 학교 앞 빵집에 들어가 500원짜리 빵을 사서 먹을 때마다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꾹 참고 집에 돌아왔지만 화가 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딸들이 불평하지 않았던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 교회에서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날 저녁, 가정예배를 드린 후 아내는 교회에서 받은 생활비를 말하면서, 이번 달에 드릴 헌금과 각종 예상 지출 항목과 액수를 구체적으로 가족들에게 알려 줬다. 그리고 이 돈으로 살림하기 빠듯하지만, 목사의 가정이 누구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려면, 먼저 헌금을 잘 드리고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항상 기도했다. 그래서 가정 형편을 훤히 아는 딸들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고 이제야 말하곤 한다.
아내는 아이들이 아플 때면 품에 안고 간절히 기도했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거뜬하게 회복되며 자랐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기도를 배웠고, 출가해 가정을 꾸리고 사는 지금까지 아이들의 건강이나 신앙생활 문제로 걱정해 본 적이 없었으니, 다 주님의 은혜요 신실한 아내의 신앙 교육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빛과소금교회를 개척하던 초창기까지 아내는 빠듯한 생활을 했으나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구원과 소명의 감격과 천국의 소망으로 감사하며 살았다. 아내는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한다”고 항상 말하면서, 자신은 초등학교 때 구원을 확신하게 됐는데 그 후 한 번도 그 소망이 흔들린 적이 없다고 했다. 결혼할 때부터 날마다 꼼꼼히 가계부를 쓰면서 선한 청지기로 살기 위해 힘썼던 아내의 알뜰한 수고 덕분에,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비록 아이들에게 여유롭게 해줄 수는 없었지만, 재능에 따라 원하는 공부도 시킬 수 있었다.
큰딸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장신대 대학원에서 교회음악 작곡을 공부했다. 지금은 교회학교 찬송을 작곡하며 명성교회를 섬기고 있다. 둘째 딸은 공부를 아주 잘했고 성악을 전공했는데, 어릴 때 받았던 소명 때문에 진로를 바꿔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현재 목사 안수를 받아 서울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막내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극동방송 PD와 결혼해 방송 선교를 하고 있다. 사실 아빠 된 나는 목회 사역의 분주함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만, 아내의 신실한 보살핌으로 아이들이 참하게 잘 자라줘 항상 주님과 아내에게 감사한다.

 

아내의 투병 생활
내가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한 후, 아내는 항상 모든 훈련의 첫 번째 훈련생으로 모범이 됐다. 나중에는 여자 제자반을 몇 개 인도하면서 신실하게 제자들을 세워나갔고, 언제나 든든한 동역자로 교회 부흥의 밀알 역할을 해 교우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주님의 은혜로 교회가 건강하게 부흥하고 성장해서, 담임목사인 나 역시 노회와 총회, 지역 사회와 대외 기관, 해외 선교 사역 등 많은 부름을 받고 이런저런 중직을 맡아 섬기게 돼 바쁘게 사역해야 했지만, 신실한 아내의 도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아내는 특별히 아픈 곳 없이 건강했고, 지구력도 있어서 등산을 가면 항상 정상을 정복하고 끝까지 등반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빛과소금교회를 개척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함께 등산한 후 아내가 복통으로 괴로워했다.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간과 쓸개에 결석이 생겼는데, 쓸개의 돌은 수술해야 하지만 간의 결석은 수술이 불가능하니 지켜봐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단 수술을 예약했는데, 아내는 우리 교회가 곧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니, 먼저 주님께 맡기고 작정 기도를 하겠다며 수술을 거부하고 40일 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덕분에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다시 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깨끗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아내는 다시 건강해져 의욕적으로 활동했고, 지난 2010년 CAL-NET 팀장 중국 황산 수련회 때는 서해 대협곡을 거뜬히 주행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1월, 아내는 감기몸살로 감기약을 복용하고 영양제 주사를 맞으면 괜찮아졌다가, 며칠 지나면 또 피곤해하는 증상이 반복됐다. 서울 아산병원까지 다니면서 검사를 했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나서 5월 초에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나와 함께 한국 선교사들을 위한 집회를 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 아산병원에 가서 입원 정밀검사를 받아 보니, 간내 담도관 말기 암이라고 했다. 치료가 불가능하고, 예후가 좋지 않아 생존 기간이 짧다는 결과가 나왔다. 주님께 기도하며 백방으로 치료의 길을 찾는 중에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센신병원에서 자가 면역 배양치료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기에, 아내와 함께 인천-후쿠오카-구마모토를 경유하며 치료를 받았다. 그렇지만 대동맥과 연결된 곳에 생긴 종양이 대동맥을 침범했기 때문에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할 수 없이 교회와 집에서 가까운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천국으로 간 아내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아내는 다른 환자와 달리 거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는 신음하며 힘들어했는데,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줬다. “여보! 당신의 신음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평생 주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겠소!” 아내는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해요!” 며칠이 지나자 아내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로 눈만 뜨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아내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무 말을 못 해도 당신의 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평생 감사하고 살 거요!” 말을 할 수 없는 아내는 내 말을 듣고 눈가에 눈물을 흘리며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또 며칠이 지나자 아내는 눈도 뜨지 못하고 그저 듣기만 하며 겨우 숨만 쉬고 있었는데, 나는 아내의 얼굴을 안고 아내의 귀에 속삭였다. “여보! 사랑해! 당신이 눈을 뜨지 못하고 아무 말을 할 수 없어도, 당신의 숨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이요!” 내 말을 들은 아내의 눈가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날부터 꼭 3개월이 되던 날, 아내는 내 품에 안겨 세 딸과 가족들이 찬송하는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천국으로 먼저 갔다. 입관 예배를 드리기 전 마지막으로 아내의 얼굴을 봤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운지!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 딸이었던지,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갔지만, 고통 없이 지내다가 부름 받고 주님께서 예쁘게 해 주셔서 생전의 아름다웠던 모습 이상이었다.
아내를 먼저 보내며 내 심장도 함께 보낸 것 같았다. 사랑이 깊으면 그리움과 아픔이 얼마나 깊은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슬프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내 몸 모든 것이 다 죽은 것처럼 느낄 정도였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동역자가 금식하며 중보기도 했는데, 먼저 간 아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겨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우리 교회 교인들 모두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통함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의 소망이 주님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요, 그동안 우리가 주님의 제자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은혜가 우리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께 있으니
아내가 떠나간 지 만 3년을 보내면서 담임목사의 아내는 목회의 절반 이상이 아니라 전부였음을 나는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교회가 미동하지 않고 든든히 설 수 있었음은 오직 주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제자훈련으로 다져진 은혜의 결과였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슬펐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소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최선을 다해 주님의 제자를 세우는 목사가 되기 위해, 제자훈련에 목숨을 걸고 세 개의 제자반을 인도하고 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요 참 소망이며, 영원한 기업임을 절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