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제자훈련

2013년 04월

변방의 제자훈련 웃음꽃이 피다

교회와제자훈련 오석준 목사_ 통영 한우리교회



‘동양의 나폴리’라고 하는 이곳 통영에 8년 전 부임해왔다. 그러나 교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전임 목사의 문제와 교회의 영적 상태는 내가 생각했던 교회의 바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부임 당시 교회는 각종 은사(방언), 입신, 예언 등 신비주의에 젖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교회라기보다 차라리 기도원에 가까웠다. 너무나 힘들어 새벽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데, 왜 나를 여기에 보냈습니까?”라며 기도했다. 참으로 박토 같은 척박한 토양이었다.
이런 박토 같은 토양을 옥토로 만드는 것은 오직 교인들의 신앙 성장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모든 교인을 대상으로 ‘확신반’을 시작했다. 이어 ‘성장반’을 시작할 즈음, 여기저기서 “이런 훈련 안 받고도 예수 잘 믿었는데, 왜 새삼스레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느냐?”며 영적 은사의 금단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은사와 복음에 대한 이질감을 느낀 몇 가정이 나가 교회를 개척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고, 목회에 대한 허탈감을 느꼈다. 그때가 부임 후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그때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에 보내신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12명의 여자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1기 제자훈련을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전투적으로 인도했다. 제자훈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성도들이다 보니, 4명이 탈락하고 8명이 수료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현재 여자 제자훈련은 4기를 수료하고, 5기를 준비하고 있다. 여자 사역훈련은 2기를 수료하고, 3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 1기 제자훈련은 호기롭게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폐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씩이나 폐강을 거듭하다 2기를 수료하고, 이제 3기를 시작했다. 통영에서의 제자훈련은 부침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자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고(故)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변방지역의 목회자 출신이지만, 그분의 제자훈련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다.
부교역자 시절 1주일에 4~5개의 대학을 다니며 제자훈련 흉내를 내다 1994년 CAL세미나를 수료했다. 이후 단독 목회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기존 교회는 제자훈련을 할 만큼 그리 개방적이지 않았다. 경산당리교회에서 10년간 사역하며 제자훈련을 시도했지만 많은 벽에 부딪쳤다. 제직부터 훈련을 시작했지만 1기를 마치고 여러 사정으로 인해 주저앉고 말았다.
대안으로 10년간 한 주도 빠짐없이 ‘새가족반’(사랑의교회 교재)을 계속했다. 그리고 청년 15명을 붙들고 제자훈련을 시켜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인물로 성장시킨 후,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통영에 왔다. 바닷가 문화라 기복주의가 심하고, 신앙은 있으나 인격이 성숙되지 못한 이곳에서 지난 8년간 오직 한 생명을 붙들고 몸부림쳤다.
1기를 12명으로 시작한 것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4명 이상 훈련을 시켜 본 적이 없다. 어떤 기수는 1명을 놓고 바보처럼 1년간 씨름한 적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 이렇게 어리석게 훈련하는 교회가 있을까?” 할 정도로 한 생명에 올인 했다. 8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는 8명의 평신도 지도자가 8개의 목장을 섬기게 되었고, 각 목장마다 웃음꽃이 피는 건강한 교회가 되었다. 생전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군상 같은 100명보다 잘 키운 제자 10명이 낫다”고 하셨다. 물론 한 기수에 여러 반으로 훈련하는 교회와는 비교가 된다. 그러나 주님은 다수보다 소수에 집중하셨다. 나 역시 한 생명을 향한 영광을 바라보며 봄 사역을 계속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