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지금까지 중세의 뒷골목과 민얼굴을 봤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 시대로 넘어가기 전에 중세의 최후 변론을 들어보겠다. 중세 천 년의 유산은 무엇인가? 중세를 현대의 모태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우리가 관용적이라면, 근대인들과 현대인들은 중세로부터 어떤 빚을 졌는가? 중세에도 분명히 간헐적인 빛이 있었다. 어거스틴, 얀 후스, 존 위클리프, 존 번연 등이다.
한편 중세가 저물던 시기에 르네상스라고 하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르네상스가 종교 개혁을 불러왔다. 16세기의 운동은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원본)로부터 가져와 현재를 개선하는 운동이었다. 이른바 ‘아드 폰 테스’(ad fontes), ‘원전으로부터’ 였다. 르네상스는 사회적으로는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교회적으로는 종교 개혁 곧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르네상스는 중세인들을 미신과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했고, 고대 헬라와 라틴의 원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의욕을 북돋우며 그 방법까지 제공해, 예술과 문학에 대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도록 자극했다.
르네상스는 모든 중세적인 요소와 특징들, 가령 봉건 제도, 수도원, 십자군, 교황 제도, 마녀사냥을 넘어서서 민족주의, 시대정신, 개인주의, 탐구와 자유, 헬라와 라틴 고전의 재발견, 관찰과 실험 등을 생산케 했다.
종교 개혁의 다리를 놓은 에라스무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는데, 이들은 고딕 문화와 봉건제를 넘어서기 원했다. 이들은 고대 로마의 멸망 이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면서 소위 ‘야만인’들과 차별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런 열망은 상업으로 막대한 부가 축적된 피렌체와 베니스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메디치 가문에서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흥왕했다.
특히 14세기 말 네덜란드에서는 데모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이 일어났는데, ‘근대적 경건’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종교 개혁에 자양분이 됐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과 저서로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들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에라스무스가 등장하는데, 에라스무스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르네상스가 종교 개혁에 미친 영향의 정점에는 에라스무스가 있다. 당시 왕, 황제, 교황, 추기경 등은 모두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초청에 와 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헨리8세는 손수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프랑수아1세도 파리로 오라는 초청장을 그에게 보냈다. 이는 그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온화한 성품과 위트를 지녔으며, 100여 권 이상의 저서를 통해 그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루터와 칼뱅을 ‘에라스무스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성경 때문이다. 그는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이는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고전을 중요시한 르네상스와 복음으로 돌아가려고 한 종교 개혁 양자에 큰 공헌이었다.
그뿐 아니라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지지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루터가 결코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했다. 이것은 당시 초기 종교 개혁이 자리를 잡는 일과 수세에 몰리던 루터와 개혁진영에 매우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루터를 옹호하면서도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의 길을 가기는 주저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나는 루터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순교자가 될 힘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에라스무스는 이 같이 방관자적인 자세로 결국 로마 가톨릭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종교 개혁가들에게서도 비난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으로 가는 다리를 놓았지만 그 자신이 다리를 건너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가 남긴 공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희랍어 신약성경을 번역한 일은 종교 개혁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루터라는 수사를 만나기 전에 에라스무스를 소환한다.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인물 중 한 사람인 에라스무스를 중심으로 중세의 상속 목록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라는 인물 이전에 중세 흑암기를 비춘 몇몇 인물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암흑기에 빛이 된 사람들
그 첫 번째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다. 간혹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라 불리는 그는 종교 개혁자들, 루터, 츠빙글리, 칼뱅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에서도 성인으로 존경받는다. 그는 중세가 시작되는 시기의 교부로 기독교 세계에 좋은 기초가 된 인물이다. 특히 펠라기안주의를 단호히 반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그의 신학은 장차 종교 개혁자들을 위한 변증을 제공해 줬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비틀어 반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를 가르쳤는데, 그 중심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생활을 시작하지만, 각자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증진한다는 ‘신인협력’을 주장하면서 7성례에 참가해 은총의 주입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와 함께 루터보다 100년 앞서서 종교 개혁의 여명을 비춘 인물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얀 후스(Jan Hus)를 들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순교했으며, 가톨릭의 부패와 맞섰고 자신들의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특히 위클리프는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했다. 그의 유해는 무덤에서 파헤쳐져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또한 얀 후스는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가톨릭의 부패를 지적하다 산채로 불타는 화형을 당했다. 그는 예수만이 진리라고 선포했고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또한 사제들만 마시던 포도주를 평신도들에게도 베풀었다.
이 시기에는 ‘데보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라는 운동이 등장했는데, 이 운동은 수도원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곧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의 게르하르트 흐루터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 운동은 종교 개혁가의 직접적인 배경이 됐고, 특히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유럽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 이렇게 공동생활 형제단 출신들이 전 유럽의 대학에 영향을 끼치는데, 그 가운데 장 스탄동크(Jean Standonck)가 총장으로 있었던 파리의 몬테기(Montaigu)대학은 종교 개혁에 있어 유명한 세 인물을 배출한다. 바로 에라스무스, 칼뱅,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다.
에라스무스와 종교 개혁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란 에라스무스는 후에 종교 개혁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감당한다. 그는 지금까지 종교 개혁으로 가는 여명기의 인물들이 소유한 유산을 종교 개혁자들의 손에 넘겨줬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번역한 희랍어 신약성경이다. 이는 르네상스의 절정이자, 인문주의가 종교 개혁에 준 선물이었다.
데모치오 모데르나가 수도원 내부를 개혁하는 운동이었다면, 에라스무스는 그것을 교회의 외부, 즉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으로 생각했다. 중세 시대의 수도원에서 사용한 수도사들의 의복과 수도원의 식단이 유럽의 보편적 의식 문화로 자리를 잡았던 것처럼, 에라스무스의 표현 곧 경구들은 영어를 포함해 모든 유럽어로 통용되는 관용구가 됐다.
에라스무스의 유명한 ‘잠언집’가운데 지금도 사용되는 것으로는 “십인십색”(As many men, as many mind),“필요악”(a necessary) 등이 있다. 그리고 ‘엔키리디온’과 ‘우신예찬’은 종교 개혁으로 가는 여명기에 선 유럽 지식인들을 흔들었다. 마침내 에라스무스의 모든 노력은 1516년 바젤에서 펴낸 ‘희랍어 신약성경’에서 정점을 찍었다. 성경 번역이 혁명을 불러온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성경
에라스무스를 이해하지 않고는 종교 개혁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제롬의 불가타성경의 오류를 바로잡은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성경(1516)은 종교 개혁의 시금석이 됐다. 루터가 9월 성경(1522)을 번역할 때 그의 책상에는 에라스무스의 성경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 이전에는 진정한 프로테스탄트는 없었다고까지 표현한다. 그만큼 종교 개혁자들은 모두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읽었고 담력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에라스무스의 성경 번역이 어땠기에 종교 개혁의 불을 던져 줬는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셨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에 대한 번역인데, 이 번역 하나가 종교 개혁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을 제롬의 불가타 번역은 ‘poenitentiam agite’(죗값을 치뤄라, 천국이 가까웠다)로 번역한 반면, 에라스무스의 1516판 번역은 ‘poeniteat vos’(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로 번역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를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메타노이아’가 죄에 대해 어떤 행위로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악한 행위에서 돌아서는 것이라는 주해를 달았다. 면죄부가 잘못됐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종교 개혁은 바로 이 번역에 빚을 지고 있다. 모든 개혁가들이 이 번역의 어깨를 짚고 넘어갔다.
당시 불가타의 ‘poenitentiam agite’은 사람들에게 ‘고해를 행하라’(do penance)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는데, 에라스무스는 이를 ‘회개하라’(do penitent)로 바꿨고, 그다음 판에서는 ‘resipiscite’, 즉 ‘마음을 바꾸라’(change your mind)로 번역해 고해성사와 보속(補贖)과 관련한 어떤 연관성도 제거했다.
이외에도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Logos’를 불가타는 ‘Verbum’(word)로 번역했으나, 에라스무스는 ‘Sermo’(Speech)로 번역한다. 이것은 말씀의 종들을 통해 회중에게 설교를 베푼다는 뜻으로, ‘강화’, ‘하나님의 설득’, ‘하나님의 웅변’과 같은 차원에서 로고스를 이해한 것이다. 이 번역은 모국어 성경을 자극했다. 오직 라틴어로만 성경을 읽고, 라틴어로만 찬송을 부르던 중세의 교회는 이제 자신들의 모국어 성경과 찬송을 부르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교회’를 불가타는 ‘ekklesia’로, 에라스무스는 ‘congregatio’로 번역했다. 에라스무스는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단어의 대체어로 ‘콩그레가티오’(회중)를 사용했지만 많은 반대로 다시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더군다나 누구도 감히 에라스무스를 넘어설 고전어 지식과 언변을 가지지 못해서 1516, 1519, 1522, 1527, 1535판의 거듭되는 개정판은 불가타성경을 대체할 성경과 권위 있는 번역서로 자리 잡았고, 종교 개혁가들의 든든한 힘이 됐다. 그의 책은 재빨리 프랑스어, 독일어, 보헤미아어, 영어로 번역됐다. 이렇게 번역된 모국어 성경을 읽는 회중과 설교자들은 보속과 고해성사, 면죄부의 공포와 울렁증에서 벗어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번역이 종교 개혁을 불러온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그의 종교 개혁 논문들을 불태우려고 했던 교황청은 에라스무스에게 손을 내밀지만, 에라스무스는 오히려 “루터의 주장에서 잘못된 것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종교 개혁에 힘을 실어 줬다.
또한 제2세대 종교 개혁가였던 칼뱅은 그의 처녀작으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에라스무스가 이 고전을 두 번이나 편찬하면서 누군가 이 책의 주석을 쓰기를 바랐는데, 칼뱅이 이에 응답한 것이다. 그리고 칼뱅은 에라스무스가 1516년 희랍어 성경을 출간했던 바젤에서 20년 후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간한다.
중세의 천 년은 성경이 기호로 전락한 시대였다. 성경이 사라진 곳에 무지와 타락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열기는 고전어 연구를 촉발시켰고, ‘원본으로’라는 구호는 성경 번역으로 잠자는 유럽과 교회를 깨웠다. 성경이 깨어나자 교회도 세상도 깨어났다.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이 승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