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전기물(Biography)을 읽다 보면 종종 신화 속의 인물이 된 사람들이 있다. 가령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경우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도 마찬가지다. 루터의 인간적인 면모와 저술,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방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조명해 보는 것은 종교 개혁이라는 큰 주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루터에게는 많은 호칭이 붙는다. 불꽃처럼 살았던 사람, 혼돈의 시대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걸어간 사람, 쫓기고 소환당하고, 위협 속에서도 노래 부른 사람, 우울증을 앓았지만 테이블에 앉아 거침없는 입담을 과시한 사람, 남편과 아버지로 살았던 사람 등이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 되다
마르틴 루터를 종교 개혁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2017년은 종교 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로, 전 세계 교회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교회 역사를 볼 때, 수많은 개혁자들이 있었기에 루터로부터 촉발된 개혁을 종교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카터 린더버그(Carter Lindberg)와 같은 학자는 ‘종교 개혁’을 ‘종교 개혁들’(Reformations, Not Reformation) 즉, ‘복수적인 개혁운동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종교 개혁은 다방면으로 발전해 고유한 교리와 전통을 형성했다.
종교 개혁을 이야기하면 루터파 종교 개혁, 로마 가톨릭 종교 개혁, 개혁파 종교 개혁, 급진적 종교 개혁 등을 들 수 있다. 또 몬테규대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에라스무스, 장 칼뱅,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들은 같은 대학, 같은 기숙사에서 공부했지만, 개혁 지향점은 각기 달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종교 개혁들’이 루터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다른 관점이, 다른 흐름이, 다른 교파가 시작됐다. 이런 모든 사실로 인해 루터를 종교 개혁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여러 학문을 섭렵한 청년기의 루터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더(Hans Luder)와 마가렛(Margarethe)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광산업자였다. 그가 농촌을 등지고 광산으로 떠났다는 것은 경작할 땅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는 광부들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성 안나의 도움(?)으로 몇 개의 용광로를 소유한 구리 제련업자가 된다.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출신의 어머니는 숲에 가서 땔감을 해야 할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루터의 기억 속 어머니는 늘 근면하고 아이들의 침상에서 기도하시는 분이었다.
루터는 만스펠트(Mansfeld)에서 초등 교육을 받는다. 1497년까지 문법과 수사학, 논리학, 라틴어를 배웠는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라틴어로 이해하고 말하며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장차 그가 국제적인 신학 논쟁을 펼칠 기본적 능력을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당시 배운 음악은 훗날 그가 종교 개혁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루터는 막데부르그(Magdeburg)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데보치오 모데르나를 경험한다. 약 1년간 그곳에서 체류하며 공동생활형제단과 교제하는데, 교회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신앙생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고향인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그 성당학교에 들어간다. 아이제나흐는 인구 4천 명 정도의 결코 작지 않은 도시로, 그곳에서 루터는 귀족 생활과 걸식 수도사들의 전통을 따라 생활한다.
이때 루터는 요하네스 브라운(J. Braun)이라는 신부에게서 시와 음악을 배우고 ‘성 안나 숭배’ 사상도 접한다. 또 힐텐(J. Hilten)의 설교도 듣게 되는데, 프란체스코회의 설교자였던 힐텐은 세속화된 기독교를 공격하다 바이마르 감옥에 투옥돼 아이제나흐 수도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루터는 1501년에 에어푸르트대학에 입학하는데, 1392년에 문을 연 이 대학은 인구 2만의 큰 도시에 위치해 있다. 당시 에어푸르트에는 66개의 교회와 각 종단들의 수도원이 있었다. 에어푸르트대학의 철학부는 ‘유명론’(Nominalism)을 가르치는 학교로 저명했고, ‘비아 모데르나’(Via moderna, 새로운 길)로 불리기도 했다.
루터는 교양학부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음악, 기하학, 천문학 등 일곱 가지 교양 과목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심리학, 니코마코스윤리학, 형이상학, 논리학을 공부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을 공부한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이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법전 한 권을 선물했다. 그는 똑똑한 아들이 법률 전문가로 자라 멋지게 결혼도 하고, 훗날 노년에 자신도 잘 부양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 교수가 된 루터
에어푸르트대학 시절 루터에게서 주목할 점은 그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접했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다. 사무엘서의 한 부분을 읽었는데, 그것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사무엘서를 다 읽고 싶었지만 마침 종이 울려 루터는 강의실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루터의 나이가 스무 살 즈음이었다고 한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다시 한 번 성경과 만난다. 부모와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에 입문한다. 그런데 수도원 생활은 루터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혼란과 절망을 안겨 줬다. 루터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지난 20년간 수사로 지냈습니다. 그동안 기도와 금식과 철야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나 자신을 고문했습니다. 추위는 나를 거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루터에 대해 수도원장은 “루터, 당신은 12개의 볼링 핀을 쓰러뜨리려 하는군요. 실제로는 9개밖에 없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동료 수사들은 루터를 이해할 수 없었고, 루터 역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루터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 찾으려 했다. 그러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로마서를 바울 당시의 토론 정도로 간주했고, 오히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이렇게 수도사들이 중세 신학자들의 책을 읽을 때 루터는 원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쓴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을 줄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훗날 “나는 간밤에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라고 했다. 그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정식 수도사가 된 루터에게 개인 성경이 지급됐다. 루터는 붉게 물든 성경을 받아 모든 장의 요약본을 만들 정도로 열심히 읽었고, 매년 2번 정독해 마침내 성경의 작은 가지들을 다 훑었다. 루터는 자신만이 수사들 중에 성경을 읽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즈음에 루터에게 또 다시 성경을 깊이 연구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가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 가게 된 것이다.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권유에 따라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1512년에 신학박사가 됐다. 그리고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비텐베르크대학의 성경 교수가 됐다. 대학에서 그는 시편을 강의했다. 이것은 그가 몸담았던 수도사의 삶과도 연관된다. 수도사들은 하루 동안 주어진 시편 말씀들을 묵상하며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편 31편 1절의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을 연구하며, 전통적인 스콜라신학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펼쳤다. 그리고 1515년에는 로마서 강의를 했는데, 이를 통해 어거스틴 신학에 가까워졌다.
또한 루터는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 강의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경 연구 결론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면죄부들의 효력의 포고에 대한 토론’ 즉, ‘95개조의 반박문’으로 알려진 논제를 비텐베르그성당의 벽에 붙이기에 이른다. 반박문의 제1조는 마태복음 4장 17절의 문제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95개조의 반박문은 성경을 사랑했던 루터의 경건과 열정의 결과물이었다.
<9월 성경>, 독일어로 성경 번역한 루터
95개조 반박문 사건 이후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추격을 받는다. 1518년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되고, 1519년 라이프치히, 1521년 보름스 국회로 소환된다. 보름스 국회에서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루터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는 몸이 되는데,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에서 보호했다.
바르트부르크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그가 고등학교를 다닌 곳으로 친척과 지인이 많았다. 또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적이 쫓아와도 쉽게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루터는 에르크 융커라는 이름의 기사로 변장해 생활한다.
이 일을 계기로 루터는 또다시 성경에 집중하는데, 이번에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9월 성경>이다. 당시에도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독일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어려웠고, 또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의 <9월 성경>은 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루터는 시장 상인들과 하녀들, 농부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독일어를 사용해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특히 그는 저지대 독일어와 고지대 독일어를 통합하는 번역으로, 표준 독일어를 만드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당시 독일은 서로 다른 지역끼리는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투리가 많았고, 루터의 가정도 아버지는 작센 안할트의 고지대 독일어를, 어머니 마가렛은 튀링겐의 저지대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9월 성경>이 표준 독일어, 곧 코이네 도이치(Koine Deutsche)가 된 것이다. 또 루터는 <9월 성경>에 삽화까지 넣었다.
또한 그의 성경은 당시 <구텐베르크 성경>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저렴한 1.5굴덴으로 판매됐다. 1455년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경은 ‘불가타 성경’으로, 그 값이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해 소 200마리의 값, 혹은 큰 저택 한 채의 값과 맞먹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은 그 가격이 구텐베르크 성경의 10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9월 성경>을 번역하는 데는 많은 사람의 협조가 있었다. 현자 프리드리히, 한스 폰 베를렙쉬, 멜란히톤, 슈바르체르트, 슈팔라틴,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 요한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뒤러, 루카스 크라나흐, 멜키오르 로터가 번역을 도왔다. 이 성경은 10주 동안 444페이지로 제작돼 라이프치히 무역박람회를 통해 첫 선을 보였다. 초판은 14쇄를 찍었고, 해적판은 무려 66쇄가 팔렸다. 그리고 3달 후 12월에는 574군데가 수정돼 인쇄됐고, 루터 사망 시까지 350판본이 인쇄됐다.
루터는 이 역작에 대해 “모든 것은 독일어로 기록됐다. 나는 독일인들을 위해 태어났다. 내가 섬기고 싶은 사람들은 그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신약성경의 번역이 끝났을 때 그는 “오 나의 밧모 섬이여! 나는 요한복음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이제 필리프와 나는 문장을 교정하며 미세하게 손보는 일을 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이 성경 번역이야말로 실로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저작권이나 인세를 요구하지 않았고, 출판과 인쇄업자들이 상당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았다. 이는 그의 나이 37세에 일어난 일이다.
종교 개혁과 성경은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갖는다. 종교 개혁은 성경의 사건이다. 모든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에서 출발해 자신들의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과연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었다. 말씀의 생명력은 죽었던 것들을 살렸고, 말씀의 운동력은 모든 비성경적인 것을 개혁했다. 오늘날의 종교 개혁도 결국 성경이 원천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종교 개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