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 찬송은 마르틴 루터가 1529년에 지은 찬송이다. 동시에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찬송이다. 그렇다면 개혁자 루터의 신앙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이신칭의’라는 매우 단편적인 종교 개혁사의 틀 안에서 그의 신학과 신앙을 이해한다. 그는 어떻게 회심했으며, 그에게 영향을 준 성경과 인물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를 진정 매료시킨 말씀은 무엇일까?
종종 마르틴 루터를 일컬어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는 참으로 다양한 옷을 입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은자 수도원의 조잡한 모직 수도사복에서부터, 비텐베르크대학의 성경 교수가 됐을 때는 모피를 덧댄 교수 가운을 입었다. 그러나 보름스 국회에 소환된 이후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해 있을 때에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과 함께 기사복을 입었다. 이후 그는 한 명의 신자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설교자로, 그리고 개혁자로 돌아간다. 지금부터 루터의 신앙과 신학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살펴보겠다.
여호와의 포도원을 허는 멧돼지
1580년 테오도르 드 베즈(Thedore de Beze)가 <이코네스>(Icones)라는 재밌는 책을 남겼는데, 이 책은 종교 개혁 영웅들의 초상과 촌철살인과도 같은 인물평과 묘비명을 담고 있다. 베즈는 마르틴 루터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일단 베즈는 루터의 인물평 타이틀을 ‘비텐베르크교회의 목사이며, 로마 적그리스도의 골칫거리’로 잡았다.
베즈는 “만스텔트 백작령에 있는 아이스레벤 출신 마르틴 루터의 용모는, 그의 모든 자세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어넣어 주신 위대한 용기를 보여 주며, 거기에 매우 고귀한 경건과 특출한 열정이 동반된 용모를 가졌다. 매우 선하고 매우 능력 있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불쌍히 여기사 사탄의 가장 큰 오물들(즉 아우구스티누스 수사들) 가운데서 엄청난 기적으로 이 인물을 일으켜 세우셨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무지의 짙은 어둠 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끌어내 세상에 제시하고 교회를 다시 정화하게 하기 위함이다.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는 적그리스도에게 지목됐으나, 오히려 후에 이 존재를 하나님의 말씀의 회초리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추방했다. 황제들, 왕들, 로마에서 날아온 징벌과 파문들, 무수히 많은 스콜라주의 도당들은 결코 이 인물을 흔들 수 없었다. 오늘날 개혁교회는 그가 베푼 선한 섬김으로 인해, 지난 수백 년 동안 있었던 어떤 누구 못지않은 빚을 지고 있다. 그는 1517년 당시 34세의 나이로 교회를 정화했고, 1546년 2월 17일 63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죽었다”라고 루터에 대한 인물평을 적었다.
루터는 누구인가? 먼저 로마 교황청은 루터를 ‘여호와의 포도원을 허는 멧돼지’라고 불렀다. 교황청은 그 누구도 루터와 교제해서는 안 되며, 범죄자 루터를 체포해 로마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러나 인물평과 같이 루터는 분명 교황청의 골칫거리였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계셨다. 루터는 가장 힘들 때와 용기를 필요로 할 때, 이 찬송을 부르며 인내하고 견뎠다.
루터의 신앙과 신학의 여정은 중세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마녀의 존재를 믿었고, 성 안나의 숭배 사상을 지닌 채 자랐다. 대학을 마치고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신앙은 성 안나 숭배 사상이었다.
그러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접한 루터는 수도 생활에 대한 한계를 깨닫고, 동시에 성경에 대한 깊이를 더했다. 수도원은 루터 자신을 더 자세히 알게 했다. 또한 루터는 이 무렵, 로마에 대해 알게 된다. 수도원 일로 로마를 다녀온 그는 수도원과 교황청이 어떤 곳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루터는 참으로 철저히 종교적이었고, 중세적이었고, 스콜라적이었고, 가톨릭적이었다. 진정한 옛 종교인이었던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깨달은 것은 수도 생활을 통해서 구원받기는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찰과 결론은 루터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는데, 가령 시편 71편 2절과 같은 구절이다. 루터는 가브리엘 비엘이 지은 <미사법 해석>에서 그리스도는 심판자라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다. 심판만 강조돼 있을 뿐 은총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비엘은 마리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보다 마리아를 더 신뢰했다. 실제로 수도원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폭군으로 간주됐고, 율법을 수여하던 모세나 다를 바가 없었다.
루터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고해 신부였던 슈타우피츠(Staupitz)다. 그는 루터에게 그리스도를 새로운 방법으로 보도록 가르쳤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루터의 신학은 우리가 일갈하는 것과 같이 ‘이신칭의’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신학’이 됐다.
시편의 사람, 루터
루터를 지도하던 슈타우피츠가 종단의 부총회장을 맡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면서 루터는 그의 뒤를 이어 비텐베르그대학의 성경 교수가 됐다. 이는 루터가 더 깊이 성경으로 천착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그는 수사복을 벗고 교수의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마침내 1517년 그는 순수한 의미의 토론의 강령을 성당 벽에 붙였다. 그것이 바로 ‘95개조 반박문’이다.
루터는 대학에서 시편을 강의했다. 그리고 바울서신으로 넘어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했다. 이런 일련의 연구 과정을 통해 ‘십자가의 신학’이 구체화됐다. 95개조의 반박문은 부패한 옛 종교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을 종교 개혁에 일조한 구절로 알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루터가 로마서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갈라디아서를 가장 많이 강의했다.
그의 칭의론의 정수도 갈라디아서에서 나왔다. 또한 루터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성경은 바로 ‘시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루터는 시편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시편은 가장 편한 옷이었다. 20년간의 수도사 생활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편을 암송했다. 수사들의 기도문은 대부분이 시편이었다. 수사들은 매일 주어진 시편 말씀들을 묵상하며 기도했다. 루터에게 시편은 진정한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특히 시편 31편 1절의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은 루터에게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그리스도는 심판자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벌하는 것인데, 어떻게 주의 공의로 건져질 수 있다는 말인가? 스콜라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란 죄인을 벌하는 것이기에, 결국 루터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편에서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면 로마서는 그 해답을 가져다줬다.
그가 저술한 라틴어 전집의 서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이미 그해에 시편을 새롭게 해석하는 일로 돌아와 있었다. 대학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하면서 내가 좀 더 능숙해졌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실제로 나는 로마서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비상한 향기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의 길을 방해한 것은 마음의 차가운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미워했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교사들의 용법과 관습을 따라 나는 이 단어를 불의한 죄인을 벌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나는 수도사로서 흠 없이 생활했지만, 극도로 혼란스러운 양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느꼈다. 나는 죄인들을 벌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미워했다. 그리고 신성 모독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나는 은밀하게 하나님께 화를 내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정말 열렬히 바울이 원하는 것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 그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계시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이전에 미워했던 것만큼 달콤한 단어로 다가와 그분을 찬양하게 됐다.”
루터는 그의 두 번째 시편강해집(Operationes in Psalmos)에서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라고 말한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참된 신학이다.
면벌부에 맞서 95개조 반박문 발표
에어푸르트대학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접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성경을 깊이 있게 읽고,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경에 눈을 뜬 루터는 드디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95개조의 반박문’으로 알고 있는 논제의 원래 제목은 ‘면벌부들의 효력의 포고에 대한 토론’(Disputatio prodeclaratione indulgentiarum)이다.
면벌부는 원래 죄를 용서해 주는 증서가 아니라, 교회가 부과한 형벌을 사면해 주는 증서였다. 원치 않게 죄를 지은 이들을 위해 만든 고해 성사는 이후 모든 죄가 이 고해 제도를 통해 용서받는 고해 성사로 바뀌었고, 개인 고해로 바뀌었다. 고해에는 응분의 대가, 즉 보속이 있는데 기도와 철야, 금식과 자선, 순례와 건축 기금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보속에 부과된 형벌을 감면해 주는 증서가 됐다. 유명한 면벌부 설교자 테첼은 “면벌부 상자에 돈이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거기에서 뛰어나옵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는 “여러분이 집요하게 뜬세상의 이익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깨어 있으십시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당신들의 죽은 부모와 다른 사람들이 소리치며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네가 하려고만 한다면 잔돈 몇 푼으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심한 벌과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단다.’ 귀를 열고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며 어머니가 딸을 부르는 그 소리를 들어 보시오”라며 회중을 감동(?)시켰다.
이에 맞서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1~7항은 회개에 대해, 8~29항은 죽은 자의 면벌부와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세에 대해, 30~40항은 산 자들을 위한 면벌부에 대해, 41~52항까지는 면벌부와 성 베드로 성당 건축 기금에 대해, 53~80항은 면벌부 설교와 복음 설교의 비교를, 81~91항까지는 영혼을 사랑하는 교황이나 감독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마지막으로 92~95항은 결론으로서 의롭게 된 신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95개조 반박문은 처음에는 라틴어로 벽에 붙었지만, 독일어로 번역돼 세상에 퍼졌다. 가는 곳마다 이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도저히 덮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어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3개의 논문을 통해 발전시킨다. 이것이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이다. 이 논문은 발간한 지 보름 만에 4천 부나 팔렸다. 과히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이어 <교회의 바벨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발간됐다.
이제 루터는 유명해졌고, 그 자신이 이 주장에 대해서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추기경이었던 카예탄과 엑크는 교황을 선동해 ‘주여 일어나소서’라는 칙서를 발표한다. 41개 조항의 파면 칙서가 내려진 후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된다. 그리고 루터는 칼 5세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도 자주 오류를 범했고 서로 모순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저를 성경의 증거나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들을 통해서 반박하지 않는다면 저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리고 이 무렵에 그가 부른 노래가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다. 이후 루터는 9월 성경과 12월 성경을 비롯해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농민 봉기와 재세례파의 주장에 대해 거부하면서 개혁의 기준을 선명히 해 나간다. 찬송을 개혁해 많은 찬송을 지었는데 무려 46개의 찬송이 찬송가에 실렸다.
교회 개혁 외에도 사회 개혁 기준을 제시하면서 종교 개혁의 방향을 이끌었고, 에라스무스와는 자유 의지 논쟁을, 츠빙글리와는 성찬론 논쟁을 벌이면서 대소요리문답과 아우그스부르크 신앙 고백서와 슈말칼텐 신조를 작성했다.
루터는 1546년 아이슬레벤으로 세 아들과 함께 여행하던 중 지병으로 고향에서 죽음을 맞았다. 루터의 신학은 제2세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지만 그 어떤 누구도 루터의 업적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마르틴 루터! 그는 누구보다 십자가를 사랑했던 십자가 신앙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