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우리는 종교 개혁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한 수사가 환상 중에 음성을 듣고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루터보다 150년 전인 14세기에 위클리프가 일으킨 종교 개혁의 바람에 얀 후스가 일어났고, 네덜란드에서는 데보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로, 15세기 유럽의 각 대학에서는 비아 안티쿠아(Via Antiqua)를 버리고 비아 모데르나(Via Moderna)로,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모(Meaux)지방에서, 스위스에서는 제네바에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리고 유럽의 각 도시에서 마치 나비 효과와 같이 르네상스라는 화원에 종교 개혁의 꽃이 피어났다.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이른비, 2016)을 펴내고 프랑스에서 종교 개혁과 근대 문명사를 연구한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는 수도원 시절 루터의 고해 신부였던 슈타우피츠(Staupitz)를 일컬어 ‘루터의 세례 요한’이라고 불렀다. 이는 루터라는 한 인물이 성경의 가치를 드높이게 되기까지 수많은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번 달에는 루터의 친구들, 즉 조력자들과 적대자들을 살펴보겠다.
혼돈 속의 안내자
뤼시앵 페브르가 세례 요한이라고 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자, 루터의 고해 신부였던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있어서 ‘혼돈 속의 안내자’라고 불려야 할 인물이다. 루터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이었던 1545년에 쓴 한 편지에서 슈타우피츠를 아버지라 불렀다.
2003년에 개봉한 에릭 틸(Eric Till) 감독의 영화 <루터>에서도 아버지처럼 루터를 감싸 주고, 이끌어 주는 사람으로 슈타우피츠가 등장한다. 그는 루터의 뜨거운 신앙과 아울러 진지함과 진정한 용기, 그리고 학문적 능력을 알아봤다. 그는 수사 루터를 인간적이고 애정 어린 말로 격려했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 추천하기도 했다.
특히 슈타우피츠는 갈등하는 루터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했다. 이것은 훗날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이루게 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로마와 결별했을 때 루터와의 우정이 식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옛 질서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또 한 사람의 ‘혼돈 속의 안내자’는 에라스무스다.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일 때,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확신과 지지자가 됐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에라스무스다. 루터는 1511년부터 비텐베르크에서 연구를 시작해, 28세였던 1512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그 이듬해부터 시편을 시작으로 성경을 강해했다.
그가 성경을 강해하던 1516년, 에라스무스가 불가타(Vulgata)의 오역을 바로잡은 희랍어 신약 성경을 펴냈는데, 이는 루터에게 매우 유용했을 뿐 아니라 95개조의 반박문을 제시하면서 종교 개혁을 시작할 때 큰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는 비텐베르크의 무명 교수였던 루터의 반박문을 옹호하고 지지함으로써 종교 개혁에 일조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루터와 같은 배를 타지 않았고 자유 의지 문제로 대립각을 세운다.
루터는 “행동과 말이 있는 자는 필립(멜란히톤)이요, 행동 없이 말뿐인 자는 에라스무스요, 말없이 행동뿐인 자는 루터요, 행동도 말도 없는 자는 칼슈타트다”라고 말했다. 결국 루터에게 영향을 준 두 사람, 혼돈의 숲에서 루터의 손을 이끌고 복음으로 인도했던 슈타우피츠와 에라스무스 두 사람은 중도와 과도기의 인물로, 멀리서 약속의 땅을 바라볼 뿐 그곳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루터의 보호자
한편 루터를 보호하면서 종교 개혁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를 들 수 있다. 현자(Wise)라는 칭호가 이름 앞에 붙여졌던 그는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웠고, 루터를 보호하면서 종교 개혁에 있어 더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했다. 프리드리히는 경겅한 가톨릭 신자였고, 성인들의 성유물을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또 교황의 면죄부를 믿었으며 성지로 순례를 다녀온 사람이었다. 동시에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주장을 편 루터를 보호했다.
95개조 반박문 이후 루터는 60일 내로 로마에 출두해 주장을 철회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교황의 요구를 묵살한다. 강력하고 존경받던 선제후는 자신이 세운 대학의 빛나는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극에 달해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파문 칙서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루터는 보름스국회로 소환된다.
프리드리히는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마르틴의 상황이 좋지 않다. 그는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안나스와 가야바뿐만 아니라, 빌라도와 헤롯까지 루터를 반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센의 여우’라고 불렸던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보름스를 벗어나자마자 루터를 납치했다. 그리고 요새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루터를 보호했다.
이런 프리드리히에 대해 멜란히톤은 “그는 선천적으로 변화를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다. 발행된 책들을 읽었으며 어떠한 세력이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짓밟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결국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그 유명한 『9월 성경』을 펴냈고, 그 첫 제본을 프리드리히에게 헌정했다.
루터의 적대자들
루터를 대적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교황 레오10세를 비롯해 면죄부 설교의 대가 테첼, 교황의 대리자였던 카예탄 추기경, 라이프치히 논쟁과 보름스의 기소자 에크(Johann Mair)등을 들 수 있다. 테첼은 단순한 교황청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는 1518년에 추기경이 되고 25세의 나이에 독일 제국의 대법관(chancellor)이기도 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울리히 폰 후텐에게 선물과 연금을 줬고, 신변 보호를 위해 150명의 기사를 거느렸던 교황 레오 10세 시대에 성직자의 세속화와 사치의 본보기였다.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부유한 은행 가문인 푸거(Fugger)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교황의 동의를 받아 면죄부 판매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도록 했다. 또 알브레히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테첼을 면죄부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1501년부터 테첼은 면죄부 설교를 통해 엄청난 돈을 끌어모았다. 그는 인기 있는 대중 설교가가 됐고, 도미니쿠스 수도원의 부원장, 철학박사,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이 됐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지역에서 테첼이 너무 많은 돈을 거둬 갈까 염려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테첼은 비텐베르크에서 가까운 워터보그에서 면죄부를 판매했다. 루터의 95개조에 테첼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테첼과 루터는 실제적인 적대자의 관계에 있었다.
또 한 명의 적대자는 카예탄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처음에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마르틴 형제는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인데 이 소동은 단지 시기심이 많은 수도사들의 언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이 논제를 쓴 사람은 술 취한 독일인이다”라고 했다.
한편 요한 에크는 한때 루터의 친구였지만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됐다. 에크는 베이에른에 있는 잉골슈타트의 신학 교수였으며 많은 지식과 기억력, 언변을 지닌 사람이었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두 사람은 격돌한다.
교회의 권위와 교회의 무오성에 대해서 다퉜고, 논쟁이 끝난 후 라이프치히의 수많은 학생이 루터를 따라 비텐베르크로 옮겼다. 그리고 1521년, 다시 에크는 보름스에서 황제 앞에서 루터를 심문했다. 목소리는 우렁찼으나 에크는 결코 루터를 넘어뜨리지는 못했다.
루터의 동역자
루터의 동역자는 수없이 많다. 루터의 초상화를 그렸고, 9월 성경에 삽화를 그려준 루카스 크라나흐, 선제후의 궁정 사제이자 루터와 선제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게오르크 슈팔라틴, 보름스로 가는 길을 동행한 비텐베르크대학의 니콜라스 폰 암스도르프, 바르크부르크 성주 한스 폰 베를레쉬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 사람, 루터의 친구이자, 동역자, 심지어 루터 사후에 루터와 칼뱅을 이어준 사람은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이다.
멜란히톤은 1497년, 팔츠의 브레텐에서 루터보다는 14년 늦게, 칼뱅보다는 12년 먼저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와 튀빙겐에서 공부했고, 불과 17살이었던 1514년 튀빙겐에서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를 모국어인 독일어보다 더 잘 구사했고 헬라어 문법책을 펴내기까지 했다.
멜란히톤의 학문적 능력은 심지어 에라스무스까지 인정했고 루터와는 달리 부드럽고, 조용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전개해 나갔던 용기와, 신념,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과 명성이라면 얼마든지 원하는 유명 대학에서 강의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들려오는 개혁 소식에 마음이 기울었다.
히브리어의 대가 로이힐린은 멜란히톤을 선제후에게 소개하면서 “나는 독일에서 그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멜란히톤은 네덜란드 사람인 에라스무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이보다 탁월하며, 라틴어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를 능가합니다”라고 말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와 친근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루터에게 실질적 도움과 영향력을 준 조력자였다. 연장자이면서 동료였던 루터는 멜란히톤을 아버지를 대하듯이 존경했고, 겸손하게 그의 발아래 앉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루터는 멜란히톤의 강의를 경청했고, 멜란히톤 역시 루터와 떨어질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안전보다 루터의 안위가 중요하다고 고백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종교 개혁사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 말할 수 있다.
1529년 루터는 멜란히톤을 가리켜 “나는 거칠고, 자만하고, 격렬하며, 호전적이다. 나는 수많은 괴물과 악마를 대적해 싸우라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기에 거친 숲을 헤치고, 그루터기와 바위를 치우고, 넝쿨과 가시를 잘라버려 숲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면, 멜란히톤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가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기쁨으로 키우며 섬기는 은사를 받았다”라고 했다.
루터가 전쟁의 사람이었다면 멜란히톤은 평화의 사람이었다. 루터의 작품에 화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면, 멜란히톤의 부드러운 말 한마디는 모든 분노를 잠재우는 능력이 있었다.
멜란히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루터와 함께 작성했고, 아우크스부르크, 슈파이어, 보름스 등의 종교 회담에서 탁월하게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변증했다. 또한 그의 탁월한 고전어 능력을 발휘해 『9월 성경』을 펴내는 일에 루터에게 조력했다. 이외에도 루터의 개혁 여정 전과 후에서 또는 좌와 우에서 루터의 조력자가 된 많은 인물이 있었다. 특히 울리히 폰 후텐(Ulrich von Hutten)은 로이힐린과 더불어 개혁적 작품을 통해 루터를 도왔고, 루터의 작품과 어우러져 개혁의 효과를 더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혁이 태동되던 시기의 제1차 종교 개혁 시대의 인물들을 루터를 중심으로 살폈다. 종교 개혁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짜 맞추신 퍼즐조각들이다. 그들은 때로 대적했고, 협력했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