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흔히 한국과 중국에서는 기독교라고 하면 곧 개신교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른바 ‘기독교’(Christianity, Religio Christiana)라고 할 때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하는 소위 ‘그리스도교’를 일컫는다. 그러나 개신교, 즉 16세기 종교 개혁 운동 이후 발생한 기독교를 특정해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말해야 한다.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긴 ‘개신교’(改新敎)는 어느 정도 프로테스탄트의 의미를 담고 있어 좋은 번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회와 개혁’ 시리즈를 통해 종교 개혁의 배경인 중세 교회사를 필두로 르네상스와 마르틴 루터를 살피면서 종교 개혁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이제 종교 개혁이 구체적으로 유럽에서 수용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다룰 계획이다. 본고에서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된 유래와 유럽 각 나라로 전파되고 확산된 과정과 아울러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살펴보려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종교 개혁이 태동되고 옛 질서와의 힘의 균형이 정점에 달했을 때, 우연히 이 이름이 불려졌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테제를 발표한 후, 1521년 보름스 국회(the Diet of Worms)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이며 위험 인물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칙령은 독일의 많은 제후로부터 지지받지 못했고, 오히려 작센의 현자 프리드리히(Friedrich)는 루터를 보호했다.
점점 더 많은 제후들이 루터의 개혁 운동에 동의하자 칼 5세는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the Diet of Speyer)를 열어 종교의 문제를 제후의 결정에 맡긴다고 선언했다. ‘쿠이우스 레지오, 에이우스 레리지오’(Cuius region, eius religio)란 ‘그의 왕국에, 그의 종교’라는 뜻으로, 신앙 속지주의를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완화 정책이었지만, 신자 개인에게 종교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종교 개혁이 더 많은 지역에서 받아들여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와중에 로마가 황제의 권위에 도전했고, 격노한 칼 5세는 용병들을 풀어 교황 클레멘스 7세를 가뒀다. 동시에 이슬람 군대가 그들의 성전(jihad)을 수행하면서 동유럽으로 밀고 들어왔고, 발칸반도를 점령하며 1529년 빈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529년 3월 제2차 슈파이어의회가 소집됐고, 다수의 보수파였던 가톨릭교도들은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서 보름스 칙령을 엄격히 적용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슬람과 루터파를 동시에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제국의회에 참석한 루터파 대표단은 이대로 가다가는 종교 개혁 진영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해, 1529년 4월 25일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백성, 그리고 현재와 장래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법적 호소문 형식을 갖춘 정식 항의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용감한 사람들은 작센의 선제후 요한, 브란덴부르크의 영주 게오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브르크의 공작들인 에르네스트와 프란시스, 헤세의 영주 필립, 안할트의 제후 볼프강, 그리고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던 스트라스부르크와 장크트갈렌을 포함한 14개 제국 도시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서를 제출했고, 라틴어로 된 항의서, 즉 ‘프로테스타치오’를 제출한 사람들을 일컬어 ‘프로테스탄트’라 불렀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트’는 로마가톨릭과 맞선 종교 개혁 진영의 이름이 됐다.
루터파가 자유를 얻다
물론 이들의 항의서는 즉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조직적인 목소리를 냈고, 이 항의서로 루터파를 일컫는 명칭에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가 쓰이게 됐다. 그리고 루터파는 프로테스탄트로서는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는데, 이는 1530년 4월 8일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시작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에서 이뤄졌다.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회의 역시 구교와 신교의 힘이 팽팽히 맞섰다. 교황파이면서 다수파였던 로마 진영의 눈에는 루터가 마호메트보다 악한 존재로 보였고, 루터파의 눈에는 교황이 마호메트보다 악한 존재로 보였다. 황제는 당면한 문제인 터키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힘을 모으는 방안을 다루고자 했지만, 루터파는 먼저 종교 문제를 다룰 것을 요청했다.
특히 브란데부르크의 영주 게오르크는 목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결국 황제는 나흘 안에 루터파의 신앙고백서를 준비해 서면으로 자신에게 제출하라고 명령했지만,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서면이 아닌 제국의회에서 낭독되기를 요청했다.
결국 이 신앙고백서, 즉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제국의회가 아닌 주교궁의 개인 예배당에서 독일어로 낭독됐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이 고백은 이신칭의가 빠져 있었고, 어떻게 하든지 교황파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쓰여진 완곡한 고백이었다.
그리고 재세례파가 뮌스터를 점령하자 마침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을 통해 극적으로 루터파에게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독일은 이미 65개의 제국 자유 도시 가운데서 50개가 넘는 도시가 종교 개혁을 지지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즉 칼뱅파와, 재세례파는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고, 다시 개혁파가 종교의 자유를 얻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까지 무려 131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칼뱅파가 자유를 얻다
독일의 왕은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을 자처해 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특히 칼 5세가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계자로 독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보헤미아, 헝가리, 네덜란드의 왕을 겸하는 절대 군주였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힘을 합쳐 황제를 견제했다. 그 가시적인 결과가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팔츠를 중심으로, 가톨릭 제후들은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 전쟁은 거의 유럽 모든 나라가 참전한 세계대전을 방불케 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잉글랜드, 스웨덴, 네덜란드가 참가했다. 명분 없이 이어지던 전쟁은 신교와 구교가 서로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막을 내렸고, 두 번의 회의를 통해 1648년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 공화국으로 인정받았고,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이 추인되고 이제 제국 내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칼뱅파가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유럽으로 확산되는 종교 개혁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다. 먼저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루터와 별개로 개혁을 열었던 츠빙글리(Huldych Zwingli)가 1519년 취리히를 중심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이 개혁은 베른(1528), 바젤(1529), 스트라스부르(1530), 제네바(1536)로 확산됐고, 스위스 개혁의 특징은 성상 파괴라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독일에서 제국의회가 중요했다면 스위스에서는 시의회의 결정이 중요했다.
또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의 위협과 가톨릭 칸톤들과의 전쟁에 직면했다. 츠빙글리는 카펠전투에서 군목으로 참전했다 중상을 입고 세상을 떠난다. 하인리히 불링거가 후계자로 개혁을 이끈다. 1520년대에는 종교 개혁이 독일어권 도시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스위스의 불어권 도시들에서 개혁의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도시는 보(Pays de Vaud), 로잔(Lausanne), 뇌사텔(Neuchatel), 제네바(Geneva)다. 그 중심에 파렐이 있었고, 그는 바젤과 베른을 거쳐 제네바에서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와 함께 불어권 개혁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제네바는 프랑스인 칼뱅을 받아들여 개혁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1559년에 문을 연 제네바 아카데미는 프랑스는 물론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의 팔츠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1555년 아미 페렝을 포함한 수구파들이 몰락하면서 칼뱅은 1564년 죽기까지 제네바를 개혁 교회의 산실로 세워 나갔다. 루터파 일색의 프로테스탄트 내부에는 이제 루터파가 아닌 개혁파 (Reformed)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힘은 비텐베르크에서 제네바로 옮겨졌다.
이와 같이 불어권 개혁은 제네바에서 프랑스 본토로 옮겨지게 된다. 프랑스 종교 난민들을 제네바가 흡수했고, 제네바아카데미에서 배출된 목사들이 다시 프랑스로 들어갔다. 1555년 이후 프랑스에는 개혁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5개에 불과하던 교회는 1562년에는 무려 1785천 개가 된다. 제네바아카데미에서 배출된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200명 이상 파송되고 프랑스 개혁 교회는 1550년에 조직된 이래, 1559년에는 프랑스 교회법을 제정하고 프랑스 신앙고백을 만들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를 대표한 독일어권에서 종교 개혁이 시작됐다면, 칼뱅을 중심으로 불어권이 종교 개혁의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제네바는 유럽 전역으로 개혁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같은 불어권인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스코틀랜드까지 불이 붙었다. 존 녹스(John Knox)가 칼뱅 사상을 접목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1559년 ‘제1치리서’를 만들고 교회의 구조를 노회, 대회, 총회로 구성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결국 1647년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가 모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정치 및 권징 조례와 예배 모범을 만들어 낸다.
개혁은 네덜란드에도 전파된다. 네덜란드는 에라스무스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칼 5세의 후계자인 펠리페 2세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네덜란드에 강력하게 적용하면서 개혁파로 기울기 시작한다. 특히 1561년 네덜란드는 귀도 드 브레가 프랑스 신앙고백을 기초로 벨직 신앙고백서를 만들고 “우리는 등에 채찍을 맞고, 혀가 칼로 잘리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 온 몸이 불에 태워지더라도 이 신앙고백서에 기록된 진리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1590년에 이르자 유럽에서 루터파와 칼뱅파의 힘의 균형은 칼뱅파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개혁 교회는 다시 유럽인들의 민족 이동을 통해서 건너간 나라들로 전파됐다. 네덜란드에 의해 남아공으로, 청교도에 의해서 북미 지역에, 영국에 의해서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로 확장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아니라, 자신들의 식민지를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는가에 따라 개혁 신앙의 이식 여부가 결정됐다. 한국과 브라질은 백인 유럽국가의 식민지가 아닌 선교적 대상으로 개혁 신앙이 뿌린 내린 유일한 경우다.
프로테스탄트 정신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트의 탄생과 확장을 살폈다. 그렇다면 프로테스탄트의 특징과 그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그 정신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란 처음에는 루터파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종교 개혁 진영을 지칭하는 말로 확장된다. 심지어 재세례파와 성공회까지를 포함한다.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첫 번째 특징이다. 가톨릭이 교회에서 출발한다면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출발점은 성경이다. 루터는 성경을 교회의 생명과 사상의 중심으로 봤고, 칼뱅은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또한 칼뱅의 모든 신학 사상은 계시의존적이었고, 성경이 그의 신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특히 종교 개혁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특징을 만들었다. 루터의 <9월 성경>과, 위클리프에서 월리엄 틴테일로 이어지는 <영어 성경>, <제네바성경>은 종교 개혁의 방점이 됐다. 성경뿐만 아니라 모국어 찬송과 기도, 그리고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들이 종교 개혁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런 특징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테스탄트만의 독특한 정신을 만들어 냈다.
첫째, ‘만인제사장주의’다. 이것은 교권주의와 영적 엘리트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성찬에서 성직자와 일반 신자가 똑같이 떡과 포도주를 받아야 하며 성직자들에게도 결혼이 허용돼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회중은 설교자와 자신들의 교구목사를 선임할 수 있고, 또 교회법과 질서를 따라 해임할 수도 있어야 했다. 이런 정신은 사제들 중심의 위계(Hierarchy)가 배격되고 상설주교회의(Synod)를 통해 영적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둘째, ‘이신칭의’다. 이것은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나온 정신으로 루터파에 의해 시작됐지만 개혁파에서는 예정론과 하나님 절대주권사상으로 확장됐다.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져와 보속을 통한 행위에서 은혜를 통한 감사와 변화로 발전했고, 관용과 타자에 대한 배려, 약자를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직업 소명설’이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신앙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신자의 모든 삶의 영역에 그 정신을 심고자 했다. 칼뱅의 직업 소명설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통해 자세히 소개됐는데, 칼뱅은 이자를 수용하고 사유재산과 상업을 인정하면서 직업의 귀천을 넘어 소명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탐욕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이런 정신은 약자를 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유럽의 산업 발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칼뱅은 ‘프랑스 기금’(Bourse Francaise)이라는 NGO를 만들었는데, 이는 국제 구호 기관의 시초다.
이상과 같이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은 근대를 여는 기초가 됐고,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종교적 부흥은 물론 경제, 문화, 정치, 교육의 발전도 함께 가져왔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재조명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