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종교 개혁을 이야기할 때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칼뱅(Jean Calvin, 1509~1564)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라면 칼뱅은 종교 개혁의 완성 내지는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가 천년의 담을 넘어 불을 던졌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고, 제후들은 신앙고백서를 받아 들고 일어섰다. 각 도시에서 제국 의회가 열리고 종교 회담이 열렸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종교 망명자들과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뒤이어 성찬 논쟁을 비롯한 교리적 갈등으로 개혁 진영조차 일치를 이루지 못할 때 이 모든 혼돈을 하나로 정리한 인물이 등장했는데 바로 장 칼뱅이다.
이 위대한 종교 개혁의 두 거장이 직접 대면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와 영향력에 대해 알고 있었고, 칼뱅은 루터에 대해 감사를, 루터는 칼뱅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칼뱅은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 또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와 교류하면서 종교 개혁 제2세대의 소통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까지 루터를 중심으로 살펴본 <교회와 개혁 시리즈>는 이제 칼뱅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신학, 프랑스와 스위스 종교 개혁, 제네바교회, 종교 개혁과 한국 교회의 순서로 전개될 것이다. 먼저 칼뱅의 생애와 신학을 그의 이름을 중심으로 전개해 보려 한다.
장 코뱅(Jean Cauvin)의 어린 시절과 가족
장 코뱅은 장 칼뱅의 본명이다. 장 코뱅은 1509년 7월 10일 피카르디 지역의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 코뱅(Gerard Cauvin)은 1481년에 누아용으로 이사했고, 1497년 시민권을 획득하고 시청직원에서 출발해 주교의 법률 고문과 비서를 거쳐 교황청의 공증인과 대성당 참사회에서 일했다.
어린 시절의 칼뱅은 대성당의 그늘에서 성직록을 받으며 성장했다. 12살에는 라 제신에서, 1527년에는 마르테빌의 생 마틴교구에서, 1529년에는 퐁 레벡에서 성직록을 받았다. 칼뱅의 어머니 잔 르 프랑(Jeanne Le Franc)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제한적이다. 어린 시절 칼뱅이 어머니와 오컴프의 대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성 안나의 유적지에 입을 맞췄다.
제라드 코뱅과 잔 르 프랑은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칼뱅의 어머니는 칼뱅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아버지는 곧 재혼해 두 딸을 낳았다. 형 샤를(Charles)은 사제가 됐다가 이단 혐의로 파면을 당해 죽고, 또 다른 동생 앙투앙(Antoine)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여동생 마리와 함께 칼뱅을 따라 제네바에 정착했다. 앙투앙은 제네바에서 서점을 운영하면서 1546년에 시민권을 받았고, 1558년에는 200인 의회의 의원으로, 1570년에는 60인회의 의원으로, 또 종합구빈원의 감독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칼뱅의 또 다른 누이는 누아용에 남아 결혼해 가톨릭 신자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칼뱅은 주교였던 드 앙제 집안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이었던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클로드 드 앙제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칼뱅이 다닌 첫 학교는 참사회(magistrat)가 운용하던 누아용의 소년학교 까빼뜨였다. 칼뱅은 이곳에서 라틴어 수업을 마친 후 열네 살이 되던 1523년 파리로 간다.
요아니스 칼비누스(Ioannis Calvinus), 『기독교 강요』를 출판
칼뱅은 파리로 오면서 라틴어 이름을 사용한다. 이 라틴어 이름의 프랑스식 발음이 우리가 부르는 ‘칼뱅’이다. 칼뱅은 마르슈대학(Collge de La Marche)에서 코르디에를 만나 라틴어 실력을 다듬었다. 그리고 칼뱅은 몽테귀대학(Collge Montaigu)으로 학교를 바꾸는데, 이곳에서 공동생활형제단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528년 이미 신앙의 이유로 스트라스부르로 피신한 사촌 로베르 올리베탕과 연락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환했다.
칼뱅은 1531년 5월 26일에 아버지가 죽고, 1533년 니콜라 코프의 팔복에 대한 설교에 연루돼 프랑스 남부 생통주 지방의 앙굴렘에 있는 친구 루이 뒤 티에의 집으로 피신한다. 큰 서재를 갖춘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위해 연구하는 한편, 고향을 방문해 성직록을 포기한다. 동시에 르페브르를 만나고 파리 외곽의 개혁 모임에 참석한다. 그러나 파리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고 칼뱅과 친구 뒤 티에는 바젤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인물들과 교제한다. 그리고 1536년,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간한다.
칼뱅의 가명, 샤를 데스프빌(Charles d’Espeville)
샤를 데스프빌은 10개가 넘는 칼뱅의 가명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이름인데, 종교 난민이자 망명자였던 칼뱅의 처지를 설명해 준다. 1536년 페라라 공국에서 돌아온 뒤 칼뱅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파리를 여행하고, 남동생 앙투앙과 여동생 마리와 함께 스트라스부르로 향한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와 칼 5세 간의 전쟁으로 제네바에 기착하고, 단지 지나가는 길이었던 이곳에 파렐의 권유로 체류한다.
칼뱅은 파렐과 함께 신생 기독교 도시였던 제네바에서 성경적인 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하지만 큰 반대에 직면한다. 그리고 결국 파렐, 칼뱅, 코르는 72시간 내에 국경을 떠나라는 제네바시의회의 추방 명령을 받는다. 1538년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고 프랑스 피난민들의 교회인 생 니콜라이교회에서 설교하고 김나지움에서 강의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숙을 쳤으며,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재단사 조합에 가입하기도 했다.
1540년 칼뱅은 파렐의 주례로 이들레트 드 부르와 결혼한다. 그러다 칼뱅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그것은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를 회유하기 위해 보낸 서신에 대해 베른과 제네바가 일치되게 칼뱅으로 하여금 답변을 쓰도록 청원한 것이다. 칼뱅이 쓴 답신은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도 남았고, 후일에 루터도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538년 제네바는 정치적인 변혁을 겪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후일에 칼뱅의 정적이 되는 아미 페랭의 지시로 1541년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다. 추방 당하던 3년 전과는 달리 칼뱅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 부대가 파견되고 특별 마차가 보내졌다. 또 생 피에르 근처의 샤누안 거리에 있는 정원이 딸린 집이 제공되고, 500플로린의 고정 급여와 12가마니의 밀과 포도주 250갤런, 새 옷 한 벌과 겨울용 모피 코트가 제공됐다.
칼뱅은 자신의 2차 체류의 첫 과제로 교회 법령을 정비한다. 이 법령은 제네바교회의 기초가 됐고, 나아가 근대화의 배경이 됐다. 제네바에 흑사병이 일었을 때 칼뱅은 부인과 아들을 잃는다. 이후 그는 수많은 설교집을 펴냈고, 증보와 재판을 거듭한 『기독교 강요』는 1559년에 라틴어판 최종판을 출간한다. 1563년에 와서는 건강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고, 1564년 2월에 마지막으로 목사회에 참석하고 그해 5월 27일에 사망한다.
칼뱅의 묘비명 J. C.
칼뱅은 자신의 유언대로 제네바의 일반 시민들과 동일하게 장례를 치렀고, 제네바 외곽 농경지 플랭팔레(PlainPalais)에 묻히면서 ‘J. C.’라는 이니셜이 묘비명에 새겨진다. 1536년 제네바에 불시착하기까지 28년간 철학, 법학, 신학을 공부하며 인문주의자로 준비됐고, 한 번의 추방을 포함해 후반부의 28년을 오로지 제네바의 목사로서 제네바교회 건설에 자신을 투신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가족의 윤리적 문제와 개인의 건강 문제로 인해 범인의 노년보다 가혹했다.
아내 이들레트에게서 남겨진 딸 유딧의 간통과 아들의 가출, 그리고 동생 앙투앙의 이혼과 재혼, 앙투앙 부인 안느와 칼뱅의 곱사등인 하인 다게와의 간통 사건 등은 그가 제네바에 세우려고 했던 개혁된 도시와 시민의 표상이 될 성경적이고 윤리적인 가정의 문제가 개혁자의 집에서부터 무너져 내렸음을 여실히 보여 줬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그는 한동안 강단에 오르지 못했다. 또한 1555년부터 시작된 늑막염으로 1558년에는 몇 개월을 침상에 누워 있었고, 1559년 12월 24일 설교 도중에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으며, 그다음 날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칼뱅은 죽음 직전에 유언을 남겼고, 유산의 일부를 제네바 아카데미에 남겼다. 시의회 회의록은 ‘책임감이 강한 칼뱅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감각과 정신이 온전한 채로 하나님께로 갔다’고 개혁자의 퇴장을 기록했다.
칼뱅의 사상과 영향
첫째, 그는 무엇보다도 근대를 여는 개혁자였다. 루터가 북부 독일의 시골 지역을 개혁하면서 농부들을 기반으로 한 반봉건 상태의 농업 경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칼뱅은 인문주의가 집중된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루터가 도시와 상업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반면, 칼뱅은 상처와 문제투성이의 도시를 품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상을 전개하면서 이자 제도를 교회 법령 속으로 가져왔다.
또한 칼뱅은 당시 도시국가였던 제네바의 시민법 제정을 주도하고, 사중직제를 통해 균형 잡힌 목회와, 권징, 구제, 교육을 전문화했다. 또한 오늘날의 NGO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난민 구호기금’을 만들어 공적 구제 시스템의 부족한 부분을 감당했다. 칼뱅의 활동과 영향은 종교 개혁을 뛰어넘어 ‘근대로의 통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정통 신학의 수호자였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정통 신학을 수호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체류와 1540년대의 제네바 상황은 오랜 미신과 베른의 신학과의 길고 지루한 싸움을 전개해야만 했다. 그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는 이런 논쟁과 승리의 결과와도 같다. 정통 신학의 전제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과 같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칼뱅은 스콜라철학의 사변적이고 인본적인 토대 위에 건설된 로마 가톨릭을 거짓 교회로 규정하고 교황주의를 배격했다.
셋째, 우리는 칼뱅으로부터 참된 ‘경건’(Pietas)에 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저서 역시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진술이다. 칼뱅주의 정점에 ‘순전한 경건’이 있다. 오늘날 ‘영성’(Spirituality)이라 불리는 국적 불명의 종교성은 정통 신앙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경건 개념은 전적 무능의 상태에 있는 죄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당시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의 실존을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의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과 함께 내세를 소망하면서도 현세의 삶을 살아 내는 균형을 요구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 자신을 부인(self-denial)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17세기 경건주의 이후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에 성경의 정경성마저 무너져 내리는 이 시대의 교회는 경건의 지표를 다시금 성경으로부터 산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