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깨운다 송태근 목사_ 삼일교회
2017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는 매우 절망스럽고 참담한 시간을 보냈다.
심각한 국가적 혼란 앞에 교회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권력자의 몰락을 보며, 온전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묵상하게 됐다. 새해를 맞이해 교회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해 설계하시고 계획하신 뜻을 다시 이뤄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성령께 이끌리는 교회가 돼야 한다’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평강을 주시는 성령
교회는 날마다 개혁돼야 한다. 이는 성령님을 통해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를 떠올려 보라. 군중과 따르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자들이 느낀 지난 3년간의 회상과 좌절감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검거의 열풍으로 제자들은 공포에 떨며 숨어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둘째,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셋째, “성령을 받으라.” 이 세 문장 속에는 성도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인류의 비극은 하나님과의 평강이 깨지면서 시작됐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아름다운 피조물로 세우셨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설계돼 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속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버렸다. 외부로부터 오는 공급원이 끊어지자, 인간은 평강을 잃고 목마르게 됐다(요 4:13~14).
인간은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원하는 길로 달려가지만, 거기에는 평안이나 만족이 없다. 이 목마름은 성령님께서 오셔야 해갈된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정확하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요 7:37~3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치셨다(요 19:28).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해갈을 위해 대신 목말라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고 구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역사에 붙들린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숨 쉬는 장면이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 먼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숨을 내쉬어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창 2:7). 첫 아담은 이렇게 창조됐지만 죄로 인해 실패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담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는 외마디를 남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두 번째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는 재창조의 역사다.
성령을 받으면 새로운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붙들릴 수 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과거의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한 복음 전파자가 됐다. 신앙의 선배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순교의 자리에서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이끈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다.
일상의 선교지에서 사명을 감당하라
그렇다면 성도는 성령을 받아서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신다(요 20:21).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의 사도성을 강조했다. 이는 사도직의 계승이 아니라, 사도들의 임무가 계승된다는 의미다. 교회는 죄로부터 불러냄을 입은 성도들의 무리다. 사도성은 어떤 특권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특권이다. 또한 교회는 보냄받은 자로서의 임무도 부여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성도를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마치면 그 예배는 일상 속으로 확대돼야 한다. 일터와 가정으로 돌아가 성도로서 사는 것은 중요한 삶으로의 예배다. 성도의 전 생애는 구원의 특권과 함께 일상으로 보냄을 받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평강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임재와 강권적인 주도권 앞에 순복함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상의 선교지에서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