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리더십

2014년 02월

우리 소그룹 모임만의 세렌디피티(새로운 발견)

순장리더십 고미숙 권사_ 화평교회

언젠가 가정교회 지도자 모임 중에 “내 인생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 세 가지를 쓰자면?”이란 질문이 던져졌다. 나는 주저 없이 첫째, 아내로서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더 나은 helper’로서), 둘째, 부모로서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영적 부모’로서), 셋째,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 그림’을 그리는)를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가정교회’는 남편과 같이 ‘나도 사역자’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했고, 내 인생의 초점을 ‘세 가지 부르심’에 맞춰 삶의 중심을 잡고 당당하게 나아가게 했다.   

 

가정교회를 시작하며
“이제부터는 구역예배가 아닌, 가정교회로 모입니다.” 1998년 9월, 화평교회는 담임목사님의 ‘제자훈련 사역’과 ‘가정교회 사역’을 통해 “평신도를 지도자로 세우며, 소그룹 중심으로 성숙해가는 교회”라는 목회비전에 따라 기존의 구역모임에서 가정교회 모임으로 그 형태를 바꾸게 됐다. 가정교회에 관해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도들은 그동안의 구역모임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모임을 시도해야만 하는 믿음의 도전 앞에 부담과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정교회 지도자인 ‘가장’과 ‘총무’로 헌신하도록 권면 받았을 때, 사실 우리 부부는 그 당시 별문제 없이 신앙생활을 해오던 터라 굳이 가정교회 사역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사님의 마음이 담긴 설교를 들으면서,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는 말씀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가정교회 사역에 대한 부르심을 확신하고 한 달 이상을 기도로 준비했지만, 모임이 기대되다가도 눈만 뜨면 현실적인 제약들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가정교회를 열 용기가 통 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집 거리가 먼 가원(소그룹 구성원을 지칭)들의 오고 가는 문제, 아기를 둔 가원들이 모임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문제, 가원들이 돌아가며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 부담감 등 모일 수 없는 이유가 모여야 할 이유보다 배는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모임 준비를 진행하면서 깨달았던 것은 그 많던, 염려했던 일의 반의반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첫 가정교회가 시작되고, 그 다음 주 셋째 아이 출산을 한 우리 부부는 새내기 ‘가장’과 ‘총무’로서 앞으로의 가정교회 사역을 놓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학생 사역만을 전담해오던 남편은 장년부 사역이 처음이었고, 말씀이 이론적인 데에 머물러 있던 나는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 서툴러 갓난아기를 데리고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징검다리 가정교회’는 ‘가정교회’라는 인식도, 경험도 없던 가장·총무와 가원들(다섯 가정)이 첫 해 52주를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모였다. 그 기간, 하나님께서는 갓난아기를 데리고서도 얼마든지 가정교회 사역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작정이라도 하신 듯 가장 집을 개방하게 하셨다. 그 당시에는 가원들이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집을 개방하질 않아 속상하기도 했지만, 1년 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집을 개방하게 됐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총무인 나를 집중적으로 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웬만한 가정교회 사역은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첫 모임, 나눔으로 풍성해지다
첫 ‘징검다리 가정교회’는, 가원들의 선택에 따라 편성된 모임이여서인지 출석률이 매우 높았다. 이동해야 하는 시간대가 저녁이고, 교통편이 수월치 않았음에도 정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가정교회 모임이 시작됐다. 모임이 처음이라 식사 준비는 총무가 했는데, 간편한 상차림을 염두에 두면서도 준비하다 보면 한국 엄마의 못 말릴 마음 씀씀이로 반찬 가짓수가 슬그머니 늘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장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앞으로 따라서 해야 할 다른 가원들이 얼마나 부담스럽겠냐면서 말이다.
“제일 따뜻했던 기억 한 가지씩을 말해보세요.” 식사 후 처음 한두 번은 이런 아이스 브레이크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없앨 수 있었다. 아이스 브레이크와 모든 나눔 진행은 당연히 남편 가장의 역할이었고, 나는 성령께서 남편을 주관해주시도록 마음으로 기도했다. 
가정교회에 모이기만 하면 가원들이 적극적으로 삶을 나눴고, 기존의 구역모임에서는 채울 수 없는, 가원들 간에 서로를 알아가는 기쁨과 위로가 있었다. 한 가원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다른 가원들과의 교제가 재밌었고, 구역모임에선 없었던 남편들의 진솔한 나눔이 신기했고, 갓난아기를 데리고 가장과 총무가 섬기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징검다리 가정교회에서 받은 영적 첫 정을 다른 데서는 다시 느낄 수 없었다고 말이다.
찬양은 나눔 전에 3~4곡의 복음성가를 유인물을 보며 드렸다. 처음에는 가장이 기타 치며 찬양을 인도했는데, 이후 달란트가 엿보이는 담당자에게 위임했더니 탁월하게 잘 해내는 것을 봤다. 가정교회 모임은 적당한 시기에 찬양, 재정, 기도, 선교, 새신자 등 담당자를 세워 협력할 때 시너지효과가 발생한다.
나눔이 있고 난 후엔 그 자리에서 나온 기도제목을 가지고 가장이 기도하면서 전체 모임을 마쳤던 기억이 있다.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 하는 시간과 성경 공부, 전도와 선교 보고 및 가장의 파송기도와 같은 현재의 가정교회 형식이 정착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모임은 7시에 시작해서 가장이 가원들을 차로 데려다 주는 시간을 고려해 10시 반 안엔 마치려고 했으나, 모임이 좋았던 가원들은 대개 11시가 돼서야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작 전부터 기도로 준비하다
이처럼 우리 부부가 첫발을 뗐던 ‘징검다리 가정교회’는 16년에 걸쳐 ‘교회 편성’과 ‘분가’를 거듭해 ‘세렴 가정교회’, ‘누리엘 가정교회’, ‘브솔 가정교회’에 이르렀고, 우리 부부는 현재 ‘선한이웃 가정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동안 7명의 가장과 4명의 총무가 배출됐다.
지금의 ‘선한 이웃 가정교회’는 ‘브솔 가정교회’를 분가한 후에 교회로부터 새신자의 명단을 받아 다시 시작한 가정교회다. 분가 후 6개월의 안식년을 가지고, 다시 가정교회를 준비했다. 예비 가원들을 심방(전화)하고, 모든 가원들의 시간을 절충해 가장 적당한 요일과 시간대로 약속을 잡고, 모임에 꼭 참석하도록 여러 번 독려했다. 이 모든 과정에 성령께서 개입하셨고, 모든 것이 순적하게 준비됐다. 가원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면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해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임을 너무나 원하신다는 확신과 함께, 성령께서 가정교회 모임을 구성하는 과정에 세밀하게 관여하심을 알 수 있었다. 예정된 모임 날짜가 가까웠을 때, 총무가 주도해 여 가원들을 먼저 불러 모아 곧 열게 될 우리 모임을 기도로 준비하자고 독려했고, 정확하게 두 주 후 젊은 부부 일곱 쌍이 가정교회에 모두 연결되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식탁 교제의 중요성
가정교회는 항상 ‘식사’로부터 시작되는데, 가정교회 식구들과의 식탁 교제가 충분히 의미 있는 까닭은 1세기 초대 교회의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의 연장선상에 21세기 우리 모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식탁 교제’는 그만큼 역사성이 있다.
그동안 다섯 가정교회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식탁 교제를 항상 고집해왔다. 번거롭기는 하나, 그 의미와 유익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처음엔, 식사에 대한 부담감으로 주저하던 가원들도 몇 차례 가장 집에서의 간편한 상차림 샘플(?)을 확인하고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이내 합류해 기쁨으로 다른 가원들을 식사 대접하게 됐다.
인터넷 레시피를 참고해 정성껏 손 대접하는 일에 길들여진 젊은 가원들의 정성을 보면서, 가원들의 한 가족 됨을 확인케 해주는 이 식탁 교제야말로 가정교회만의 특혜라고 생각한다. 특히 남 가원들에게는!

 

맞춤형 인도로 가원들을 양육하다
지금까지 맡았던 가정교회마다 각기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에서야 왜 힘들었는지 또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다섯 차례 가정교회를 거칠 때마다 가정교회 구성원들의 특성에 따라 우리 부부는 거의 감각적으로 그 접근방식을 달리해 왔다. 예를 들어, 가정교회 경험이 없었던 첫 가정교회에선 가장과 총무의 ‘헌신’과 ‘기다림’으로, 영적 상태가 결여되고 교회에 적응이 어려웠던 가원들의 가정교회에서는 ‘찬양’을 넘치도록 했고, 뜨겁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가정교회에서는 ‘동기 부여’ 하는 데 집중했다.
기성 교회의 틀에 익숙한 가원들이 모인 가정교회에서는 가장의 ‘부드러운 유머’가 큰 역할을 했고, 초신자 중심의 가정교회에서는 사랑, 섬김(물질과 기도), 솔선수범이 통했다. 즉, 그러한 것들이 항상 정답은 아닐 테지만, 가정교회를 가정교회 되게 하는 ‘우리 가정교회만의 키(KEY)’였던 것이다.

가정교회를 맡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기본도 안된 가원을 위해 밤새워 기도하면서 “이 일은 목사님이 하셔야 하지 않을까?”라며 담임목사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가정교회로 인해 가원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는 지금은, “아! 그래서, 목사님이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구나! 영혼이 자라가는 기쁨을 맘껏 맛보라고!”라며 그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된다.
우리가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새 생명의 싹은 자라듯, 소그룹 현장에서 자리를 지켰을 뿐인 우리 부부에게 “오직 자라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음을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 가지 부르심의 키워드는 ‘순종’이라고 생각한다. ‘순종’으로 내 삶의 기초를 깔고, 가정교회 사역을 삶의 중심으로 한국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길 때,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게 할 줄 믿는다. 우리 부부에게 가정교회의 비전을 심어주시고, 작은 목자로 대우해 주신 담임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 27:23).


고미숙 권사는 서울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전임간사 재직 후 1994년, 일산지역으로 이사를 오면서 화평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1998년부터 가정교회 지도자훈련을 거쳐 현재, 화평교회 권사로서 군선교기도회와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