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큐티 박희원 목사_ 큐티연구소
D형 큐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연구와 묵상’이다. 이는 묵상하는 사람이 지나친 문자주의(literalism)나, 반대로 극단인 영해(靈解), 곧 자의적 묵상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는 중요한 단계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자훈련생들이 말씀을 갖고 씨름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소다. 어쩌면 연구와 묵상 단계야말로 제자훈련에서 D형 큐티를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연구와 묵상 단계는 ‘연구’와 ‘묵상’으로 이뤄져 있다. 이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연구’란, 외부 자료(관주, 사전, 성경지도, 주석 등)를 참조해 성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고, ‘묵상’이란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성도에게 주어진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본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추론하는 것이다. 이를 땅파기에 비유한다면 연구는 ‘넓게’ 파는 것이고, 묵상은 ‘깊이’ 파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D형 큐티에서는 연구와 묵상을 분리하지 않고 ‘연구와 묵상’이라고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것일까? 이는 연구, 그리고 묵상이 ‘질문에 대답하기’라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연구와 묵상은 첫째, 관찰한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둘째,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연구), 셋째,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대답을 추론하는(묵상) 과정이다.
연구와 묵상은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
연구와 묵상은 내용관찰을 통해 정리된 사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된다. 이는 그 원인이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귀납법’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의문사를 사용하지 않는 닫힌 질문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역시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용할 수 있다. 이 자체가 ‘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한데, 이 역시 ‘왜?’와 비슷한 ‘그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유, 동기,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연구와 묵상에서 사용되는 질문이다.
이처럼 ‘왜?’에 해당하는 질문들 이외의 다른 질문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질문들은 모두 관찰을 유도하거나, 기껏해야 연구 단계에서 멈추고 묵상 단계까지 나아갈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임의로 동사 하나를 가지고 질문을 만들어 보면 금방 차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기록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성경 본문에 그 내용이 나와 있을 경우 ‘바울이 기록했습니다’(누가), ‘그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습니다’(무엇을) 등의 단답형 대답이 가능하다. 만약 본문에 내용이 없으면 외부 자료(주석 등)에서 답을 찾아 ‘에베소에서 기록했습니다’(어디서)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에 기록했습니다’(언제) 등의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 후에 다시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사고의 진행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D형 큐티를 훈련할 때에는 훈련생들에게 무조건 ‘왜?’라는 의문사를 사용해 질문을 던지도록 연습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훈련생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훈련생들 중에는 대답하기 쉬운 질문만을 선택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상천외한 질문을 해 보라고 권하는 것도 괜찮다. 기상천외한 질문과 답변이 나왔을 때 오히려 격려해 주고,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묵상에 대해서는 좋은 말로 수정해 주면 훈련생들이 좀 더 풍성한 묵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훈련 교역자는 훈련생들에게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 그 자체가 영적인 성숙에 큰 유익이 됨을 강조해야 한다.
잘못된 질문을 제대로 짚어 주라
훈련생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된 질문들을 살펴보면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묵상을 ‘말 바꾸기’ 정도로 생각해 “지혜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경우다. 이는 무조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고쳐질 수 있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훈련생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많은 설교에서 ‘말 바꾸기’가 묵상처럼 제시되곤 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으로 바꿔 읽어 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곧 구원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식의 설교를 따라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이는 훈련생에게는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D형 큐티가 아님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 내용관찰에 기초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본문을 묵상하면서 “보혜사 성령님이 이때 강림하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행전이 아닌 요한복음의 단어인 ‘보혜사’를 사용해 질문한 것이다.
주로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등의 대답을 제시하곤 한다. 이는 사도행전을 묵상하고 있으면서도 ‘성령’이라는 단어 하나에 붙잡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요한복음 지식을 늘어놓는 경우다. 이런 훈련생에게는 본문에 집중하도록 권면하고, 기존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 묵상이 아님을 알려 줘야 한다.
셋째, ‘왜?’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내용관찰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다. 예를 들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에 대해 “왜 요한은 이것을 기록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고’라는 본문을 요약한 것에 불과한 대답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본문이 긴 경우에는 훈련생이 이런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을 교역자가 체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a)라는 본문에 대해 “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경우다.
그런데 바울은 다음 본문(고후 6:14b~18)에서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한다. 이런 질문을 한 훈련생은 그 대답으로 이후 본문을 요약해서 제시하게 마련이다. 이는 관찰이지, 연구나 묵상이 아니다. 훈련 교역자는 이런 질문의 오류를 제대로 짚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질문은 성도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붙잡게 하고, 의미 있는 연구와 묵상을 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훈련 교역자가 훈련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라고 독려하면서 좋은 질문과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해 주면, 훈련생들은 질문 던지기 자체에서 상당한 흥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붙잡고 정보를 수집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깊은 묵상의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