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11년 05월

국내 심장혈관 시술 권위자 한서병원 김종현 부원장

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부산의 슈바이처, 한 생명과 한 영혼 구원에 삶을 올인하다!
부산의 슈바이처이라 불릴만한, 의술로 육신의 질병은 물론 삶에 지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영혼까지 치유해주면서 삶의 스승이 되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국내 심장혈관 시술의 권위자인 한서병원 김종현 부원장(부산 영안교회 안수집사)이 그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한서병원을 찾았지만, 심장혈관 수술과 진료를 받기 위해 부산지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올라와 줄을 선 환자들 때문에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충만했던 진료실 분위기와 달리,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는 보건소 시절 복음이 너무 좋아 전도하러 다녔던 총각 시절로 돌아가 야곱과 같았던 자신의 굴곡 많은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암울한 시절,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
전라북도 전주에서 6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불신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천도교 신봉자로 계룡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평생 수도에 정진하다 실패하자 술로 연명했고,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고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는 학창시절을 불성실하게 살았다고 부끄러워했는데, 중고등학교 때 아프거나 비행청소년은 아니었음에도 어려운 가정형편과 공부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며칠씩 등교를 안 했다. 정학과 퇴학의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의 선처로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런데 한 번 몰입하면 집중도가 높아 중3 때는 전교 1등을 했고, 고등학교 3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낮은 자존감과 절망감만 안겨줬고, 대학에 가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대학시험도 그냥 친구 따라 시험만 보자 했는데, 뜻하지 않게 전북대 의대에 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대는 4년이 아닌 6년 과정이었다. 없는 살림에 자력으로 공부와 과외 등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 의사하면 잘살고 대우도 잘해주는 직업이었지만 그에게는 전혀 동기부여가 안 되었다. 오히려 타이트한 의대생활이 힘들었다.
지친 그는 마음을 잡아줄 안식처로 교회를 스스로 찾아갔다. 그러고 7년간의 교회생활에서 그는 주일날 형식적으로 예배만 드렸지, 남들처럼 방언을 하거나 주님이 마음속으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기도원에 가서 소리도 질러봤다. ‘왜 나는 남들처럼 믿어지지 않는 걸까?’
그런 그에게 1985년 12월 26일, 서울 워커힐 호텔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자신의 전신을 붙드는 것을 느꼈다. 당시 의사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호텔에서 의과 대학생들이 2주간 촌음을 아껴가며 합숙 공부 중이었다.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들에 대한 죄, 교회생활, 영적 게으름등을 회개했다.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듯이, 그는 버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의사고시를 준비해야 하는 2주 내내 그는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시험 전날 그에게 주님은 “종현아, 이제부터 어떻게 살래?”라고 물으셨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답해 드렸다.
이후 몸에 묵은 때가 없어지듯이, 삶의 방향과 목표가 생겼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의사고시 시험을 보았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일명 족보를 가지고 의사고시 준비를 했는데도 떨어졌는데 말이다.

복흥면 보건소 시절, 총각 의사가 교회를 세우다
이후 그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전북 순창군 복흥면 보건소로 가게 된다. 시력이 나빠 군의관 대신 가게 된 보건소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큰 면 단위 보건소이다 보니 환자가 너무 많아 하루 30만 원이나 수입이 생겼다.
총각이었던 그는 돈 쓸 일이 없다 보니, 보건소를 찾는 아이들에게 통닭도 사주고 오징어도 사주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학교를 조퇴까지 하고 와서 아예 보건소에서 놀았다. 그 아이들에게 기타를 치며 찬양도 가르쳐주고, 말씀도 가르쳐주었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서울의 유명 대학교나 신학교에 진학하는 등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변화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진료를 마치면, 성령의 감동이 그의 마음에 임해 저녁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 곳곳에 전도하러 다녔다.
그렇게 전도된 사람 70여 명이 모였고, 1987년 9월 복흥침례교회를 개척하고 보건소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인근 지역 교회로부터 우리 교회 교인 빼앗아간다, 공무원이 공공기관에서 예배를 드린다, 침례교회는 이단 교회다 등 온갖 투서와 핍박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예비군 장소나 마을회관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급기야 개척 4개월 후 목사님을 모셔왔다. 
농번기에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모도 심고, 교도소도 가고, 병원도 찾아가며 전도하고 심방했다. 그는 당시 요나처럼 도망갈 수 없도록 성령님께서 몰아가셨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의 사역은 마치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펼치신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는 사역의 전형이었다고 회고했다.

영혼 구원과 심장의로서 소명을 갖다
이후 그는 의사로서 진로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 그때 복흥침례교회에서의 사역이 침례교단 내에 알려지면서 부산 침례병원 병원장으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 그 병원장이 사직을 했다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았다. 당시 그의 친구들은 지난 3년 동안 다 외울 정도로 공부만 한 반면, 그는 당시 레지던트 시험 준비도 안 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시골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만 집중했던 그는 낙심되어 공부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노조에 밀려 사임했던 병원장이 다시 복귀해 빨리 원서를 내라는 독촉 전보가 왔다. 단 추천이 아닌 정식으로 레지던트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성경과 면접에서 후한 점수를 딴 그는 주님의 은혜로 부산 침례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년 인턴 수련을 마치고 지원했던 내과를 가지 못했던 그는 예기치 않게 1년 동안 선교사들과 함께 전국의 무의촌을 돌며 진료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 1년의 공백 기간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한 시간이었다. 의사로서의 소명을 갖게 한 시간이었고, 주님이 예비하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도록 이끄셨다. 그는 결혼 후 5년 동안 아이가 없었지만 기도의 제단을 쌓은 결과, 첫 번째 인공수정으로 그의 생일과 같은 날에 첫째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 뒤로도 2명의 아들을 더 얻었다.
그는 결혼과 자녀, 직장 문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말씀을 놓고 기도하면서 많은 응답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결혼 후 그는 신학교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주님은 그 길을 돌리셔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레지던트 시험이 공채로 이뤄지게 하셨고, 4:1의 경쟁률을 뚫고 내과 의사가 되게 하셨다. 4년간의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1995년, 그에게 여러 곳에서 월 천만 원 이상의 보수를 주겠다는 병원들의 러브콜이 쇄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심장내과 전문의 과정을 통해 그를 더 단련시키셨다. 레지던트 시절보다 더 혹독한 훈련 기간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단돈 백만 원을 받아가며 꾸려가는 가정생활도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이후 모교의 병원으로부터 오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그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산 침례병원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동부침례교회를 다니며 역시 특유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3명이던 주일학교를 80명으로 부흥시켰고, 100여 명을 전도했다. 침례병원 과장으로 일하며 7년간 한 번도 휴가를 가지도 않았고, 새벽기도, 찬양인도, 교사 등 7개 직분을 갖고 뛰었다. 그러나 교회 사역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강팍해지고 영적 목마름이 계속됐다. 봉사가 아니라 노동처럼 느껴졌다. 교회에 양육과 훈련이 없으니 새신자들이 전도되어도 정착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훈련 받고, 신앙의 균형을 이루다
1999년 그는 라디오에 나온 부산 영안교회 박정근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몇 번의 탐방 끝에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제자훈련으로 양육과 훈련 프로그램이 잘 시스템화 되어 있어, 자신이 전도한 새신자들이 잘 정착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박정근 목사의 설교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동안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고생한 것이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2003년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체험적 신앙이 비로소 말씀과 함께 균형을 이루는 것을 느꼈다. 이어 2004년 사역훈련도 받고, 지금은 7년째 목장 소그룹에서 목장으로서 섬기고 있다.
사실 그가 바쁘고 고된 의사생활 가운데서도 복음의 열정을 잃지 않고 영혼 구원에 쉼 없는 전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체험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험적 신앙은 균형을 잃기 쉽고, 쉽게 지치게 된다. 그런데 말씀을 통한 영적 체력이 보강되니 더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균형 있게 새신자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많은 영혼들을 전도해 부산 영안교회로부터 수여한 명예의 전당 헌당식을 갖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에는 그가 10년간 전도한 사람 11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는 복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복음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열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도대상자들을 최고급 호텔에 초청해 귀하게 접대했지만, 막상 주일날 전도대상자가 오지 않아 바람맞는 날도 허다했다고 한다. 10번 약속 중 3번만 지켜지고 7번은 바람맞기 일쑤였다. 그가 주일날 의기양양한지, 아니면 의기소침한지를 보면 전도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고 그의 아내 오미정 집사는 귀띔한다.
그렇게 전도되어 그의 목장 안에 들어와서 기적 같은 기도응답을 받은 이들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임신이 불가능한 부부가 아이를 갖게 된 경우, 5년 동안 직장이 없던 남편이 이제는 중소기업 사장님이 된 이야기 등등. 그러나 그는 목장을 통해 가장 영적으로 성숙하고 도움을 많이 받는 사람은 목자인 그 자신이었다고 고백한다.

심장혈관 시술의 명성, 환자들이 줄을 서다
그러던 중 2004년 한 병원장이 부산에 있는 한서병원에 좋은 조건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기로 결심하자 그 병원장이 세상을 뜨고 사위가 대신 병원장이 되었다. 새 병원장은 신장내과에서 심장내과 특화병원으로 바꾸는 제안을 한 그에게 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병원에 출근한 첫날부터 환자들이 줄을 섰다. 원무과에서는 며칠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환자들의 방문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결국 병원측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하는 요구는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기존 의료진 사이에는 김종현 부원장이라는 스타플레이어 의사 한 명만 병원 측에서 너무 대우해주고 잘 나가자 시기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그들에게 컨설팅과 자문을 요청해 결국은 그들도 그를 존중해 주었다.
사실 심장내과는 3D업종 중 하나다. 매일 방사선을 쐬며 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술하며 방사선을 쐰 것은 최근 일본의 지진으로 누출된 방사선 양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휴일에도 나와 일했다. 그 때문에 병원 직원들의 출근시간조차 빨라졌다. 밤에도 핸드폰을 꼭 쥐고 자서 어느 때는 너무 뜨거워 깬 적도 있다. 새벽 호출이 있으면 새벽 2, 3시에도 병원에 나갔다. 말 그대로 일 중독자였고, 일이 재미있었다.
부산에서 최초로 팔 동맥을 통해서 심장혈관을 시술하는 데 성공해 그 입소문이 전국으로 퍼졌다. 그가 부임한 지 3년 6개월 만에 2만 건의 시술을 성공하여 2007년도 심사평원발표 관상동맥확장시술 영역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수영구 시장통의 작은 병원이 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는 “제자의 삶이란 내가 가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나고, 하는 일마다 효과가 나타나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받을 수 있고 복음이 나타나게 된다”며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얕잡아 보거나 내 앞에서 예수를 욕하지 못하도록 먼저 하는 일에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오기 전 한서병원은 물 새는 병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을 또 짓고, 200억 원의 백병원을 샀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붙들리니 수백 명을 먹여 살리는 능력 있는 자로 주님이 사용하신 결과이다.
그는 “직원으로 한 회사에 들어왔으면 직장에서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고 세상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의 직장관을 지적했다.

30명의 생짜배기 초신자들만 모인 목장
그는 제자훈련을 받은 후, 평신도 사역자로서도 충분히 목회자 못지않게 동등한 사역을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무엇보다 평신도가 사역의 주체가 된 영안교회 목장 사역에 대한 애착이 크다. 건강이 무너진 심장병 환자들을 전도해 목장에 정착시키고, 그들이 믿음으로 성장해가는 모습만 봐도 기쁘다.
특히 그는 목원들이 미안해 할 정도로 그들에게 잘해준다. 교회 내에 180개 목장이 있으나 그 중 최고의 명문 목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섬긴다. 그래서 이 목장은 높은 정착율과 많은 헌신자들을 배출해냈다.
그는 매주 화요일 오전 진료를 마치면 영안교회 셈텀성전에서 갖는 목장모임 준비에만 올인한다. 그의 목장엔 매달 끊임없이 새신자가 들어온다. 그는 “목장모임에 새신자가 없으면 계모임과 다를 바 없다”며, “새신자를 통해 묵은 신자들은 새로운 전도 비전을 받게 된다”고 강조한다.
신기한 것은 그가 심장수술을 하고 직접 전도한 생짜배기 초신자 30여 명이 목장모임의 목원들이라는 점이다. 한 생명을 구하고, 한 영혼까지 동시에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임 시간 30분 전에 미리 도착한 그는 기타를 조율하며 오늘 부를 찬양을 고르고, 그의 부인은 맛있으면서도 풍성한 간식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목장모임 시간이 되자 초신자답게 어떤 이는 어색해 하며, 또 어떤 이는 호기심을 잔뜩 안고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오는 이도 있고, 전화 독촉에 마지못해 나오는 이도 있지만,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가득하다.
어떤 이는 영안교회 담임목사보다 김종현 부원장이 더 친근하고 존경스럽다. 목장모임의 인원수가 너무 많아 분립을 하려 해도 서로 너무 정이 들었고,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아 부득이 많은 수가 한꺼번에 모인다. 교회 차원에서 아예 특수목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올해 50명을 전도해 3개의 목장 교회로 분가시키려고 차기 리더를 훈련 중이다.
작년 김 부원장의 시술과 전도를 받고 이 목장에 들어온 이정자 자매는 “2010년 8월 부원장님께서 우리 교회 목장에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염소하고 사슴 키우는 목장인줄 알았는데, 와보니 저처럼 교회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한 거예요. 이제는 그만 목원 식구들과 정이 들어 다른 목장으로 가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라고 웃는다.
그는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재미도 있지만 직접 낳아서 키워 보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며 “주일날 각 부서에서 봉사하고 있는 영의 자녀들을 보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온다”고 뿌듯해했다.   <우은진 기자>

<담임목사 추천 한마디>

“영혼 구원에 목숨 건 예수님의 제자이다”
_ 부산 영안교회 박정근 목사

“제가 김종현 집사를 저희 교회 <작은제자>로 자신 있게 추천하는 이유는 그의 삶의 목표가 뚜렷하게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영혼 구원이 목표입니다.”
부산 영안교회 박정근 목사는 김종현 집사를 자신의 목회 인생의 든든한 동역자라고 추천했다. 박 목사는 “김 집사님은 서울대 교수로도 초빙 받았었고, 조선일보에 심장내과 쪽으로는 수술을 제일 잘하는 의사로 기사가 날 정도로 하루 환자만 몇 백 명이나 된다”며 “여러 유명한 곳에서 오라고 초청하지만 부산이 자신의 선교 사명지라고 확신하며, 오로지 환자의 생명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물질을 헌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이어 박 목사는 “전도도 확신이 드는 생짜배기 신자들을 데려오는데, 사기도 많이 당하고 병원비도 대신 대주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많이 돕고 있다”며 김종현 집사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작은 제자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