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07월

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 ⑪ - “문화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싶다”

전도행전 - 춘천 제일장로교회 김대일 집사

옥한흠 목사의 성도교회 대학부 출신 제자들을 취재하는 ‘제자행전’열한 번째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남춘천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기다리던 하얀색 자동차 안에 몸을 싣고, ‘복사꽃 피는 마을’이란 운치있는 이름의 찻집에서 김대일 집사(춘천 제일장로교회)와 마주했다. 4시간여의 긴 시간 동안 줄곧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만만찮은 인물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음풍농월하는 평범한 약사가 아니었다. 스스로 진지한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밝히는 김대일 집사. 옥한흠 목사를 통해 복음을 처음으로 접한 이후, 삶과 신앙에 대한 그의 깊은 묵상은 시작됐고, 30년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24~25). 이 말씀은 그가 평생을 붙들고 해결하고자 하는 중요 화두가 됐다. 그에게서 또 다른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의 이면과 제자훈련 이후 그의 삶의 화두가 된 신앙과 예술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한 담론들을 들어보았다.

 

 

소설가 되려면 성경부터 먼저 알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머리 하나는 좋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시를 한달 앞두고, 공부를 접고 소설을 썼다는 그다. 그런데 오히려 서울대에 그의 표현대로 말하면 운 좋게 붙었다. 1974년 서울대에서 정세열 등 친구를 만났는데, 당시 그는 성도교회 대학부에 다니고 있었다. 원래 원주가 집이었던 그는 친척집에서 통학하며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었는데, 외톨이로 상경했던 외로움을 음악과 문학으로 달랬다. 그래서 매주 있었던 음악감상회를 찾아 정동빌딩 뒤에 있는 CCC에 나갔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신앙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는 그는 어릴 적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데다가, 대학교 1학년 때 폐가 안 좋아 성격이 점점 염세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림, 문학, 음악 등 예술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어릴 적부터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예술이론 서적에 심취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소설가가 되려면 성경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서울대 동창인 정세열, 김혜석 친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알고는 성도교회 대학부에 발을 디디게 됐다.

 

예술과 신앙 사이에서 해답 찾아 헤매다
성도교회 대학부에 다니기 전 그는 CCC의 사영리 소책자를 보며 구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나님이 참이라면, 성경은 역사, 과학, 철학 등 모든 면에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이 소설이나 예술과 관련되어 있는데, 자신의 예술관과 신앙이 충돌한다면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혼자 역사와 철학, 과학을 연구했다. 그러다가 성도교회 대학부에 왔던 것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가 느낀 첫 인상은 너무 학구적이고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예사롭지 않은 모임이었다. 영어성경도 이때 처음 접했다. 당시 옥 목사가 제자훈련 기수별로 크루세이드 넘버를 지정해 줬는데, 제자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그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되고, 서로 이끌어 주는 분위기가 강했던 대학부에서 같은 서울대 캠퍼스의 선배였던 박성수 선배를 만나게 된다. 그와 같은 5기 기수로는 김강태(포항공대 교수), 정세열(고려대 교수), 김혜석(안양대 교수) 등이 있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이 지금도 삶에 남아있다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는 옥한흠 목사가 제자훈련 줄기의 큰 가닥을 잡았고, 제자 삼는 사역은 방선기, 박성수 선배들에 의해 주도됐다. 말씀에 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생활전반에 대해 선배들이 터치했다. 그래서 자신의 파격적인 태도가 논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선배들에게는 비밀에 붙였다. 그의 직속 선배인 박성수 선배는 옥한흠 목사 다음으로 그에게는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학비가 없었던 그는 박성수 선배의 여의도 집에서 6개월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 당시 박성수 선배는 대학부 내 연애 금지를 당연시 했고,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 후배들과 가끔 충돌했다. 그러나 이원론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태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한 마음이 그로써는 배울 점이 많았고 여러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반면, 옥한흠 목사는 그 부분에 있어서 유연하고 자유함이 있었다. 후에 제자들이 만나러 가면, 결코 벽을 두지 않았는데 유머감각도 탁월했다. 가끔 그를 보면 ‘대일아, 어디 수면제 좋은 거 없냐’고 말할 정도로 거리를 두지 않았다. 핸섬하고 깨끗했으며, 인간적인 매력이 풍부해 남자들이 더 따랐다. 그는 옥 목사가 마지막 수련회에서 에베소서 강해를 했던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손꼽는다. 그날 주제가 ‘좌행참(座行僭)’으로, 캠퍼스, 직장, 세계선교의 3M 비전을 담고 있었다. 그리스도안에 먼저 앉고, 일어나 캠퍼스와 직장에서 세계 비전을 품고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 영적 적들과 맞써 싸우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가치관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년간 연구해 만든 성경족보, 여러 곳에 퍼지다
옥 목사가 유학을 간 뒤 그는 교회 내에서 유명해진 사건이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과 세계 역사를 혼합해 그가 만들어 낸 ‘성경족보’가 입소문이 나서 스터디 그룹이 자발적으로 생겨 청년들과 함께 성경역사를 공부했던 것이다. 혼자 2년 동안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고대 세계사와 성경 예언서 등을 파헤쳐 만들어낸 걸작품이었다. 그가 그때 만든 성경족보는 여러 신학교와 교회로 퍼져 나갔다.
그는 세계사 관점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드러내고 싶어 책을 끌어안고 씨름해 차트를 만들었다. 하도 여기저기서 달라고 해 복사해 놓기는 했지만, 지금은 원본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아 아예 자신의 홈페이지(http://kdaeil.com)에 복사해 올려놓았다. 유학을 떠나 있던 옥한흠 목사에게도 편지와 함께 성경족보를 보냈다. 스승에게 혼자 공부해서 만든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약국하며 소설을 쓰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장학금을 준 제약회사 일양약품에 잠시 다니며, 스승이 개척한 은평교회에도 잠시 다녔다. 그 후 소설가로서의 꿈을 이뤄보기 위해 일반 직장보다는 약국을 하면 시간이 날 것 같아 원주에서 약국 문을 열었다. 그는 그 후로도 탄광지역인 사북과 신갈 등으로 이사했다. 머무르는 곳마다 교회에서는 청년부를 맡아 봉사했다. 청년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고, 친구 같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다. 컴퓨터 1세대인 그는 컴퓨터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다. 순전히 글쓰기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여러 기관의 전산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그러다 그는 글쓰기에만 전념하기 위해 한 2년간 약국을 그만 둔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변화지 않는 춘천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 정착했다는 그는 이곳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 쉐퍼, 위치만니 등의 책들을 많이 읽었고, 영화도 많이 봤다. 그리고 그 감동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를 비롯한 예술이 주는 감동과 기독교적 내용을 분석해 ‘감동론’을 친구들과 틈만 나면 나누었다. 그러면 친구들은 소설가보다 평론가가 그에게 어울린다고 권했다.
그러나 이즈음 꿈에 그리던 예술론 『야곱의 우물』을 출판했다. 한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 심사 4편에까지 오른 경력도 있지만, 정식 문단경력은 그게 마지막이다. 『야곱의 우물』은 기독교예술관을 담은 사상서 같은 책인데, 기존에 다룬 주제들이 아니었기에 그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또 그는 기독교학문연구회에 이에 대한 글도 썼고, 예장 고신교단의 기독교학생 전국 수련회에 초청되어 강의도 했다. 춘천에서는 예수제자운동(JDM)이나 크리스쳔청년아카데미 등에서 기독교문화관, 기독교세계관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대학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 ‘만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철학이나 역사, 과학 속에 그 증거가 드러나리라’는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증거를 소설로 담고 싶다
성도교회 대학부는 그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그때 사람들이 전부다. 대학부 5기 카페장을 맡고 있는 그는 자신의 가치관의 모든 것이 그 당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책과 여행을 좋아하고, 소설을 써야 한다는 모든 도전이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 마디로 ‘특별했다’고 말하는 그는 30년 전 가졌던 생각과 훈련 받은 뼈대를 흔들림 없이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며 그의 삶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고 강조했다. 남들 같으면 청년의 한때, 어느 시기에 점유했던 고민들을 치기라 생각하며 현실에 적당히 적응하며 살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게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오히려 재미있다고 응수한다.
그래서 앞으로 그의 목표는 약국을 다시 그만두고 3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자신의 고민을 정리, 발전시키는 것이다. 표현의 방식이야 여러가지겠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문화와 소설 속에서 증거하고 싶다. 그것을 세상이 알아주든 아니하든 그에게는 상관이 없다. 평생을 하나님과 예술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의 조각들을 이제는 퍼즐을 맞추듯 짜 맞추고 싶은 것이다. 그는 다시 말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24~25).
 <우은진 기자>

 

 


 춘천 제일장로교회 김대일 집사

·약 력
서울대 약대 약학과 졸업
일양약품 연구원 역임
예술론 <야곱의 우물> 출간
춘천서 약국 경영 중
기독교학문연구회와 선교단체에서 강연과 글쓰기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