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디사이플>에서는 옥한흠 목사의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제자들을 ‘제자리포트’ 코너에서 만나고 있다. 30여 년 전 받은 제자훈련이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지금 삶의 모습을 추적해 보는 것만큼 제자훈련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데 좋은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선교의 개척자가 된 방선기 목사, 기업경영의 기독교적 모델이 된 박성수 회장에 이어 11월호에서는 성균관의대 내과 교수인 한인권 장로(사랑의교회)가 이 제자 행진의 대열에 가세했다. 국내 여성의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현재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줄기세포연구’라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었다.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개척정신을 발휘하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인권 장로의 제자도를 뒤따라가 보자.
청년시절 신앙훈련이 평생의 밑거름이 된다
고모할머니가 일제시대 때 초대 여전도회 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믿음의 집안이었던 한인권 장로는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교대 졸업반이었던 누나가 성도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했는데,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만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때 담임목사였던 김희보 목사가 누나에 대한 추모설교를 두 주간에 걸쳐 했을 정도로 누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범이었다. 이 일로 인해 한 장로 집안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했고, 성도교회에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는 이때부터 성도교회에서 방선기 목사, 박성남 전도사 등 악동 5명과 밤낮으로 어울려 다녔다.
특히 옥한흠 목사를 만나기 전 네비게이토 선교회에 다니던 방선기 목사로부터 일대일 신앙훈련을 미리 받은 그는 대학에 들어간 뒤, 교회 안에 대학부가 생기자 평일은 물론 주일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시락을 두세 개씩 싸들고 다니며 대학부 활동에 푹 빠졌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분위기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이때 그는 구원의 재 확신을 갖게 됐다. 교회 현실에 맞게 옥 목사가 제자훈련을 집대성했다고 평가한 그는 대학부 회장으로 섬기면서, 옥한흠 목사와 믿음의 동역자인 선후배들로부터 많은 영적 도전을 받았다며 청년시절을 감사해했다.
그는 당시 방선기 목사가 박성남 전도사와 자신을 영적으로 지도했고, 박 전도사는 박성수 회장을, 자신은 한정국 선교사를 전도했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한정국 선교사는 훗날 불교집안에서 믿음을 지키며 가족 모두를 전도했고, 선교사로서 헌신된 삶을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바로 그 한정국 선교사를 자신이 전도한 것이 지금까지 큰 자랑이라며 웃음 짓는다.
당시 옥한흠 목사는 신학생 동료들과 함께 한 학년에 3, 4명씩 뽑아 그룹을 만들어 외국 책을 번역해 발표하는 독서회를 주관했는데, 이때 쌓은 실력이 훗날 칼빈 신학교에서 풀 장학금을 받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덧붙인다. 이런 스승의 모습은 직장에서 일할 때도 늘 준비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되돌아보면, 대학부 시절 학교성적은 중간 정도였지만, 이러한 교회에서의 신앙훈련이 청년 시기에 투자할 만한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며, 가끔 청년들을 보면 신앙훈련의 때를 놓치지 말고 최선을 다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제자훈련 통해서 5가지 영향력을 받다
그는 30년 전 옥한흠 목사와 제자훈련을 통해 자신에게 미친 영향력을 크게 5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로는 한 사람 즉 소수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옥한흠 목사가 성도교회 대학부를 인도할 때 많은 사람들을 이끌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수의 리더들에게 집중했으며, 이들을 통해 다른 학생들이 케어 받을 수 있도록 이들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중요시 했다. 이 소수 사람들에게 투자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더 큰 파워를 일으켰던 것이다. 한 장로는 이 점을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주변의 어떤 환경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과거 스승이 어떤 반대 세력이나 어려운 환경도 기도하며 용기를 얻고 이겨내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던 덕분이다. 대부분 시련이 오면 금세 포기하고 마는데, 대학부 시절 스승과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면서 불가능의 벽을 넘어 믿음으로 돌파했던 경험들이 살면서 많은 힘이 됐던 것이다.
세 번째로는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5년 동안 성도교회 대학부를 제자훈련으로 부흥시켜 당시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가 참관할 정도도 유명해졌지만, 옥한흠 목사 자신은 5년 후 무일푼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자신이 부흥시켰지만, 사역이 정점일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그가 삼성제일병원에서 안락함을 더 누릴 수 있음에도 다른 일에 도전하게 만드는 모델이 됐다.
네 번째로는 아랫사람을 신뢰하는 전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스승은 토요일에 리더들을 모아 체크하고 철저히 제자훈련을 하고 나면, 이 학생 리더들이 맡고 있는 소그룹을 철저히 학생 리더들에게 전부 위임했다. 오히려 옥 목사 자신은 주일날 소그룹 모임 시에 광고만 했을 뿐이다.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평신도를 깨우는 사역인데, 평신도를 믿지 못하고 사역을 나눠주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세상 일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다섯 번째로는 교회와 가정, 사회생활의 일치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이다. 스승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는 것만큼 사회에서 전문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 그 자신도 서울 의대 예과 1학년과 본과 1학년 때 두 번이나 옥한흠 목사에게 신학교에 가겠다는 상담을 했으나, 두 번이나 거절의 대답만 들었다. 옥 목사는 ‘세상에서 잘 믿는 평신도가 더 중요하다’, ‘사람 고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며 의사로서 은사 받은 소명의식을 더 강하게 심어주었다.
의사로서 소명, 세상에서 은사를 발휘하라
그는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만난 지금의 아내와 77년 1월 결혼 후, 군의관생활을 할 때까지는 가정중심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삼성제일병원에 입사한 이후로 지난 10월초 퇴사할 때까지 21년간 밤 10시 이전에는 퇴근한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해 왔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부지런함에 있어서 세상 사람에게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장로가 된 이후로는 교회중심의 생활을 했었고, 지금은 자신의 전공을 찾아 또 다른 일에 몰입하고 있다. 내분비 내과를 전공한 그는 골다공증 의사로 불릴 정도로 이 분야에서 탁월한 의술을 인정받고, 많은 활약을 감당해 왔다. TV나 신문, 잡지 등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언론의 조명과 유명세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자 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현재의 자리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너의 은사를 사용하라고 도전하셨기에 현재의 삶에 대한 자족은 태만으로 여겼다. 그래서 첫 번째 도전한 일이 5년 전 남이 안하는 일을 벌인 것인데, 바로 주식회사 마이진을 세워 자궁경구암 진단을 위한 DNA칩을 만들어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의료사업이었지만 처음부터 잘 되진 않았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자금력이 딸리게 되자 회사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 많이 무릎 꿇는 계기가 됐다. 또 이 시기에 병원 내 오해로 인한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온화한 외모와 원만한 성품으로 절대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 같은 그도 이 부분에서 시험이 들자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세상에서는 내가 잘 되고 성공하면 반대로 희생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때 함부로 성공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며 “99명과 원만한 관계를 가져도 단 한 명과 관계가 틀어지면 극복하기가 힘든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음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 하나님께 회사와 대인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많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감사했다”며 “힘들 때는 인생의 마이너스 기간이 아닌 기도와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기회의 시기임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두 가지 어려움을 통해 30여 년 전 첫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됐다.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들려주시고자 하는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였고, 지금은 이 회사가 정상궤도에 올라 수익을 내자 후배에게 위임했다. 막판에 얻은 큰 수익은 뜻있는 일에 후원하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회사가 커진 게 아니라는 것을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던 시기에 기도하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은 생을 줄기세포 연구에 쏟고 싶다
그러면서 그는 또 한번의 도전을 감행했다. 삼성제일병원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줄기세포 연구에 매진코자 21년간 열정을 쏟아 부었던 회사를 떠나는 것이다. 그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상과학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부추기시는 음성을 들었다.
그냥 지금의 직장에 있으면 가장 많은 봉급을 받는 사람 중 하나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셨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도 주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셨을 때, 하나님의 음성에 즉각 액셀 밟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마침 삼성그룹에서 새로운 일을 제안하고, 줄기세포임상연구센터를 개원해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생명체로서 그 생명체가 다치면 안에서 치료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며 “예수께서도 장님과 한센병자 등을 고치셨는데, 이는 자기면역체계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인함이라고 생각한다”고 생명과학에 앞으로의 삶의 모든 노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점점 크리스천들이 과학과 생명분야 쪽에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 지으신 것인데 인간의 죄와 환경 등으로 수명이 단축되고 있다며, 질병과 유전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DNA유전자 연구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최근 황우석 박사에 의해 배아세포 연구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윤리적인 문제가 많은 게 현실이다.
그는 “줄기세포연구 쪽으로 크리스천 의사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인간이 가진 생명을 다시 치유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내부적 치유잠재력과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밝히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 남몰래 몰입해 왔다는 그는 “배아세포와 달리, 자기 피나 골수에서 뽑은 줄기세포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기에 중풍, 뇌경색증, 버거스병, 당뇨병 등을 정복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1, 2년 내로 좋은 임상 데이터가 나올 것”이라고도 소개했다.
기독교인들이 더 훌륭한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데 안하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라며 그럼 점에 있어서 축구선수 박주영 선수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고도 말했다. 크리스천 과학자나 의사들도 과학적, 의학적 개과를 많이 올려야 하고, 필요하다면 정치력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한인권 장로는 “줄기세포 연구가 한 사람을 전도해 제자 삼는 사역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백분 활용해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해 줄기세포 연구를 통한 불치병 치료에 매진하는 게 나에게 남은 소명이다”라고 의지를 굳게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