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임종구 목사_ 전국 CAL-NET 사무총장
오래전 일이다. 안방을 뜨겁게 달구었던 <허준>이라는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와 제자 허준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천하의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다던 명의 유의태가 반위(위암)만은 고칠 수 없었는데, 정작 자신이 반위에 걸렸음을 알고는 제자를 위해 자신을 부검하도록 서찰을 남긴다.
서찰의 내용을 보면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살피어 너의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였다. 제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준 유의태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시대의 아들들
2012년은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있어서 연초부터 기대와 염려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여야 모두 인물난을 겪고 있다.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기라성 같던 한국 교회의 스승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교계 역시 인물난에 허덕이고 있다. 경제계에서도 모두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재를 키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한다.
인재양성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말이다. 구한말의 코드도 인재양성이었다.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질 무렵, 믿음의 선각자들은 저마다 학교를 세웠다. 그 결과 1885년 8월 3일 미국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최초의 미션스쿨인 배재학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한국의 미션스쿨 설립에 미국의 장로교회, 감리교회만이 아니라 영국성공회, 각파 연합교회, 천주교 등 여러 교파가 참여해 1909년에는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 783개교에 학생 18,255명, 중등학교 수준의 학교 19개교에 학생 1,551명의 규모로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들의 판단과 성찰도 인재를 양성하는 것만이 대안이었다.
그 결과 이 작은 반도가 서구열강의 힘의 역학에서 유린될 때 언제나 중심의 대안이 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시대가 길러낸 시대의 아들들이었다. 1948년 1월 12일 유엔한국감시위원단이 정한 8명의 협상대상자들을 보면,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김성수, 김두봉, 박헌영, 김일성이었다. 또한 당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는 여운형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유력한 기독교 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들의 공과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들이 한 시대에 이 나라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012년 오늘
2012년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서는 인재를 요구하는 소리가 넘쳐난다. 각 총선과 대선을 앞둔 시기에서 정치적 인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급속한 교회 성장의 둔화를 넘어 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영적 인재가 요구되고 있다. 또한 공교육이 파행을 겪는 시점에서 교육 인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정책에도 불구하고, 인물 하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희망은 사람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말하고 싶다. 교회가 그 일을 해내야 하고, 여기에 민족의 미래,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급속한 침체기에 서 있다. 한국 교회는 한때 사람들이 아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배당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물론 저출산과 고령화가 맞물리면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수적 포만감을 누릴 상황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전혀 다른 판을 짜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인재양성! 어떻게 할 것인가?
인재양성,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교육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세상의 경쟁 중심, 입시 중심의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지 말고, 성경적인 대안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격, 인성이 강조되는 교회교육, 가정교육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많은 기독교대안학교들이 이 변화의 한 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둘째는 물량 중심의 목회에서 한 사람을 붙들고 참 제자, 빛과 소금이 되는 그리스도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짓과 부패, 부정과 부도덕에 질렸다. 여기에 돌파구가 있다. 교회가 길러낸 참 제자, 참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가 그토록 목말라하는 인재로 진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회가 다윗의 용사들(대상12:32~33)을 길러내어야 한다.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바를 알 뿐만 아니라, 관할할 리더십까지 지녔던 잇사갈 지파와 같은 리더들을 길러내어야 한다. 우리는 이들을 현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제자훈련의 제자라는 이미지가 영적인 이미지라면, 이들이 세상이라는 필드로 나가 활약할 때 사회적 이미지는 현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소수의 창조적 인물들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일에만 스승이 있고, 바울과 같이 산고의 수고를 다하려는 스승은 없다는 점이다. 담임목회자와 부교역자와의 관계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전락해 버렸고,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고객과의 관계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성은 모두 생산성을 기반에 둔 관계이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관계는 사랑과 희생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1928년 6월에 발간된 <기독신보>에는 주기철 목사의 조사가 실려 있다. 승동교회 5대 담임목사였던 김영구 목사의 부음에 즈음한 글인데, 주기철은 조선 청년의 양사우(良師友)를 불러갔다고 탄식하고 있다.
“저희들은 다시 누구의 지도를 받으오리까? 지식의 師(스승 사)는 있으되 신앙의 師는 없습니다. 신앙의 師는 있으되 식견의 師는 없습니다. 교회를 질책하는 자는 많되 교회를 충고하는 자는 없습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자는 많되 교회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비단 주기철만의 탄식이겠는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모든 자들이 몸과 입술을 가볍게 움직이지 않고 선지자적 삶을 살아간다면 어찌 소망이 전혀 없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시대마다 고난은 있어 왔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우울하지 않은 나라이다.
임종구 목사는 대구 푸른초장교회를 개척하고, 제자훈련 목회철학으로 16년째 목회하고 있다. 대신대학교를 거쳐 현재 총신대 일반대학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 과정 중에 있으며, 전국 CAL-NET 사무총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