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10년 03월

고난에서 캐어내는 하나님의 뜻

문화읽기 임종수 목사 _ 큰나무교회

15년 전 고난주간 토요일, 전날에 계약한 교회당의 부지를 다시 한 번 살피고 귀가하는 길이었습니다. 땅은 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어우러진 공원에 접하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3층에 제비집처럼 걸려있던 작은 교회가 교회의 집을 짓게 된다니…. 그것도 땅값이 금쪽같은 서울에서…. 저는 들뜬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교우들의 주름진 가난의 모습들이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아, 어떻게 감당하지.’ 저는 핸들을 쥔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절실한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주님, 쉽게 짓게 해주세요.” 그런데 그 순간입니다. 제 마음을 ‘쿵’ 찍는 충격처럼 ‘아니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런 수고와 애씀이 무서우면 뭐하러 교회를 짓겠느냐? 바로 곁에 있는 ㄴㅅ교회에 가면 자리가 많지. 아니면 ㅅㅂ교회로 가렴. 거기인들 너희를 거절하겠느냐?”하는 뜻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또 자문자답하고 있었지요.
“그래, 어느 부모가 잘생기고, 영리하다고 남의 아이와 자기 아이를 바꾸자고 그러겠는가? 또 그렇게 바꾼 아이가 진정 자기 아이가 될 수 있겠는가? 고통 가운데 낳았고, 힘들게 길렀으니 내 아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저도 모르게 젖은 얼굴을 훔치며 “아멘, 감사합니다. 예, 저희가 하지요.” 그렇게 응답했습니다. 그렇지요. 수고 없이 지어진 교회당이 어떻게 ‘내 교회,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35개 가정의 가난뱅이들이 똘똘 뭉쳐서 엄청난 땅 값을 지불하고, 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고난이라는 과정
옛 어른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남을 괴롭히는 깡패나 강도들을 흔히 불한당(不汗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한당의 ‘한’자가 땀 한(汗)자입니다. 땀 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무리를 불한당이라고 한 것이지요.
바울 사도께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전 3:10)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도 땀을 흘리는 자, 수고라는 대가를 지불한 이에게 성취하는 결과가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주 안에서 볼 때 고난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난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차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까?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의 무서운 고난의 세월은 그들의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려는 훈련이었던 것이지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훈련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대에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고난은 6.25 한국전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극은 세계가 우리 한국에 들어오고, 우리 민족이 세계로 나가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지요. 오늘 한국 교회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도 6.25전쟁을 겪고 극복하는 신앙이 만든 결실이었습니다. 고난은 힘들었지만 큰 유익을 주었고, 하나의 결과를 만드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요행만을 좇는 사람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 속에는 고난은 피하고 요행만을 바라는 풍토가 가득합니다. 누가 잘되면 ‘아멘 할렐루야’고 누가 좀 잘 못된다 싶으면 ‘뭐 문제가 있는 거야’하며 그 신앙을 판단하며 비하시키는 모습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만사형통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 찬송시인인 크로스비(Fanny Crosby)는 난 지 6주 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95세를 살았지만 시각장애에서 벗어나는 형통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은 가사의 번역이 잘못된 것이지요. 원문은 ‘예수께서 선하게 잘 인도해주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녀는 시각장애의 처지를 오히려 감사하며 평생 8천여 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교회가 신앙으로 요행만을 바라는 자리가 되고, 사람의 욕구를 채우는 복을 팔기에 급급하다면 그것은 문패만 바꾸었을 뿐 결국 서낭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 가신 고난의 길
두려움에 있어서는 주님도 예외는 아니셨지요. 고난의 밤 기도의 처소로 가실 때 주님은 매우 괴로워하며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겠구나. 너희는 여기 있으면서 기도해다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이 괴로움을 토로하신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어서 다시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께서는 살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죽으려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대속,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기왕이면 신앙생활 멋있게 하자고!” 그것은 내 생각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그 고난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주님을 따르는 삶은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지요. 그 결실이 형통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지 않던 고난일지라도, 아니 순교라 할지라도…. 우리 신앙인은 적어도 그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임종수 목사는 성결신학교와 서울신대목회대학원에서 공부하였고, 큰나무교회를 섬기고 있다. 또한 사단법인 아름다운 동행, 교회건축문화연구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좋은 교회로 가는 길』이 있다.